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76)화 (76/168)

76.

“그럼, 말로 하렴. 담백하게 감겨 줄 테니.”

하이데스의 말에 루가 방긋 웃었다.

“예쁜 별 하나 띄워주시죠.”

“……별?”

“예.”

“……하늘에 뜬, 반짝반짝 작은 별?”

“예.”

“안 본 사이에 농이 재미나졌구나, 그대?”

루는 입술을 다문 채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옥좌에 앉은 하이데스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하이데스가 고개를 옆으로 까딱거렸다.

“그대는 내가 천계의 질서로 보이니?”

“고루한 물음에 답을 드리자면 당연히 명계의 혼돈, 마왕님으로 보입니다.”

루는 이어서 검지로 옥좌를 가리켰다.

“제가 당신을 이 자리에 앉혀드렸기에, 아주 잘 압니다.”

하이데스는 그제야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뭘까.

뭘 원하길래 저 뱀 같은 놈이 명계까지 와서 나를 홀리려 드는 걸까.

그러나 딱히 짚이는 게 없었다.

루는 게으름이 야망을 삼켜버린 나태하고 권태로운 데시안이었다. 그래서 높은 계급은 옛날 옛적에 대차게 거절하지 않았던가.

3세기 전에 루가 자신을 마계의 왕이 되도록 힘썼던 것 역시도 즉위하는 동안은 명계의 일로 귀찮게 하지 말아 달라는, 소박하고도 단순한 이유였다.

그렇게 루의 뒷심으로 명계의 혼돈이 된 하이데스는 명계의 누구라도 루에게만큼은 함부로 굴지 못하도록 일선에 정리해 두었다.

몹시도 간단한 일이었다.

그랬기에 계산이 맞지 않았다.

수지가 맞지 않은 일은 어물쩍 넘어가 버리면 터지고야 만다. 하이데스는 자신을 마왕으로 만들어 준 그에게 원이 있으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던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하이데스는 명계의 혼돈인 마왕인 동시에 약속을 반드시 시키는 데시안이었으므로.

문제는 지금 그의 부탁 또한 계산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이데스가 물었다.

“그대, 나는 명계의 왕이야. 내가 그걸 어떻게 들어주지? 해와 달이 뜨는 하늘에 별을 때려 박는 건 천계의 일이지 않니?”

루는 같잖아서 웃음이 났다.

그는 누가 마왕이든 당장이라도 옥좌에서 끌어 내리고 아무나 다시 앉힐 수 있는 데시안이었다.

그 사실을 지금 마주한 현 마왕에게까지도 숨긴 채 굳이 그러지 않는 건, 귀찮은 일이 더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그가 웃으며 생각했다.

내가 꼬리를 덜 흔들었나 보군.

“그 순진한 양의 탈.”

하이데스에게 천천히 다가간 루는 그의 허벅지 위에 느슨하게 걸터앉았다.

“그거 같이 쓰고 놀아 드리면 되는 겁니까, 마왕님.”

하이데스.

명계의 질서이자 마왕이기 전에, 기만의 데시안으로 태어난 자.

“오래전에 당신이 가르쳐 주었죠. 이기기 어려울 때도, 지는 게 귀찮을 때도, 최선을 다해서 상대방이 얕잡아 보게 하라고.”

“…….”

“양의 탈을 쓰면 그것 자체로 허점이 된다고.”

“…….”

“마왕님.”

나른하고 달콤한 목소리.

“하이데스 님.”

“……그대.”

하이데스가 짧게 탄식하듯 실소를 지었다.

한낮의 단잠과 같은 루의 목소리 이면에서 고요하게 들끓고 있던 소름 끼치는 분노를 뒤늦게 발견했다.

“몹시 화가 나 있구나.”

루의 입가에 물린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별을 영원히 박아 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잠시, 아주 잠시면 됩니다.”

“그대가 바라는 게……, 설마.”

눈을 가늘게 뜬 루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유성입니다.”

별을 띄우고 떨어뜨리는 일!

