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루는 조금 즐거운 고민이 들었다.
그런 귀여운 다짐을 하는 제인이 기특하다고 해야 할까, 가엽다고 해야 할까. 그걸 지켜보는 저는 웃어야 할까, 화가 나야 할까.
의심 없는 마음으로 사랑해야 벗어날 수 있는 묘약의 저주였다.
그런데 묘약을 풀고서 온전하게 사랑하겠다니. 마음대로 바뀔 순서가 아닌 것을.
그래서 그녀의 말이 재미있었다.
거짓말처럼 우습고 볼품없어서.
제인은 지금껏 루에게 어떤 다짐도 지켜내지 못했다.
단검으로 자기의 목을 그으면서까지 절망을 탐내지 말라 했으나 그에게 절망을 주기로 약속했고, 승냥이를 피해 이리의 품속으로 들어가는 멍청이가 아니라고 했으나 결국 그의 품에 안긴 인간이었다.
나약한 인간.
나약한 인간의 다짐이 어그러질 때마다 지켜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어떨까.
루는 그레데엘므가 훼방을 놓으면서 가던 길을 돌아가게 되었다.
그렇게 돌아가게 된 길이 불쾌하기 이를 데가 없었지만 그래도 가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순서야 어떻든지 간에, 품에 안긴 인간이 일말의 희망이라고는 없는 절망을 내게 보여주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이 이야기는 끝이 날 테니.
그런데도 명확한 이름을 붙이기 어려운 분노는 좀처럼 식지가 않았다. 누구도 눈치채기 어렵게 더 억눌려질 뿐.
그때 제인이 말을 이어갔다.
“엘마뉴엘에 다녀오면 도서관에서 관련 있는 책들은 모두 긁어서 찾아볼 거야. 물론…… 의심 없이 너를 사랑해서 묘약을 풀면 좋겠지만…….”
루가 느긋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좋겠지만?”
“그게 쉬우면 저주겠냐고. 최대한 다른 방법도 찾아보려는 거야.”
방법이 없을 텐데.
해답도, 정답도 없는 걸 찾느라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곁에 두고 보면 또 얼마나 우습고, 재미있고, 행복할까.
사랑스러운 인간.
루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나른하게 말했다.
“그런데, 내가 널 보내 준다고 했던가?”
그가 웃었다.
“엘마뉴엘에.”
그러자 나약하고 사랑스러운 인간도 같이 웃었다.
냉이꽃이 피어나듯 예쁘게.
“보내 줄 거잖아?”
“…….”
“넌 네게로 걸어오는 내 모습을 좋아하니까.”
그해 첫눈이 내린 날, 루는 새로운 즐거움을 알았다.
기꺼이 휘둘리는 것. 그 유희를.
* * *
세실은 미치고 팔짝 뛰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침부터 들이닥친 인간들이 시위라도 하듯 아무 말 없이 말똥말똥한 눈으로 세실을 빤히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꺼지라고 욕을 갈겨도 주거침입자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세실이 머리를 벅벅 긁다가 언성을 높였다.
“프시오, 너는 그렇다 치고!”
프시오를 가리키던 세실의 손가락이 제인에게로 향했다.
“너까지 왜 이래?”
“아, 밀리타는 좋겠다.”
제인이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딴소리를 했다.
“스승님이랑 엘마뉴엘에 가서.”
“…….”
“너-무 부럽다.”
“…….”
옆에 앉아있던 프시오가 담담한 얼굴로 제인에게 엄지를 치켜들어 주었다.
제인은 프시오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말똥말똥한 눈으로 세실을 응시했다.
“…….”
“…….”
“…….”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이어졌다.
세실은 정말이지, 두 사람이 너무 싫었다.
그녀는 얼마간 육두문자를 괄괄하게 내뱉다가 여행용 가방을 꺼내왔다. 그리고 한스럽게 중얼거렸다.
“내 안식년! 내 팔자! 진짜 개 같은 것들……!”
* * *
“따라가게 만이라도 해주세요! 제발요!”
라트올은 루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중이었다. 명계 납품을 자신이 하러 가겠다고. 아니면 따라만 가게 해달라고.
처음부터 이렇게 애걸복걸한 건 아니었다.
나름대로 아무 일도 없는 척, 무심하게 자신이 명계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루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라트올은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루가 그의 불안과 초조를 눈치챈 것이 화근이었다. 라트올은 루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명계에 가시면 그자와 마주칠지도 모른다고요!
그 말에도 루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도리어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로, 그래? 하고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웃음도 잠시.
지금 루는 몹시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라트올이 제 바짓가랑이를 계속 놓지 않고 질질 끌었기 때문이었다.
“라트올.”
“제발요.”
그렇게 절절 매달리던 라트올은 루의 담백한 목소리에 심장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너는 내가 사라지면.”
“…….”
“네가 다시 명계로 돌아가게 될까 봐 이렇게 말을 안 듣는 건가?”
“…….”
“이전에 고용주 자리를 넘겨줄 만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주 농담처럼 들렸나, 그 말이?”
루의 바짓가랑이는 여전히 붙잡혀 있었고, 그 아래에서 시선을 떨군 라트올은 여전히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당장 사라진다고 해도 넌 명계로 돌아가지 않아도 돼.”
라트올은 그게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이어서 뜻 모를 말을 작게 중얼거렸다.
“……지금은 겨울이잖아요.”
그 말의 속뜻을 이해한 루의 목소리가 전보다 더 누그러졌다.
“그래.”
“봄이 아니라고요…….”
“그렇지.”
라트올은 루의 바짓가랑이를 더 세게 잡았다.
“그러니까, 못 보내요.”
지금 가면 루가 죽을 수도 있다.
라트올은 봄이 아닌 계절에 자신의 주인님을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자가 또 폭주했다잖아요……!”
