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77)화 (77/168)

77.

그레데엘므가 기분 나쁜 조소를 띄웠다.

이내 루를 향해서 몸을 돌렸다. 루는 여전히 느긋한 얼굴로 그레데엘므에게 시선을 꽂은 채 타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런 풋내기랑 뒹굴고 계시면 쓰나.”

“애송이가 어울려 줄래?”

“어떻게 어울려 드리면 될까요.”

그레데엘므가 목을 움켜잡는 모양새로 손을 뻗쳤다.

“목. 이리 넣어.”

루가 느긋하게 입매를 올리며 그 안으로 목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그레데엘므가 손아귀에 잡힌 루의 목에 힘을 가하면서 벽 쪽으로 한 걸음씩 느리게 걸어갔다.

어느덧 벽을 등지고 서게 된 루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웃으며 그레데엘므를 마주했다. 핏줄이 바짝 선 피부만 아니라면 평온해 보이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루는 정말로 우습고, 웃겼다.

한참을 그의 목을 조르던 그레데엘므는 돌연히 손을 풀고 툴툴거렸다.

“지루해라.”

“신음이라도 내어 드렸어야 했나. 듣기 좋게.”

루가 목덜미를 만지며 말했다.

그 소리에 누구보다 살갗이 오그라든 건 다름 아닌 타타였다.

벽에 기대어 있던 루는 목을 다시 길게 뺀 채 살짝 기울였다.

“다시 졸라봐요, 숨넘어가서 헐떡거리는 얼굴도 보여 드릴게. 당신 눈과 귀가 즐겁게.”

타타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레데엘므에게 목을 졸렸을 때만큼 루의 마력에 숨을 쉬기가 어려운 탓이었다.

이 상황이 빨리 끝나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콱 죽어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할 무렵, 그레데엘므가 히죽거리면서 루를 불렀다.

“애송아.”

“네.”

“애송아.”

“……얼마나 더 부르실 참인지.”

재차 히죽, 웃던 그레데엘므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단단하고 동그란 무언가를 꺼내어 루의 손에 쥐여 주었다.

“여기서 기다려.”

사탕이었다.

루는 잠시 말문이 막힌 얼굴을 했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노망이…… 예쁘게 드셨군.”

“달아.”

“…….”

“먹고 있어. 어디 가지 말고.”

그레데엘므는 그대로 휙 돌아서 회의장으로 총총 걸어갔다. 제 손으로 목을 졸라서 죽은 사체들을 뒤로하고 총총.

그레데엘므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꼭꼭 숨어있던 자들이 어깨를 늘어트리고 숨을 쉬었다.

그렇게 주변의 팽팽한 긴장감이 누그러졌으나 루의 시선은 여전히 사탕에 머물러 있었다.

“…….”

하이데스와 이야기를 마치고 명계 탕에서 씻고 나오자마자 본 게 그레데엘므였다.

그의 손아귀에는 메 데시안이 목이 졸린 채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고, 주변에는 검은 가루처럼 천천히 소멸하고 있는 시체 두 구가 널브러져 있었다.

“저…….”

루는 육중한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 그레데엘므에게 목이 졸리고 있던 메 데시안이 우물쭈물하다가 허리를 숙였다.

“사……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낯이 익은 녀석이었다.

라트올을 데리고 왔을 때 눈물 콧물 다 흘렸던 녀석인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루는 손에 쥔 사탕을 타타에게 던졌다.

타타가 엉거주춤 사탕을 받아들었을 때였다.

루가 물었다.

“이름.”

“……타타입니다.”

* * *

연옥에 납품하러 온 라트올은 당혹스러웠다.

고개를 푹 숙인 솔레리안이 설교는 고사하고 수 분째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인지 설교를 듣는 것보다 더 피곤했다.

한참을 침묵 속에 부유하던 라트올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실 말씀 없으시면 납품확인서에 인장 찍어주세요.”

그러자 솔레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당신이 저를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하는지 압니다.”

맞는 말이긴 한데요.

“……저 방금 인장 찍어달라고 했어요.”

“저도 절 한심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 말, 듣고 있어요?”

“네. 저도 하필이면 귀라는 게 달린 바람에.”

“…….”

라트올은 진심으로 의아했다.

뭐지? 납품업체 물 먹이는 방법을 새롭게 고안해 온 건가?

문득, 솔레리안이 물었다.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지옥은 왜요.”

“그냥 다 죽여버리고 거기 갈까 싶어서요.”

“…….”

“……농담입니다.”

라트올은 확신했다.

오늘 납품확인서에 인장을 받는 건 역대급으로 힘들 것이라고.

* * *

그 시각.

루는 몇 시간 동안 그레데엘므가 목을 조르던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다.

타타는 그런 루를 매대에 올려놓은 마석을 정리하는 척하면서 훔쳐보기 바빴다.

평온해 보이는 표정과는 달리 몸에서 흐르는 마력이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

그렇지 않아도 명계의 대기는 온도와 습도가 모두 높은데 루의 마력까지 더해지니 불가마가 따로 없었다.

이렇게 땀이 흥건하게 나는데도 오한이 들었다.

그 이유 역시 루였다.

-나는 데시안이야. 네가 해야 할 게 고작 감사 인사라고 생각하나?

-네……?

-은혜 갚아야지.

-…….

