79.
푸르스름한 공기가 깔린 이른 아침, 잠에서 깬 제인이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드래곤을 탄 이후부터의 기억이 토막토막 끊겨서 났다.
오는 내내 멀미를 했던 것 같다.
그러다 내리자마자 토했고, 침대에 엎어져서 세실에게 오만가지 쌍욕을 들었던 장면들이 단편적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악몽 같은 속삭임만은 생생했다.
그녀는 자조적으로 웃다가 몸을 일으켰다. 제인은 이층 침대에서 아래를 둘러보았다. 방안은 숙소인 듯했다. 침대 아래에는 밀리타가 잠들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딨지?
두꺼운 겉옷을 챙겨입은 제인은 다른 사람들이 잠을 깰까 봐 살금살금 걸어서 밖으로 나왔다.
겨울 새벽 냄새가 무척 좋았다.
“커피 마실 테냐?”
제인은 누군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덩치가 크고 우락부락한 모습의 남자는 생김새는 달라도 전체적인 분위기가 세실과 닮은 사람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저, 다른 분들은 다 어디 계시죠?”
“프시오와 세실은 저 숙소에서 자고, 카이는 내가 지내는 숙소에서 자고 있단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숙소들을 가리키던 펠드툰이 다시금 물었다.
“커피는 따뜻한 게 좋겠지?”
“제가 타서 마실게요.”
“내가 탄 게 훨씬 더 맛있을 테니 잠깐 기다려라.”
“아니, 저…….”
제인이 뻗은 팔은 허공에서 그대로 멈췄다.
펠드툰은 이미 존재만으로 위협적인 몸을 빠르게 돌려서 건너편 숙소로 쿵쿵 걸어가 버린 후였다.
제인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잠시 기다리자 펠드툰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두 잔을 가지고 왔다.
“자.”
별 기대 없이 호로록 마신 제인은 잠이 싹 달아나는 표정으로 펠드툰을 보았다.
“맛있어요.”
“그렇지? 몸은 좀 어떠냐.”
“……나쁘지 않아요.”
펠드툰은 난간에 등을 기댄 채 섰다.
“그러고 보니 어제 인사를 못 했구나. 펠드툰이라고 한단다. 한때는 정신계 치유 마법사였고, 지금은 드래곤 마스터로 이곳에 있지. 편하게 아저씨라고 부르렴.”
“제인이에요. 세실에게 마법을 배우고 있어요.”
“내 딸이 잘해주냐?”
제인은 킬킬 웃었다.
“거칠고 다정해요.”
여전한가 보군.
펠드툰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그는 몸을 돌려서 난간에 팔을 기대었다.
이른 아침과 어울리는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펠드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신계 치유 마법사가 되려고 한다면서?”
“네.”
“너는 아직 모르겠지만,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마음의 문이 있단다.”
“마음의 문이요?”
“그래. 미안하게도 어제 네 상태가 나빠서 허락 없이 너의 문 앞에 갔었다. 그런데…….”
펠드툰이 어렵게 말을 이어갔다.
“문이 산산조각이 난 채로 부서져 있더구나.”
제인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당혹스러웠다. 마음의 문이라는 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어도 제 마음이 너절한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제인이 식어가는 커피잔을 만지작거리기만 하자 펠드툰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너는 선택할 수 있단다. 하나는 나에게 진료받아서 부서진 문을 회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그 문을 뛰어넘는 것이지.”
“진료를 받는다는 건 제 마음을 아저씨께 다 보여드려야 한다는 거죠?”
“그렇단다.”
“더 깊게요.”
“……그래.”
“선택의 결과는 어떻게 달라지나요.”
“스스로 그 문을 뛰어넘으면 강한 마법사가 되겠지. 반대로 내게 진료받은 후에는 문턱이 낮아지게 될 테니 그만큼 강해지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거다.”
제인은 고민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펠드툰이 제인의 표정을 읽었는지 타이르듯이 말했다.
“나는 네가 진료받았으면 한단다. 얼마나 걸릴지는 당장 판단하기 어렵지만, 네가 문을…… 뛰어넘지 못할 거라고 보기 때문이란다.”
펠드툰은 착잡했다.
사실상 두 가지 선택지 모두 낮은 확률이었고, 그나마 자신이 진료를 보는 게 현실적으로, 아주 미약하게나마 더 가능성이 있었다.
과연 진료하게 된다면 얼마나 걸릴까.
펠드툰은 드래곤 마스터로 전향한 지 오래였다. 진단하는 눈은 아직도 송곳 같았으나, 진단과 치료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럼에도 제인이 도움을 청한다면 펠드툰은 기꺼이 그 손을 잡아 줄 어른이었다.
이어지는 정적에 펠드툰이 제인을 보며 웃었다.
“기분 나쁘냐? 어쩔 수 없다! 사실인데 어쩌겠냐! 낄낄낄낄낄!”
……그것보다 아저씨 웃음소리가 더 기분 나쁜데요.
한참을 이상하게 웃던 펠드툰이 식어버린 커피를 쭉 들이켰다. 펠드툰의 시선은 먼 곳을 향해 있었다.
과거 혹은 미래에 가닿은 듯이.
“하지만 난 내 생각이 틀렸다고 증명해주는 녀석들을 좋아하지.”
제인은 세실이 부러웠다.
