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74)화 (74/168)

74.

루는 지금껏 그녀가 웃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비아냥거리던 웃음, 깔깔거리던 조롱, 무시하는 듯한 미소, 어이없어하던 조소, 가끔가다 어린아이처럼 웃던 표정까지.

그러나 꽃처럼 활짝 피어나듯 웃는 얼굴은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

제인에게서 처음 보는 종류의 웃음이었다.

아주 오래전 단 한 번.

루는 비슷한 웃음을 본 적이 있었다. 그건 제인이 아니었다. 그 웃음이 향하던 이도 루가 아니었다.

루는 꽃처럼 활짝 웃는 그녀와 함께 마주 서서 웃는 그를 지켜보다가…….

너울거리는 꽃향 때문일까.

그는 머리가 어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속이 뒤틀리듯 메슥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사이 멀리 걸어간 제인이 뒤를 돌아서 흰 손을 뻗으며 불렀다.

“루! 이리 와, 산책하자.”

제인은 여전히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여긴 너무 아름답고 나는 행복하거든. 너랑 함께라서.”

루도 작게 웃었다.

그동안 길들여진 건, 어쩌면.

끝도 없이 펼쳐진 꽃밭에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형형색색 꽃잎들이 붉게 피어나는 시간 속에서 제인은 루의 손을 잡고 하염없이 걸었다.

어느덧 붉은 석양이 저물었고, 초저녁 하늘에 별들이 야트막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해가 지도록 걷고, 손을 잡고, 함께했다.

루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다.

어렴풋이, 아주 조금.

* * *

루와 제인이 봄의 한복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무렵 꽃밭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 펼쳐져 있었다.

첫눈.

금년의 첫눈이 안뜰과 뒤뜰에 가득히 쌓여 있었다. 정원은 물론, 드높은 마른 가지마다 소복하게 쌓인 눈이 얼얼하리만큼 차가운 걸 알면서도 따뜻해 보였다.

제인이 말했다.

“사랑에 빠지면 눈도 따뜻해 보이나 봐.”

“그렇게 보이는 건 데코토들이 집 안에 피워놓은 장작 덕분이겠지.”

루가 느긋하게 대답했다. 오늘의 메뉴인 버섯전골에 들어갈 각종 버섯을 썰면서.

그에 제인도 부엌 창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조용히 해줄래. 상당히 일리가 있어서 짜증 나거든.”

핍이 창문으로 날아온 건 그때였다.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창문을 반 틈 열어주자 핍의 꽁지깃 끝으로 매서운 찬바람이 거침없이 밀려들어 왔다. 제인은 훅 끼쳐오는 한기에 바로 닭살이 돋았다.

쌓인 눈이 따뜻해 보이는 건 사랑에 빠져서가 아니라 데코토들이 피워놓은 장작 때문이라는 게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한기에 몸을 떤 제인은 핍이 물고 있는 편지를 받아들었다.

프시오가 보낸 편지였다.

[제인에게.

당신은 내일부터 사나흘 간 드래곤의 나라인 엘마뉴엘에서 수련하게 되었습니다.

밀리타와 카이, 솜브, 당신과 저까지 총 다섯 명이 동행할 예정이며 세실은 고민 중이니 되도록 생떼를 부려서 같이 데려가 보도록 합시다.

지낼 곳은 마련되어 있으므로 개인 소지품 외에는 특별히 챙길 것은 없습니다. 내일 오전, 세실의 집에 오면 됩니다.

추신. 댁의 데시안에게는 마주치면 기분이 안 좋으니 그림자도 비추지 말라고 일러주세요.

프시오가.]

“비는 꼴이군.”

제인의 뒤에서 편지를 읽던 루가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말했다.

“제발 와달라고.”

그는 내일 명계에 녹니스를 직접 납품하러 가야 했기에 엘마뉴엘에 갈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편지 내용을 보자 얼굴이라도 잠시 비춰주고 오는 게 도리가 아닐까 싶었다.

“전혀 그렇게 안 읽히는데, 어떤 단락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거야?”

“전체적으로.”

순간, 몸을 휙 돌린 제인이 그의 말을 싹 무시하며 어린아이 같이 웃었다.

“드래곤의 나라래! 엘마뉴엘, 처음 들어 봐!”

“기대되나.”

