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78)화 (78/168)

78.

루가 짧게 대답했다.

“네.”

“불행해?”

“덕분에.”

루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그레데엘므는 전처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케이크를 퍼먹었다.

루는 시선을 정면에 두며 말했다.

“당신 냄새, 그만 났으면 싶은데.”

그레데엘므의 콧노래가 멈췄고, 루는 무감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 몸에서 말이죠.”

“봄이 끝나면 사라질 거야.”

“그 외 방법은?”

“없대도. 신에게 맹세한 맹약의 증표가 그렇게 쉽게 사라질 것 같아?”

그레데엘므는 무엇이 재미 난지 불쑥 히죽거렸다.

“애송아, 봄이 끝나면 사라지는 게 비단 냄새뿐일까! 너와 나 둘 중 하나는 처음부터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질 텐데, 그깟 냄새 가지고 뭘.”

루의 입가에 조소가 그려졌다.

그깟 냄새 가지고 먼저 장난친 게 누군데 이러실까.

“당신 말이죠. 아무래도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은데.”

루가 그레데엘므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깊게 파인 미소를 유지하며 물었다.

“별이 되지 않을래요?”

입 안에 케이크를 가득 넣은 그레데엘므가 눈을 토끼처럼 뜨고 루를 보았다.

루가 이어서 말했다.

“당신이 했던 말대로, 당신 운명이 내 손에 들어오게 된다면 하늘의 별로 만들어 드릴게요. 어때요?”

낭창한 얼굴에 미소가 확 번졌다.

“별……!”

“세상 무엇보다 아름다운 비극으로 빛나게 해드리죠.”

그레데엘므는 케이크를 입에 그득히 채워 넣고 사르르 녹는 표정을 지었다.

“감미로운 결말이네.”

* * *

펠드툰은 몇 시간째 잠들어 있는 제인의 상태를 살펴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비위가 약한 친구구먼. 거기다 과거에 정신적으로 받았던 충격까지 자극한 거다.”

세실이 물었다.

“자고 나면 괜찮아져요?”

“녀석아, 그게 문제가 아니잖냐! 네 놈이 정신계 치유 마법사를 키운다길래 한껏 비웃어줄까 싶어서 왔더니…….”

“비웃어주러 왔다는 말씀을 너무 대놓고 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것보다, 세실.”

펠드툰이 다소 가라앉은 표정으로 물었다.

“이 친구 뭐냐.”

세실은 펠드툰이 무엇을 묻는지 알았으나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조용히 벽 쪽에 있는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펠드툰은 제인에게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신체계 치유 마법사인 네가 어디까지 볼 수 있는 지는 모르겠다만…… 너 정말 이 친구가 정신계 치유 마법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냐?”

아뇨.

세실은 그 대답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펠드툰은 침묵으로 일관하는 세실이 답답했는지 이전보다 언성을 높여 말했다.

“문이 다 부서져 있지 않냐! 심지어.”

“문 뒤에 아무것도 없죠.”

펠드툰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전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암흑으로 보여서 그렇지, 아무것도 없진 않을 거다.”

오히려 그래서 더 참담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무언가가 잔뜩 쌓여있다.

아마도 감정의 찌꺼기가 가득하리라. 표출하지 않았던 무언가가 마음의 상흔으로 쌓이고 쌓여서 까마득해진 것이리라.

펠드툰은 고요한 시선으로 다시 제인의 가장 깊은 내면을 살폈다.

부서진 문.

그 뒤, 누구도 함부로 발을 들이지 못할, 들이지 않을 어둠과 적막.

이걸 보고서도 저 문턱을 넘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건가.

“대체 무슨 생각이냐?”

“프시오가 진료받겠대요.”

질문과는 판이한 답변이 돌아왔음에도 펠드툰은 바로 반색했다.

“그게 정말이냐?”

어린아이 모습으로 스스로 저주를 걸었던 날부터 몇 번이나 진료받아야 한다고 했으나 프시오는 한결같이 거절했다.

-죄송해요, 아저씨.

하도 답답해서 세실에게 달래 보라고 말했던 펠드툰이었다.

하지만 세실은 이미 저보다 수배는 더 거절당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저렇게 놔두면 안 되는데.

세실은 그렇게 마음에 걸려 하는 펠드툰에게 프시오가 진료받기를 거부했던 이유를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아버지. 프시오랑 호엘리반 사랑하는 사이에요.

-둘이 연애한다고?

펠드툰의 눈빛이 흔들렸다.

프시오 같이 예쁜 아이와 아들이 만나는 건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지만 그래도 되나? 지금은 어린아이 모습으로 변해버린 프시오와 연애를?

아버지로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였다.

-아뇨. 서로 사랑하긴 하는데, 서로 그걸 몰라요.

-그게…… 무슨 말이냐?

-말 그대로예요.

펠드툰은 그제야 프시오가 왜 진료를 거부했는지, 이유를 말해주지 못했던 건지 이해했다.

사랑하는 남자의 아버지에게 자신의 가장 밑바닥에 놓인 상처를 꺼내 보일 수 있는 여자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

그러니 설령 그 사랑을 깨닫지 못했더라도 이유 모를 거부감이 들었을 것이다.

펠드툰은 기다려주기로 했다.

“그런데 제 제자한테 받겠대요. 진료.”

“……뭐?”

