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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72)화 (72/168)

72.

세실의 눈에 앙디스인들은 정상이 아니었다. 내면 깊숙하게 자리 잡은 열등감과 피해의식이 어디까지 뿌리 박혀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이 저항해야 할 대상은 페브리아였다.

호엘리반이 아니라.

그런데도 그들의 벌레 같은 집착은 호엘리반을 갉아 먹어댔다.

태생적으로 마나를 가질 수 없는 앙디스인들이 그토록 바라고 염원하는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누군가 그의 곁에 있어 줘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그는 프시오 외에는 누구도 원치 않았다.

“나벨에게 들어보니 집무실에 또 테러가 났었다던데. 전쟁이 아니더라도 지속적인 테러를 제지할 방법은 있어야 해.”

전쟁 외의 방법이란 두 가지였다.

앙디스의 땅을 되찾아 주거나, 혹은 되찾으려는 노력이라도 보이거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끊임없이 호엘리반을 따라다닐 족속들이었다.

그때 프시오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금지된 드래곤의 마석을 이용할 거야.”

“!”

예상 밖의 말이었다.

드래곤 마석은 대부분 흑마법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죽음과 어둠, 그리고 저주나 변형과 관련된 마법이었다.

그만큼 음지에서 주로 사용되었으며 마법의 중심부라고 불리는 드호아망에서도 극히 꺼리는 요소였다.

더군다나 앙디스는 금지된 마석을 채취하려다 화신을 깨워 드래곤의 습격을 받은 나라였다. 페브리아가 앙디스를 점령한 것도 그런 맥락과 일맥상통했다.

그런데 드래곤의 마석이라니.

세실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프시오가 말을 이어갔다.

“건드리면 안 되는 걸 건드렸다는 이유로 땅을 빼앗겼다면, 건드려도 되는 걸로 만들면 돼.”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프시오라면…….

세실이 깊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쉽지는 않을 거다.”

“그렇겠지. 그래서 지금까지 조사한 자료를 가지고 엘마뉴엘에 다녀올 생각이야.”

엘마뉴엘.

그 지명을 듣고 세실은 입을 다물었다.

“밀리타라고, 내가 얘기했었지? 같이 데려가려고. 그 아이 마법은 드래곤의 마석이 근간이니까. 제인도 가면 조금이나마 배울 게 있을 것 같은데, 어때?”

세실이 말없이 술을 마셨다.

엘마뉴엘은 드래곤 서식 및 훈련이 합법적으로 승인된 섬나라이자 아버지가 계신 곳이었다.

아버지는 드호아망에서 유일한 정신계 치유 마법사셨으니 제인을 보낸다면 도움 될 것이다. 하지만 본인이 엘마뉴엘에 가는 데 대해서는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그녀의 태도를 예상한 듯 프시오는 자연스럽게 이어서 말했다.

“아저씨께 편지 드리니까 흔쾌히 같이 오라고 하시더라. 솜브 상태도 봐줘야 할 때가 됐다고 하시면서. 제인만 데려가도 되지만 너도 같이 갔으면 해.”

“…….”

“참. 호엘리반은 도무지 자리를 비우기가 어려운가 봐.”

세실은 또다시 포도주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세실.”

“생각해볼게.”

프시오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빈 잔에 포도주를 따라주며 화제를 돌렸다.

“제인은 요즘 어때? 괜찮아?”

고저 없이 대화를 이어가던 세실은 피식 웃었다.

“수련은 잘 따라오고, 정신은 오락가락하고.”

프시오는 세실이 말한 오락가락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았다.

그녀는 로안나는 물론이고 제인까지 저주에 걸리자 손 쓸 도리가 없는 묘약에 더욱 답답함을 느꼈다. 게다가 마법사도 아니고 타락한 르젤의 소행이라니.

세실에게 마법 양피지로 그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프시오는 얼마간 지끈거리는 두통에 시달렸었다.

그때 세실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그 녀석,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건 해보려고 해서 일단 지켜보고 있어.”

“그래?”

“도서관 출입증도 사랑의 묘약이나 타락 천사에 관해서 찾아보고 싶어 하길래 호엘리반에게 부탁했던 거야.”

“……제인은 어쩌면.”

프시오가 조그맣게 웃었다.

“자신을 약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누구보다 강한 거 아닐까.”

“……약해. 약한 주제에 지독한 거지.”

세실의 말에 조용히 그녀를 보던 프시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그렇게 걱정되는 거니?”

“걱정은.”

“걱정돼서 못 살겠다는 얼굴인데?”

“……보고 있으면 열이 뻗쳐.”

“지금은 왜 열받은 거야? 눈에 보이지도 않잖아.”

세실은 농담이 덧붙여진 프시오의 말을 무시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무리 마나가 강하다고 해도…… 적어도 인간이라면.”

그러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한쪽 팔로 두 눈을 가렸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선천적으로 버틸 수 있는 고통의 한계점이 있다고. 그런데 그 녀석은…… 그 한계점이 말도 안 되게 높아.”

“…….”

“철저하게 고통에 익숙해진 몸이야.”

이윽고 찌푸린 얼굴로 파탐을 꺼내어 물었다.

“더 열받는 게 뭔 줄 알아? 그게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고통의 한계점이라는 거야. 질병 같은 게 아니라. 그게 말이 되냐고, 빌어먹을.”

세실은 천장을 바라보며 숨을 뱉었다.

그녀의 손가락에 걸쳐진 파탐이 느리게 타고 있었다.