좋은 친구, 좋은 아버지가 있는 그녀가 무척이나 부러웠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자신의 스승이라는 사실이 좋았다.
제인의 정수리에 투박한 손을 얹은 펠드툰이 북북 긁듯이 거칠게 쓰다듬었다.
“고민해보고 말해다오.”
“네. 그럴게요.”
펠드툰은 제인이 손에 들고 있는 빈 잔을 가져가며 온기 실린 말을 남겨주었다. 거칠고 다정한 세실과 너무나도 닮은 사람이었다.
“제인, 마음의 문은 밖에서 뜯어내는 게 아니라 안에서 열어주어야 한단다. 그래야 다치지 않아.”
* * *
제인은 엘마뉴엘의 언덕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잠든 하루 사이에 엘마뉴엘에 완벽하게 적응한 밀리타와 카이를 보며 실소했다.
쟤네들은…… 사실 인간이 아닐지도 몰라.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드래곤의 등에 탄 그들은 현지의 드래곤 마스터들보다 더 민첩하게 결계 밖의 마물들을 처리하는 중이었다.
특히 밀리타의 그림자 마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마물의 그림자로 그들의 발을 묶은 뒤 검을 가볍게 그으며 간단하게 해치워댔다.
하지만 그런 밀리타보다 더 대단한 건 카이였다.
모두가 무기와 마법과 같이 사용하는 반면에 그는 달랑 검 한 자루를 가지고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마물들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그때 곁에서 드래곤의 마력을 한데 그러모아 놓은 세실이 제인에게 말했다.
“풀자.”
제인은 주어 없는 그녀의 말에 익숙한 듯 되물었다.
“뭐를요.”
“네르기니에서 걸어 놨었던 보호 마법 말이다. 슬슬 풀어도 될 것 같아서. 사실 그대로 둬도 상관은 없다만…….”
세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제인이 지내는 곳이 위압적인 마력을 가진 루의 거처라는 점을 감안하면 보호 마법을 계속 거는 편이 더 나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실은 보호 마법을 푸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제인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세실의 말을 기다렸다.
“……없다만?”
“보호 마법은 마나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지 않은 한 제약이기도 해. 나무를 덧대서 붕대를 감아 놓은 모양새랄까.”
“수련에 방해가 된다는 말이군요.”
“그래. 게다가 보호 마법을 완전히 풀었을 때 네가 루의 거처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지 확인하는 데에 드래곤의 마력만큼 좋은 게 없기도 하고.”
“어째서요?”
“드래곤의 마력과 데시안의 마력은 결이 아주 비슷하거든.”
세실이 손을 들어서 대기 중에 떠돌던 드래곤의 마력을 한데 모았다.
“그만큼 드래곤은 아주 강한 마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돼. 심지어 흘러넘칠 만큼 풍부해서 대기 중에 섞여버리지. 그런 걸 보통 잉여 마력이라고 부른다.”
이내 손바닥 위에 아지랑이 같은 마력이 동그랗게 뭉쳐졌다. 세실은 뭉친 마력을 모아 놓았던 마력과 합쳤다.
“그러다 드래곤의 잉여 마력이 대기에서 균형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많아지게 되면.”
이어서 밀리타와 카이가 드래곤 마스터들과 함께 토벌 중인 마물들을 가리켰다.
“그 안에서 마물이 태어난다.”
제인이 이해했다는 듯이 말했다.
“엘마뉴엘에 마물이 많은 이유도 드래곤이 많기 때문인가 보네요.”
“정확히는 엘마뉴엘 바깥이지.”
“그러네요. 외곽에서만 나타나는 이유라도 있나요?”
“결계 안에서는 드래곤 마스터들이 잉여 마력을 정화하기 때문에 마물이 생성되지 않아. 하지만 결계 밖에서는 정화가 되지 않으니까 자연스럽게 마물이 생겨나는 거야.”
세실이 몸을 풀며 물었다.
“우선은 이 정도 기본 상식만 알고 있으면 돼. 다른 질문은?”
“없어요.”
“그럼 시작하자.”
보호 마법을 푸는 건 거는 것보다 훨씬 쉽고 간단했다. 제인의 마나가 자연스럽고 막힘없이 흐른 덕분이었다.
세실이 말했다.
“보호 마법은 풀었으니 이제 마비력을 천천히, 최대치로 올려라.”
제인은 세실의 가르침을 어려움 없이 곧잘 따라갔다. 마비력이 최대치를 찍었을 때쯤 세실이 경고하듯 말했다.
“못 버티겠으면 말해라. 혹시라도 숨 막히는 느낌이 들면 바로 손들고.”
“네.”
제인이 웃음기 없는 대답을 했음에도 세실은 몇 번 더 드래곤 마력의 위험성을 강조한 뒤에야 이전까지 모아 두었던 드래곤의 마력을 제인에게로 옮겼다.
제인의 주변을 드래곤의 마력이 둘러싸면서 생긴 미풍 같은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어떻니?”
긴장감이 역력한 말투로 세실이 물었다.
“……세실.”
“힘드니?”
“아뇨, 그게 아니라…….”
평소에 뭘 가르치던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세실이었다. 그런 그녀가 다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제인 역시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제인은 무척 당황스러웠다.
왜냐하면 제인은 지금.
“아무 느낌도 없는데요, 세실.”
세실의 잇새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