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73)화 (73/168)

73.

루가 다시 일어난 건 평소보다 한두 시간 이른 시각이었다.

제인은 언제 잠들었는지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루는 제인과 같이 묶인 손목을 느슨하게 바라봤다.

“나도 취향은 아니지만.”

얼마 전, 부엌에서 명계에서나 볼 법한 이상한 것을 만들어 준 다음부터 제인은 잠든 루에게 아침마다 사랑한다는 달콤한 말을 속삭이고 귀여운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성실하게 세실에게 갔다.

하루도 빠짐없이.

제인의 세상에는 지각이나 결석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세실에게 다녀와서도 쉴 줄을 몰랐다. 깨끗하게 씻자마자 그날 배운 걸 복습하거나 연습하기 바빴다.

루의 눈에는 라트올도, 제인도 그렇고 전생에 게을러터져서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것들 같았다. 나태하고, 권태로운 것을 찬미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될 정도였다.

그런 나날들을 지나서 맞이한 간만의 휴일이었다.

뭘 하면 좋을까. 겨울 바다는 추워했으니, 봄인 곳으로 데려갈까.

제인은 인간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금화를 주었을 때도, 라트올이 공을 들여 만든 목걸이를 선물해 주었을 때도 놀란 표정을 지을 뿐 기뻐하지 않았다.

그래도 꽃밭은 좋아하려나.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 채 묶이지 않은 손으로 제인의 잔머리를 정리해 줄 때였다.

“그럼 좀 풀어봐.”

언제 깼는지 제인이 그의 손을 잡고 눈을 떴다.

“취향 아니라며.”

그는 사랑스럽다는 듯이 제인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운 이유부터.”

제인은 루와 함께 지내면서 그에 대해 전보다 더 자세히 알아가고 있었다.

그는 아름다움과 권태로움을 제외하고는 무엇에도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늘 미소를 짓고 있으나 푸른 눈동자는 채워지지 않았다. 꼭, 무엇도 그의 공허를 채울 수 없을 것처럼.

그런 그가 집요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이를테면 재차 묻는 것들이 그러했다. 되묻는 질문만큼은 대답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니 그가 다시 물은 운 이유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종일 손목이 묶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인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루가 저를 종일, 혹은 영원히 묶어놓는다고 해도 싫지 않을 것 같아서.

그 사실이 끔찍하게 싫었다.

묘약의 저주 때문이라고 해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평생 열심히 살아온 그녀는 사랑이란 감정에 빠져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얼간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거짓말해 볼래? 어제처럼.”

루도 느긋하게 일어나 앉아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색기가 흐르는 동공 속에 제인이 존재했다.

이윽고 그는 거리를 좁히고 고개를 비스듬하게 틀었다. 푸른 동공이 얇게 웃는 눈매에 반이 가려졌다. 보는 이로 하여금 무력감을 느낄 만큼 홀리게 만드는 형상이었다.

“사랑해.”

그 순간, 사랑한다는 말이 또다시 손아귀가 되어 제인의 심장을 움켜잡았다.

욱신거리게 아프면서도 다듬어지지 않은 기쁨과 행복이 몸 곳곳에 퍼져나갔다. 그러면서 심장 아래에서부터 서글프고 애달픈 느낌이 뭉개져서 차올랐다.

“아침에 잠든 널 보는데, 그 말이 생각났어.”

“……그렇군.”

루는 재차 떨어지는 제인의 눈물을 느긋하게 핥았다.

“우는 네 얼굴이 보고 싶을 땐 사랑한다고 거짓말하면 되는 거군.”

“……네가 미친 건지, 아니면 내가 미친 건지 이젠 모르겠어.”

“둘 다라면 좋겠는데.”

“끔찍하게도 제일 가능성이 커 보이네. 혼자 미친 게 아니라 덜 억울한 것 같기도 하고.”

우는 이유가 본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루는 그녀의 슬픔을 기꺼워하며 바라보았다.

제인은 그에게 눈짓으로 손목을 가리켰다.

“뭐해? 안 풀고.”

루의 시선이 잿빛 눈동자와 붉은 눈가를 지나 손수건으로 떨어졌다. 곧이어 매듭이 간단하게 풀렸다. 제인의 손목에는 어떤 자국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침부터 두 번이나 눈물을 쏟아낸 제인은 뱃속에 허기가 몰려들었다.

“배고파. 부엌에 가서 뭐라도 먹을래.”

“식사하고 나서…… 꽃, 좋아하나?”

그는 제인의 긴 머리카락을 기분 좋게 쓸었다. 그리고 높이 올려서 손에 쥔 손수건으로 묶어주었다. 이어서 희고 가는 그녀의 목덜미에 짧게 입을 맞추며 웃었다.

“나랑 같이 봄으로 갈까.”

* * *

제인은 약제사 수습생 시절부터 온갖 숲은 물론이고 산턱을 신발이 해지도록 드나들었었다. 풀밭이나 꽃밭은 그녀에게 너무나 친숙한 광경이었다.

시간대에 따라서 다르게 맡아지는 싱그러운 냄새, 바람이 불 때면 나부끼는 나뭇잎, 풀잎, 꽃송이들의 산뜻한 노랫소리, 더 깊이 들어가면 풀벌레들이 뒤엉켜 날아다니거나 기어 다니는 것까지 모두 익숙해서 감동이랄게 없었다.

그러나 겨울의 문턱에서 봄의 꽃밭 한가운데로 온 이 순간, 제인은 눈에 보이는 풍경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골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완연한 봄이었다.

봄에 닿은 햇빛이 오월의 시간을 말해주었고, 꽃향기를 실은 바람은 시원하면서도 따스한 햇볕이 뒤섞인 채 불어왔다.