펠드툰은 꽝꽝 언 얼음처럼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세실은 조용히 아버지를 외면했다. 이내 정적을 비집는 소리가 들려왔다.

“낄…….”

“…….”

“낄낄낄낄낄!”

세실은 다소 흐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 웃음소리는 변하질 않으시네.

한참을 배를 잡고 낄낄거리던 펠드툰은 눈가에 찔끔 번진 눈물을 닦아냈다.

“프시오는 이 친구 상태가 어떤지 알고는 있냐?”

세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펠드툰은 마저 웃으며 세실의 옆에 털썩 앉았다.

오래전, 세실이 신체계 치유 마법사가 되겠다고 선언했을 때 펠드툰은 허무맹랑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태어나면 몰라도 이미 타고난 계열을 어찌 바꾼다는 말인가?

펠드툰은 허튼 소리하지 말라고, 네가 가진 힘을 갈고 닦을 생각이나 하라며 완강하게 반대했었다.

살아가면서 부딪힐 벽과 엎어질 좌절이 얼마나 많은데, 눈앞에 뻔히 보이는 장애물에 넘어지길 바라는 부모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는가.

프시오가 펠드툰을 따로 찾아온 것은 얼마 후였다.

딸의 친구는 맹랑했다.

-아저씨, 제가 확신해요. 세실은 정신계 치유 마법사가 될 거예요.

그 아이는 드호아망에서 매 학기 수석을 놓친 적이 없는 수재로 유명했다. 그리고 세실의 아버지인 자신보다 더 딸을 믿어주었다.

-제 확신은 틀린 적이 없어요.

그렇게 맹랑한 말을 남기고 돌아간 프시오는 세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은 물론, 변이될 계열을 버틸 수 있도록 체력과 식단도 균형 있게 챙겨 주었다.

각고의 노력은 몇 년간 이어졌다.

세실은 드호아망 최초로 정신계에서 신체계 치유 마법사가 되었다. 그 사실이 일파만파 퍼지면서 한동안 드호아망이 떠들썩했었다.

세실이 악착같이 노력한 결과였으나, 사실상 프시오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이후, 펠드툰을 다시 찾아온 프시오는 세실과 나란히 서서 자그맣게 웃었다.

-말씀드렸죠? 제 확신은 틀린 적이 없어요.

세실은 그때 한쪽 입꼬리를 광대뼈까지 닿을 듯이 당겼다.

정말이지 맹랑한 녀석들이었다.

의자에 기대어 앉아있던 펠드툰이 허벅지에 팔꿈치를 대고서 상체를 앞으로 약간 숙였다.

“다시 물으마, 세실. 너희는 저 친구가 정신계 치유 마법사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거냐?”

“……제가 프시오한테 그랬거든요. 정신계 치유 마법사가 되려면 넘어야 할 문이 있다고. 제인은 못 넘을 거라고. 그때 프시오가 제게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펠드툰은 무슨 말이 나올까 흥미진진한 얼굴로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세실은 프시오의 말투를 그대로 따라 했다.

“우리가 단정 지을 문제는 아니지 않아?”

펠드툰이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는 사이 세실은 의도치 않게 아버지와 닮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펠드툰은 결국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네 녀석들은 여전히 맹랑하구나!”

* * *

주인님이 돌아왔다.

그것도 살아서.

예쁘지 않게 웃는다는 이유로 데시안을 열일곱이나 죽인 그레데엘므가 있던 명계에서 살아서 돌아온 것이다.

루가 가고 나서도 한참 동안 펑펑 울었던 라트올은 그가 살아서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 기뻤다.

혹여나 재수가 없어서 그레데엘므와 마주치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심기가 불편하지는 않으실까 했던 걱정과는 다르게 루는 평소와 다름없이 식사를 끝내고 작업실에 왔다.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라트올은 명계에서 아무 일도 없었구나, 안도하면서 녹니스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작업에 집중했다.

루가 작업실에서 사라졌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로부터 한참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라트올은 불안한 마음에 본채로 올라와서 루를 찾았다. 그를 발견한 곳은 거실이었다.

루는 본채에 있던 시계란 시계는 죄다 거실로 가져와서 분해해서 뜯어 놓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시계가 이상하군.”

“…….”

주인님이 살아서 돌아왔다.

그러니 멀쩡한 시계들을 꺼내서 엉망진창으로 망가뜨리고도 ‘분명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청승은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루의 곁에 쪼그려 앉은 라트올이 분해된 시계들의 잔해를 정리했다.

“시계는 이상하지 않아요.”

“그럴 리가. 그런데 왜 느리게 가지?”

그것도 종일.

오랜만에 찾아간 명계에서의 시간은 일주일 같았고, 그레데엘므와 딸기 케이크를 먹었던 시간은 자그마치 일 년 같았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왔을 땐 겨우 하루의 저녁 무렵이지 않은가.

루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가만히 시계를 보다가 픽픽 웃으면서 요리까지 했었다.

그렇게 잘 차린 음식을 느긋하게 음미하면서 먹어도, 작업실로 내려와서 해야 할 일을 하는데도 시간은 느리게만 갔다.

그때 라트올이 말했다.

“시계가 이상한 게 아니라, 제인이 없는 것뿐이에요.”

“무슨 상관이지.”

“그리움이라는 건 시간이 느리게 가도록 만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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