응! 이라고 대답하려던 제인은 돌연 가까이 다가오는 루의 태도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제인이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를 벽으로 몰아세운 루가 고개를 비스듬히 하고 물었다.

“기대된다, 라.”

이번에도 제인이 입을 벙긋거리기 전이었다.

루는 제인의 등이 벽으로 더 붙도록 제 몸을 밀착시켰다.

그의 입은 분명 웃고 있었으나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드래곤의 나라에 간다는 생각에 해맑게 좋아했던 게 전부인 그녀는 도대체 뭐가 그의 심기를 건드린 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어쩌지.”

어느새 루의 한 손이 제인의 허리를 감싸 쥐었고, 입술은 그녀의 귓가에 닿을 듯한 거리까지 와있었다.

제인은 뒤늦게 심장이 쿵쾅거리고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나는 널 보낼 생각이 없는데.”

“…….”

서늘한 숨이 제인의 귀에 내려앉았다. 무척이나 고압적인 목소리를 타고서.

“아무 데도.”

제인이 방금 지어 보였던 웃음은 꽃처럼 피어나는 듯한 웃음이 아니었다. 그저 기대되고 설레고, 그런 아이 같은 웃음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루는 그 웃음이 향하는 곳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인이 그가 없는 곳에서 그런 웃음을 지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속에서 무언가가 긁어댔다.

그사이 벽으로 몰아세워진 제인은 온몸이 심장인 것처럼 심박수가 올라갔다. 루에게 닿는 피부마다 느껴질 만큼.

그때 쇄골이 깊이 파일 정도로 그녀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그레데엘므한테 말이야.”

제인의 허리에 올린 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느릿하게 귓가에서 멀어졌다.

이 순간 그레데엘므의 이름이 제인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말없이 제인을 응시했다.

제인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루가 믿을 수 없는 말을 한 번 더 했다.

“나에게 저주를 걸어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

“……뭐?”

루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조용히 화를 내었고, 삼켰고, 눌렀다.

제인은 그런 그의 모습까지도 관능적으로 느껴져서 더 두근거렸다.

역시, 미친 게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최대한 담백하게 말했다.

“네가 나한테 이러는 게 한두 번이야?”

“……그래서.”

“나한테서 싫다는 말, 들은 적 있어? 한 번이라도.”

“…….”

“없을걸. 왜냐하면…….”

제인이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싫지 않았으니까.”

루의 몸에 들어가 있던 힘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제인에게 가까이 굽혔던 허리를 세우려 하자 그녀는 멀어지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따뜻하고 거친 제인의 손가락이 그의 턱 아래 부근에 닿았다.

“도망칠 곳 없이 몰아세우고, 다가오고, 몸이 닿고. 그런 것들이 싫지 않았어.”

그는 더 이상 멀어지지 않았다. 그대로 서서 눈을 마주쳤다. 다만 잿빛 눈동자에 자신이 들어차 있음을 확인하려는 듯 지그시 보았다.

“싫었던 건 싫지 않다는 사실. 그거 하나.”

제인의 말에 루가 무의식적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던 사실이었으나, 그것을 그녀의 입을 통해서 듣는 건 생각지 못한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붉은 정원의 수레바퀴.”

그때 턱 끝에 걸려있던 제인의 손가락이 그의 입술에 닿았다.

“그 저주라 불리는 묘약이라도 없었으면 지금 감정을 알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을 것 같거든. 지금도 널 밀어냈을 거고.”

제인이 발끝을 세웠다.

“그래서 고맙단 말이지.”

짤막한 입맞춤을 끝으로 그녀의 뒤꿈치가 닿기도 전이었다.

루가 더 허리를 숙였다. 더 끌어안았고, 더 밀착하기를 원했다.

제인은 벌어진 입술 틈으로 그의 호흡을 온전히 함께했다.

이 순간이 행복이자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편으로는 이 데시안은 사랑이 무엇인지, 즐거움과 행복이 어떻게 다른지 여전히 모르리란 것도 알았다.

그건 무척 애석한 일이었다.

그것만큼이나 신발에 들어간 돌멩이 또한 결국 언젠가는 털어내야 할 애석한 일이었다.

뜨겁고 차가운 게 한데 얽혀 들어가던 잠깐의 틈.

제인은 몸을 떨어트리고 말했다.

“묘약은 반드시 풀 거야. 그래서 온전한 내 마음으로 널 사랑해 볼 생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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