“세실, 보통 사람이었으면 미쳐버렸을지도 모를 사랑의 묘약에 제인이 지금처럼 견디는 거 말이야.”

프시오가 재떨이를 밀어주었다.

“아팠던 시간이 있어서가 아닐까. 어떤 인생이든 필요 없는 시간 같은 건 없으니까.”

“……그 말.”

천천히 몸을 앞당겨 앉은 세실이 재떨이에 파탐을 툭 털며 말을 덧붙였다.

“네 얘기니?”

프시오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녀의 당겨진 입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실이 시선을 돌리며 한숨 섞인 말을 뱉었다.

“난 너희가 너무 싫어.”

“애정 표현이 참 한결같아서 좋아. 할머니 돼서도 꼭 그렇게 말해주라.”

“지랄, 염병.”

아주 작은 소리로 킥킥 웃던 프시오가 세실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침묵이 자연스러운 공기처럼 유순하게 둘 사이를 메워갔다. 그렇게 말없이 술잔만 오갈 때였다.

“프시오.”

“응.”

“내가 정신계 치유 마법사가 될 녀석을 제자로 뒀다고 하면 아버지가 뭐라고 하실까.”

프시오는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짓다가 부드러운 눈길로 세실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그리고 제법 진지하게 말했다.

“꼴사납게 낄낄대지 않으실까?”

* * *

다음 날 아침.

제인은 평소와 같은 시간에 눈을 떴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몸에서 힘을 풀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수련을 쉬는 날이 아니던가. 건방지게 함부로 일어나지 말자. 늦장이란 걸 부리자. 실컷.

그런 생각을 하며 눈앞에 잠든 루를 보았다.

제인은 감탄했다.

어떻게 속눈썹도 이렇게 가지런하고 아름다울까. 매일 눈을 뜰 때마다 감탄하는데도 지겹지 않았다. 지겨워져도 계속 지겨웠으면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보다 더 황홀한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감긴 눈 틈 사이에 숨겨진 그의 푸른 동공이었다.

제인은 그를 깨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푸른 동공에 자신이 비치는 순간을 만끽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을 확인하고는 곧장 그 마음을 접었다. 아마 잠든 지 두 시간도 되지 않았으리라.

그녀는 곤히 잠든 그에게 조용히 사랑을 속삭이다가 문득 입술을 닫았다.

-사랑해, 제인.

지난밤,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 한마디가 온몸에 붉은 피처럼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열감이 느껴질 정도로 욱신거렸다.

세상에 그 거짓말보다 달콤하면서 아픈 게 또 있을까.

“왜 울고 있지?”

“……?”

루가 잠에서 깬 것도, 자신이 울고 있던 것도 몰랐던 제인은 당혹스럽기만 했다.

코끝에 맺힌 눈물방울을 훔치려 제인이 손을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을 잡은 루가 코끝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제 입술에 묻은 눈물을 혀로 슬쩍 핥았다.

다정하고 야릇한 시선이 피부에 닿자 홀린 듯 중얼거렸다.

“……넌 아침부터 야하네.”

루는 제인의 젖은 눈가에 가볍게 키스하며 웃었다.

“마음에 들었으면 싶은데.”

“들어.”

그녀의 대답에 루는 더 짙은 미소를 그렸다.

제인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햇살이 반짝이는 검은 머리카락을 몇 번 쓸다가 그의 목덜미를 껴안았다.

익숙한 박하 향이 맡아졌다.

“깨워서 미안. 더 자.”

루는 목덜미에 감긴 그녀의 팔을 풀고 얼굴을 마주 보았다.

“운 이유.”

얼마간 방 안의 시계 초침만 또렷하게 울렸다.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던 그녀가 방긋거리는 얼굴로 말했다.

“신경 쓰이나 본데, 그렇게 종일 날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제인의 말에 루 역시 방긋 웃었다.

이윽고 침대 옆 탁자의 서랍을 열었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서 그녀의 왼손과 자기 오른손을 같이 묶었다.

그의 여유로운 움직임은 막힘이 없었다.

멍한 표정을 짓는 사이 꼼짝없이 그와 묶여버린 제인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침대에 누워서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럼 종일 옆에 붙어 있는 게 낫겠군. 생각할 틈도 없이.”

“너…….”

제인은 겨우겨우 말을 이어갔다.

“너 이런 거 좋아해? 내 취향은 아닌데 네가 좋다면 장단 맞춰 줄 순 있어.”

이윽고 묶인 손목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렇지만 종일은 곤란해.”

“나는 네 곤란한 표정을 좋아하지.”

“…….”

“우는 표정도, 화가 난 표정도 모두 다 마음에 들어. 하지만 이유를 모를 땐 아니야.”

“…….”

제인은 다음 말이 가늠이 갔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예상한 말이 그대로 나왔다.

“그건 성에 안 차.”

그녀는 살면서 자기를 진심으로 멍청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요리를 제외하고는 뭐든 가르쳐주면 곧잘 습득하는 편인데다가 기억력도 좋았으며 뭐든 노력으로 성과를 이뤄내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지내면서부터는 어쩌면 제 머리가 돌대가리가 아닐까 하는 얕은 의구심이 들곤 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루가 이런 성정이라는 걸 매번 잊어버릴 수가 없지 않은가.

절절한 참담함을 느끼는 사이, 루가 그녀를 끌어안고 나른하게 말했다.

“잘자.”

“놔줄래? 난 다 잤거든.”

“좋은 꿈 꾸고.”

제인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상당히 피곤한 표정으로 양을 세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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