그레데엘므가 한 번씩 폭주한다는 건 명계에 자자한 일이었기에 루도, 라트올도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까지 루는 명계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거니와, 그레데엘므 역시 루를 찾아온 적이 극히 드물었기에 그가 폭주할 때 마주칠 일은 전무 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그레데엘므는 폭주했고 루는 명계로 가려 한다. 마주칠 뿐만 아니라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라트올의 굵은 눈물방울이 바닥으로 하염없이 떨어졌다. 루는 한 손에 얼굴을 묻고 전보다 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왜 너를 타이르고 앉아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라트올.”
라트올이 울음소리를 줄이고 고개를 들었다. 눈으로 간절하게 말했다.
간다고 하지 마세요. 나를 보내요. 내가 가게 해주세요.
주인님, 제발요.
그러나 루의 입에서 나온 건 라트올의 바람과는 판이한 말이었다.
“명계에 가면 개처럼 꼬리나 살랑거리고 올 생각이니 울지 마.”
“……꼬리나 살랑…….”
루의 성정에 도대체 누구에게 꼬리를, 그것도 살랑살랑 흔들고 온단 말인가. 라트올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전보다 더 많은 눈물을 뚝뚝뚝 흘렸다.
그런 라트올의 추태에 루는 골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꼬리나 살랑거리고 온다고 했거늘 왜 더 우는 건지.
루는 마모되어가는 인내심을 가지고 라트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네 말대로 지금은 겨울이야.”
“…….”
“그자가 나를 어쩌려고 했으면 진즉 했겠지.”
라트올은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루는 가기로 한 것이다.
미쳐버린 르젤이 있는 명계로.
“……약속하세요.”
“무엇을.”
“당신이 사라질지도 모르는 건, 봄이에요. 다른 계절은…… 안 돼요.”
“그래.”
루의 단조로운 대답에 라트올은 손에 쥔 바짓가랑이를 겨우 놓아주었다.
루는 얕은 한숨을 쉬며 이동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뒤돌아서 라트올에게 말했다.
“연옥에 납품 잘하고 오도록.”
복숭아색 머리카락을 가진 메 데시안의 얼굴이 다시 새파랗게 질렸다.
* * *
명계의 혼돈, 마왕.
그 화려한 수식의 주인공인 하이데스는 조각상처럼 수려하게 빚어진 외모와 굵직한 근육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데시안이었다.
그가 온유한 목소리로 루에게 물었다.
“웬일이지, 그대가?”
“녹니스 납품일이라 온 김에 잠시 들렸습니다.”
뒷짐을 진 루는 웃는 얼굴로 하이데스를 직시하면서 보초병들을 향해 살짝 고갯짓했다.
그에 하이데스가 즉시 보초병들을 모두 물렸다.
그는 중앙홀에 서 있는 루를 보며 웃었다.
“……들렸다? 그대가, 나에게?”
루는 느릿하게 발을 뗐다.
이내 계단 위 화려한 옥좌에 앉아있는 하이데스에게 다가갔다. 곧이어 옥좌의 팔걸이 끝에 양손을 얹고서 황홀한 미소를 입에 물었다.
“꼬리나 살랑거려 볼까 싶어서 말입니다. 개처럼.”
하이데스는 탄복했다.
“개라니, 그대.”
어떤 개의 눈이 이토록 교만하고 색욕이 넘칠까.
“아가리 벌리고 꺼떡거리는 뱀 새끼로 보인단다.”
옥좌에 기대어 앉은 하이데스가 푸른 빛의 동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으로 보는 사이, 루가 속삭이듯 물었다.
“그럼 적당히 감겨 주실 겁니까.”
“적당히 감아야 적당히…… 감…….”
루는 흐려져 가는 하이데스의 홍채를 물끄러미 응시하면서 그의 상의를 느리게 풀어 내렸다. 그러다 돌연 정신을 차린 하이데스가 헤쳐진 옷깃을 부여 부여잡았다.
“홀리지 말렴.”
루는 뒷짐을 지고 나른하게 말했다.
“감겨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뱀 새끼라는 말이 감겨 준다는 말로 들렸니?”
“비슷합니다.”
하이데스의 눈에 황당함이 어렸다.
루가 봉인이 풀린 후 명계에 온 횟수는 딱 한 번이었다.
그날, 그가 물었다.
-어떠십니까? 옥좌에서 기만하는 재미.
-익숙해지니 시시하단다.
-그럼 다른 재미 좀 보게 해드리죠.
그렇게 녹니스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한 루는 잡부로 쓸 데코토와 조수로 쓸만한 메 데시안 하나를 골라가겠다고 말했다.
루는 명계에서 독보적인 힘을 자랑하는 데시안이었다. 원래라면 더 많은 수족을 거닐어야 마땅했기에 하이데스는 무리 없이 수락해주었다.
게다가 누구를 데려가든 소란스럽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현혹의 데시안인 그는 게으르고 음탕한 편이었으나 사나운 성정은 아니었기에.
그러나 하이데스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수족을 데려가는 과정이 생각보다 난폭했다.
제 말을 거스를 자가 없었는데도 그는 주변에 있던 자들을 눈에 띄는 대로 모조리 죽였다. 사멸의 냄새가 뻑뻑하게 들어찼고,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얼굴을 비춘 적이 없었다.
머리카락 한 올도.
그런데 별안간 납품을 핑계 삼아 찾아와서는 뱀처럼 감기려 들다니, 실로 기가 찰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황홀하게 아름다운 독뱀에게는 한 번 잘못 감기면 지독하리만치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 감기기 전에 원하는 걸 손에 쥐여주는 게 가장 합리적인 일이었다.
“그럼, 말로 하렴. 담백하게 감겨 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