하이데스는 그게 별을 바꿔 치기 하는 일이라는 걸 바로 눈치챘다.

위험한 일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지금까지 지켜왔던 명계와 천계, 그리고 연옥의 영역이 흔들릴 수 있었다.

루의 의도가 명백히 드러나자 하이데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제 허벅지에 앉아서 똬리를 튼 뱀의 눈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이데스 님, 부디 청을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푸른 동공에 아름답고도 사나운 이채가 돌았다.

“작정하고 홀려버리기 전에.”

하이데스의 속눈썹이 떨렸다.

농담이 아니다.

이 자는 저를 홀릴 것이다.

뼛속까지 홀려서 감정과 사고, 의지까지 제멋대로 휘두를 것이다.

양의 탈을 벗은 하이데스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모했다. 이어서 순식간에 루의 가슴 위로 커다란 손을 올렸다.

하이데스의 행동에 루는 재미있다는 듯이 키득거렸다.

바로 그 순간, 하이데스의 손톱이 길어지면서 그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온화하던 목소리가 낮고 음산하게 바뀌었다.

“그대, 남길 말은.”

“끝까지.”

루가 웃으며 하이데스의 손을 잡았다. 이어서 그의 손톱을 더 깊게 안으로 밀어 넣었다.

“끝까지 파고…… 드셔야 합니다……, 마왕.”

“……그대의 유언치고는 아름답지 않구나.”

고개를 숙인 루는 계속해서 하이데스의 손을 잡고 자신의 가슴팍을 짓눌렀다. 손톱이 점점 더 깊이 심장을 파고들었다.

심장 안에 들어있는 생명의 내핵에 닿기 직전.

하이데스가 빠르게 손을 빼내자 루가 피를 왈칵 토해냈다.

바닥에 붉은 피가 거칠게 흩뿌려졌다.

루는 입술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천천히 말했다.

“그야, 유언이…… 아니니까.”

“……하.”

“이거 질질 흐르는 느낌, 불쾌한데, 후…… 좀 막아 주시죠……. 정말 죽일 거, 아니면.”

루는 숨을 가쁘게 쉬는 와중에도 키득거렸다.

하이데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루의 가슴팍에 난 심장과 피부의 구멍을 원래대로 재생시켜 주었다. 그러고는 피로한 듯 옥좌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현혹의 데시안은 피 냄새마저 달콤했다.

미친 새끼…….

하이데스는 속으로 몇 번이고 미친 새끼, 하고 욕을 곱씹으며 말했다.

심장이 파여서 피를 토해낸 것은 루였건만, 핑 돌 정도로 머리가 어지러운 건 하이데스였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아랫도리가 뻐근할 정도로 단내 나는 피 냄새가 사그라들기만을 바랐다.

그사이 루는 피로 흥건하게 젖은 윗옷을 벗어 던지고 옥좌 밑 계단에 앉았다.

조금 전의 헐떡임이 농락처럼 느껴질 정도로 성해 보였다.

천천히 눈을 뜬 하이데스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럴 거면 마왕, 그대가 하렴.”

“그런 걸 왜 합니까? 귀찮게.”

“아니야, 나는 언젠가 그대가 꼭 옥좌에 앉았으면 해. 그대도 그대 같은 개새끼를 수하로 둬 봐야 내 심정을 알 테니.”

루는 킬킬 웃었다.

“꼬리를 잘 흔들었나 봅니다. 개새끼라고 하시는 걸 보니.”

하이데스가 아무 말이 없자 루는 장난치듯이 가볍게 물었다.

“아닙니까.”

“아니라고 하면 작정하고 홀리려 그랬니.”

“그러려고 왔습니다.”

“……미쳐 돌았구나, 그대.”

“어느 때보다도 정신이 맑습니다.”

“정신이 맑다고…….”

하이데스는 말문이 막혔다.

“게을러 빠진 제가.”

루는 제 손과 벗어 던진 옷, 그리고 바닥에 베인 핏자국을 보며 말했다.

“지금보다 더 미쳐 돌아버리면 이따위 번거로운 계략을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그대, 이유는?”