낮고 음산한 목소리에 허둥지둥하는 거리기도 잠시, 제 귀에만 들리도록 속삭이는 귓속말에 타타는 심장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곧이어 다가왔던 것처럼 다시 느리게 귓가에서 멀어진 루가 베일 듯한 시선으로 타타를 내려다보았다.

-그게 네 소임이니 잊지 말도록.

다시 생각해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눈이었다.

기억을 떨치려고 고개를 휙휙 젓는 사이 닫혀있던 회의장 문이 열렸다. 타타는 재수 없게 또 그레데엘므의 눈에 띌까 싶은 두려운 마음에 황급히 몸을 숨겼다.

아니나 다를까.

회의장에서 나온 그레데엘므가 넓은 옷 소매를 팔랑거리며 바로 루에게 다가갔다.

뒤따라 나오던 고위 계급 데시안들과 타락한 르젤들은 루와 그레데엘므를 힐끗거리다가 빠르게 빠져나갔다.

“애송아.”

루가 천천히 눈을 뜨자 그레데엘므가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타락한 주제에 천계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불쾌한 대기가 도사리고 있는 이 땅에서 유일한 빛처럼 아름다운 존재이자 루가 당장이라도 밤하늘의 별로 틀어박고 싶은 오래된 악연의 굴레였다.

루는 나른한 미소를 입에 물고 대답했다.

“네, 말씀하세요.”

“사탕 먹으면서 기다렸어?”

킬킬거리던 루가 그레데엘므의 낙낙한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사탕 한 알을 꺼내어 그자의 입에 넣어주었다.

“당신이나 먹어.”

그레데엘므는 그대로 사탕을 오물거렸다.

“우리 집에 가자.”

“납치나 협박, 그런 건가?”

“초대.”

“거절한다면?”

그레데엘므가 반짝거리는 눈을 좁히며 빙그레 웃었다. 몸을 일으켜 세운 그는 명계의 출구 쪽으로 몸을 틀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그럼 납치나 협박이 될 거야.”

“……초대가 이리 난폭해서야.”

“그러니까 애송아, 내 초대를 상냥하게 만들어줘.”

그레데엘므는 루를 보지도 않고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루는 머리를 쓸어 넘기고 그를 따라서 명계의 출구 쪽으로 걸어 나갔다.

그레데엘므의 거처는 동굴이었다.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동굴 속을 얼마나 걸었을까.

이내 평범하던 암석 동굴이 눈부시게 빛나는 크리스탈로 이루어진 동굴로 바뀌어 갔다. 여러 갈래의 길을 몇 번이나 꺾어서 들어가자 모든 게 크리스탈인 홀이 모습을 드러냈다.

중앙홀에는 역시나 크리스탈로 제작된 넓고 긴 식탁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저-기 앉아.”

그레데엘므는 콧노래를 부르며 긴 식탁을 가리켰다.

루는 고분고분하게 자리에 앉아서 턱을 괴고 홀을 둘러봤으나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다.

넘칠 듯 찰랑거리는 분노는 바닷속 심해처럼 가라앉아있었고 그 위로는 지루함과 따분함만이 부유했다.

돌아온 그레데엘므는 손에 딸기 케이크를 들고 있었다.

그레데엘므가 아이처럼 웃으며 말했다.

“짠!”

“……가지가지 하시네.”

그레데엘므는 케이크에 포크 두 개를 푹 찔러 넣고 루의 옆자리에 앉았다.

“마주 보고 먹으면 역겹잖아.”

“어떡하지? 나는 당신 옆에 앉는 것도 구역질 나는데.”

그레데엘므는 낭창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루의 말을 무시했다. 그리고 사탕을 다 녹여 먹었는지 자르지도 않은 케이크를 포크로 크게 떠서 한입에 먹었다.

“너도 먹어, 애송아.”

“…….”

“평범한 딸기 케이크야.”

루는 피식거렸다.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그런 것쯤은 그냥 보면 안다. 헛짓거리한 건지, 만 건지.

그럼에도 먹을 생각이 없는 듯 루가 실실거리며 턱을 괴자, 그레데엘므는 식탁 위에 올린 루의 손에 포크를 쥐여주었다. 그리고 순진한 눈으로 뚫어져라 보았다.

“안 먹고 뭐 해?”

“이번엔 어떤 협박으로 먹여 주실까 싶어서.”

“이거 다 먹으면 보내줄게.”

포크를 식탁에 내려둔 그가 열 손가락을 비장하게 쫙 펼쳐 들었다.

“너한테 손가락 하나 안 대고 곱게, 예쁘게.”

“앞 접시. 케이크 나이프.”

그레데엘므의 얼굴에 걸려있던 미소가 바람 빠지듯 새어나갔다.

“너 참 성가시다. 그냥 포크로 퍼먹으면 안 돼?”

루는 양손을 들고 빙그레 웃었다.

안 돼요.

그레데엘므는 한숨을 폭폭 쉬면서 천장을 한번 봤다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어디에선가 앞 접시와 케이크 나이프를 가져와서 루 앞에 놓아주었다.

그제야 루는 깨끗한 부분의 케이크를 덜어서 느긋하게 먹기 시작했다.

넓디넓은 크리스탈 홀.

타락한 르젤과 현혹의 데시안이 딸기 케이크를 먹고 또 먹었다.

기묘한 광경은 한동안 쭉 이어졌다.

긴 식탁 위에는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소복한 눈이 내리듯이 고요하기만 했다.

그러다 일순, 그레데엘므가 눈 위에 발자국을 내듯 입을 열었다.

“선물은 잘 받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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