제멋대로 핀 야생화들은 색깔이 모두 달랐다. 그로 인해 한 떨기마다 보는 꽃송이와 한 폭의 그림처럼 넓게 펼쳐진 풍경은 완전히 다른 토대 같았다.

제인은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몰랐다.

그저 네 살배기 어린아이도 알아들을 수 있는 한 마디 외에는.

“행복해.”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을 덧대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행복할 수 있지?”

달걀이 듬뿍 스며들어서 말도 안 되게 부드럽고 맛있는 버터 토스트와 시원한 우유를 잔뜩 먹고 와서 그런 걸까.

아니면 오늘 하루 오랜만에 완벽하게 쉰다는 해방감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이곳에 너와 함께 와서일까.

“너도 행복해?”

루는 대답이 없었다.

제인은 한 번 더 그에게 말했다.

“너도 행복하면 좋겠어.”

데시안인 루는 행복이라는 게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인간에게서 흘러넘치는 죄악이 뭉쳐져 태어난 존재였으므로.

그가 물었다.

“그건 즐거움과 다른 건가?”

“다르지 않나.”

“어떻게 다르지?”

제인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인간은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 존재였지만 그녀의 인생에서 그런 시간은 전무에 가까웠다. 살아오는 동안 세상 그 어떤 즐거움도, 행복도 그녀에게 주어진 몫은 없었다.

“나도 잘은 모르겠어. 그래도 비유해보자면…….”

그녀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희미했다.

“꽃 한 송이를 거머쥐는 건 즐거움이고, 드넓은 꽃밭을 바라보는 건 행복…… 아닐까.”

평소와 달리 제인의 어깨선이 아래로 떨어진 모습을 보던 루가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렇다면 널 내 곁에 두는 건 즐거움이고, 너와 함께 이곳에 있는 건.”

뺨에 맞닿아 있던 희고 찬 손이 그녀의 귀를 지나서 높이 올려 묶은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어쩌면 행복일지도.”

제인의 은빛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불어오는 봄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과 그의 손에 쥔 손수건을 부드럽게 훑었다. 그와 동시에 잿빛 눈동자는 밝고 찬란한 것 중 가장 어둡고 아름다운 것을 담아내었다.

지금까지 묘약은 끊임없이 제인의 마음을 의심하게 했다.

의심은 신발 안에 들어간 작은 돌멩이 같았다.

의식하지 않아도 한 걸음 내딛는 게 불편하기 짝이 없게 했고, 의식하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감각은 더 예민해져 갔다.

그럼에도 그 신발을 신고 루에게 걸어갔었다. 다가가서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고, 입을 맞추고, 그와 함께하길 바랐다.

이제 그녀는 어디까지가 진실한 사랑이고 어디부터가 묘약의 장난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무엇이 사랑인지 알았다.

자신의 발걸음이 멈추는 곳에 사랑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끝에 서 있는 존재를 알았다.

아득하게 공허하기만 한 데시안이 저를 곁에 두는 것을 즐거움이라 하고, 함께하는 것을 행복이라고 말하는 그 마음을 알았다.

“루.”

봄의 꽃밭에 머물렀던 루의 시선이 제인에게로 향했다.

제인이 말했다.

“너는 나를 사랑하고 있어.”

푸른 눈이 호수처럼 동그랗게 떠졌다가 금세 좁혀졌다.

“일찍이 일러주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인간의 시선과 기준으로 나를 봐서는 안 된다고.”

“그건 날개 달린 새로 태어나서 새처럼 날지 말라는 말과 같잖아. 타고난 대로 날갯짓하는 걸 어떻게 막아?”

“그렇다면 새의 날개가 꺾일 일만 남았군.”

제인은 루의 말에 조그맣게 웃더니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색상이 화려하고 눈에 띄는 꽃들 틈에서 소복하게 피어난 냉이꽃 한 송이를 꺾었다.

어느 봄, 다이애나가 들에 핀 꽃 더미 사이에서 냉이꽃 한 송이를 골라냈던 것처럼.

-제인, 꽃마다 의미가 있는 거 아니?

-의미?

-응. 냉이꽃의 의미는…….

또다시 바람이 불었다.

긴 대롱에 자잘하게 달린 작은 냉이꽃들이 산들바람에 저마다 인사하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언젠가 네가 그랬었지. 날개가 되어 주겠다고. 과연 어디까지 날아갈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그게 너일 줄은 몰랐네.”

향기를 머금은 바람이 계속해서 불어왔다. 꽃송이의 고갯짓이 멈추지 않았다. 제인은 그게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순간, 루는 제인을 시선을 가져오고 싶었다.

그녀의 턱을 들어서 자신을 보게 했다. 느린 몸짓으로 다가가 입을 맞췄다. 가벼운 입맞춤 끝에는 제인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대롱 끝에 달린 냉이꽃처럼.

“넌 아득한 밤하늘의 달빛 같아.”

밤하늘 별자리처럼 애써 찾지 않아도 눈에 박히도록 빛이 나는 달.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하지만 닿을 수 없는 막연한 아름다움.

이내 루의 손목에 냉이꽃을 둘러서 팔찌처럼 묶어주었다. 그에게도, 그의 손목에도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루는 냉이꽃 팔찌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우습고 유치한 것.

볼품없는 것.

거짓말 같은 것으로 생각하며.

제인이 말했다.

“나는 계속 너에게 갈 거야. 걸어서, 날아서, 어떻게든 너에게 닿으려고 할 거야.”

제인은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냉이꽃보다 더 활짝 웃었다.

“꺾이는 건 내가 아니라, 너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