“어째서 이유가 붙습니까? 제가 드리는 청에.”

오만하기 짝이 없는 투였다.

옥좌에 기대어 있던 하이데스는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이데스는 기만의 데시안이었다.

양의 탈을 쓰고 상대의 허점을 파고들 수 있는 건 강해서였다. 그렇게 강하고 교활한 데시안인 하이데스가 루의 숨통을 끊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녹니스.

그는 녹니스로 죽은 인간의 영을 기만하는 일이 꽤 마음에 들었다.

조금 더 즐기고 싶고, 맛보고 싶었다.

어지러운 질서 속에서 중독된 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감각이, 기만이 미치도록 달았다.

현혹의 데시안이 손대는 것들은 언제나 그랬다.

어떤 기만보다도 하이데스를 취하게 했다.

그런데도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던 것인데 들어먹기는커녕 되려 홀리겠다고 덤벼들다니.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루가 다시 옥좌로 걸어왔다.

루에게서 나는 달콤한 피 냄새에 하이데스의 눈이 살짝 풀어졌다. 이윽고 그의 귓가에 죽을 만큼 달짝지근한 음성이 실렸다.

“제 손에 쥐여 주십시오, 별자리 열쇠.”

* * *

엘마뉴엘에 도착한 제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끔찍하게도 구토였다.

그것도 네 번의 구토.

엘마뉴엘은 이동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섬이 아니었다. 그 섬에 서식하는 드래곤을 통해서만 오갈 수 있었다.

그런 연유로 세실의 친부인 펠드툰이 드래곤을 보내줬건만, 그게 제인에게는 구토의 화근이 되었다.

드래곤을 타고 높이 날아오르는 찰나.

제인은 한동안 잊고 있던 공포가 되살아났다.

절벽 끝에 매달려서 보았던 낭떠러지와 검은 안개. 저를 끌어 올려주던 다이애나의 손. 달아나라고 소리치던 목소리. 뒷걸음질 치던 발걸음과 몸을 돌리고 달음박질하던 순간들.

악몽 바깥에서 마주하는, 오래된 숨 막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잔상들은 결국 제인을 막다른 골목길에 몰아넣고 속삭였다.

네가 죽어야지만 끝이 나.

네가 죽어야지만…….

속이 요동쳤고 토기가 밀려 올라왔다.

엘마뉴엘에 도착한 제인은 연달아서 네 번의 구토를 하다가 쓰러져버렸다.

세실은 탈진한 채로 잠들어 버린 제인의 몸을 곧바로 회복시켜 주었으나 무슨 이유인지 한밤중이 되어서까지도 도통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세실이 피곤한 듯 이마를 짚었다.

“환장하겠네.”

똑똑.

그때 펠드툰이 방문을 두드렸다.

“내가 좀 들어가 봐도 될까.”

* * *

바닥에 눕혀진 타타가 눈앞의 그레데엘므를 보며 생각했다.

이대로 뒈지는 건가…….

그레데엘므는 흐트러짐 없이 무감한 얼굴로 타타의 목을 움켜잡고 조르고 있었다. 조여드는 숨통에 희미하게나마 꺽꺽대던 타타의 눈이 까뒤집혀지려 할 때였다.

“한눈을 파시네.”

나른한 목소리에 그레데엘므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가다가 빠졌다.

마귀보다 더 마귀 같은 그레데엘므의 손아귀에서 기적처럼 풀려난 타타는 숨을 히익히익 들이마시며 기침 세례를 했다.

이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고 쩍 굳어버렸다.

그레데엘므의 어깨를 잡은 자가 누구인지 알아본 것이었다.

……라트올, 이거 어쩌냐.

네가 그렇게 마주치지 않길 빌었거늘, 나 때문에 딱 마주쳐 버린 걸 어쩌냐.

망연자실한 어느 메 데시안의 속을 알 리 없는 루가 그레데엘므를 마주한 채 나른하게 말했다.

“당신은 나만 바라봐야지. 순정파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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