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71)화 (71/168)

71.

“그레데엘므 님도 오실 거야.”

타타의 말에 곧바로 라트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루의 정신 나간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지금보다 더 얕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만 해도 아래가 뻐근해.

라트올은 두 손 모아 ‘제발 두 분이 마주치는 일이 없기를……!’이라고 간곡하게 빌기 시작한 참이었기에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환장하겠네.”

“게다가 그레데엘므 님, 요즘 완전 저기압이거든. 두 분 마주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뭐 얼마나 저기압이길래? 평소에도 기복은 심하잖아.”

“말도 마.”

그는 한 번 더 주변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며칠 전에 마왕님 부름에 오셨다가 데시안을 순식간에 열일곱이나 죽였어. 그것도 계급 상관없이 눈에 걸리는 대로.”

이내 제 몸을 감싸며 부르르 떨었다.

“심지어 어떻게 죽였는지 알아? 신성력이나 마력을 써서 죽였으면 덜 소름 끼쳤을 거야.”

“어떻게 죽였는데.”

“하나하나, 죄다 목 졸라서.”

“…….”

“죽인 이유까지 들으면 너 진짜, 기겁할걸?”

“……뭔데.”

라트올은 타타가 어두운 낯빛으로 읊조린 말에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안 예쁘게 웃는다고.”

* * *

밤바다 한가운데.

제인은 페브리아에서 도망쳤을 때 탔던 배가 아직 난파되지도, 가라앉지도 않은 채 멀쩡하게 바다 위를 떠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와, 정말…….”

하지만 보다 경악스러운 건 따로 있었다.

“……정말 더럽게 춥잖아?”

루는 배 안에 있던 도포를 찾아와서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덮어 주었다.

도포 안으로 후끈한 열기가 나온 덕분에 얼어있던 몸이 금방 녹아내렸다.

배에 기대어 선 그가 사근하게 말했다.

“돌아가도 돼. 괜히 고집 피우지 말고.”

도포를 뒤집어쓴 제인이 고개를 작게 저으며 바다로 시선을 옮겼다.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따뜻해져서.”

그녀가 갑작스레 밤바다에 오게 된 건 몇 분 전의 일 때문이었다.

사실은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네게서 눈을 뗄 수 없었노라 고백한 제인은 오늘따라 유독 루와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그때 잡은 손을 놓지 않으려는 제인을 물끄러미 보던 루가 웃으며 말했다.

-작업하러 가야 하는데.

-…….

아무런 대답 없이 제 손만 만지작거리는 그녀를 사랑스럽게 보던 그는 부엌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데코토들을 힐끗거렸다.

-제인, 우리가 비켜줘야 데코토들이 부엌을 정리할 수 있어.

-우리가 아니라 나겠지. 걔네들은 나만 피하더라.

-인간과 마주치지 않는 게 규칙이니까. 사실 지옥에 떨어져야 할 영혼들의 일부였거든. 원래는 인간 세상에 못 나오는 걸 데려다 놨으니 규칙 정도는 지켜줘야지.

-어쩌다가 여기로 데리고 왔어?

루가 단조롭게 대답했다.

-청소나 하라고.

-…….

제인은 더 이상 묻기를 그만두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너와 떨어지고 싶지 않아, 라는 눈으로.

본능에 충실한 그녀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던 루가 바람을 쐬러 가자고 말했다.

제인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무척 좋아했다.

-어디로 데려다줄까.

그는 달콤한 목소리로 세상 어디든 데려다줄 수 있다고 했다.

당장이라도 꽃이 피는 봄의 한낮부터, 시원한 계곡물이 흐르는 여름 산장, 얼마 전까지 그들 곁에 머물렀던 가을이 있는 곳까지 어디든.

그의 말에 마음이 말랑해지는 것도 잠시.

제인의 미간이 급속도로 좁아졌다.

-네가 여는 이동의 문으로 어떤 계절도 갈 수 있다면 그날 어째서, 굳이 배를 타고 바다를…….

떠돌았어?

그 말이 차마 떨어지기도 전에 루의 입매가 더 짙게 패였다.

페브리아에서 도망치던 날.

루는 프시오가 있던 사막까지 이동의 문을 열지 않고 바다 위를 한참이나 뱅뱅 돌았었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조금이라도 단둘이 있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우연히 바다를 향한 그녀의 두려움을 읽어냈었다.

-보고 싶어서. 널 옭아매는 무언갈, 스스로 끊어내는 모습을.

그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제인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아주 잠시, 모든 게 정지된 듯한 찰나.

-그럼 다시 데려다줘 봐.

제인의 눈매가 조용히 접혔다.

-바다로.

그렇게 오게 된 밤바다는 무척 고요했고, 진주 가루처럼 흩뿌려진 은하수와 보름달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도포를 뒤집어쓰고서 배 난간에 걸터앉은 제인은 스산한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여전히 바다에 빠져 죽었던 다이애나가 떠올랐다. 마음은 전과 다름없이 먹먹했으나,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아무래도 넌.”

별빛이 물든 바다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제인이 말간 얼굴로 루를 응시했다.

“날 사랑하는 것 같아.”

루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듯, 제인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이어서 말했다.

“내가 하고 있어서 알아. 사랑하면 단둘이 있고 싶거든. 지금 나처럼.”

그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방해하지 않을게. 착각하길 원한다면 마음껏 해.”

제인은 방긋거리는 얼굴로 생각했다.

정말 재수 없다고.

“데시안들은 왜 거짓말을 안 해?”

“유치하고 볼품없다고 생각하거든. 거짓말을 안 해도 인간들을 진창으로 떨어트리는 방법은 많으니까. 그래서 거짓말은 메 데시안들이나 하는 거라고 하지.”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던 제인이 고개를 튼 채 루의 옷자락을 잡고 끌어당기며 간격을 좁혔다.

“나한테 거짓말 좀 해 봐.”

이윽고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사랑스럽게 웃으며 말을 덧대었다.

“사랑한다고.”

“…….”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가 입꼬리를 올리다가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이어서 그녀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거짓말이라도 괜찮다면.”

“해.”

그는 느릿하게 숨을 쉬었다.

이내 그의 숨결이 목덜미 쪽으로 내려갔다. 부드러운 그의 입술이, 혀가, 치아가 제인의 목과 쇄골에 천천히 닿고 떨어지길 반복했다. 그녀의 몸에 열기가 더해질 때쯤이었다.

“사랑해.”

다정하고 따뜻한 목소리가 어느 인간의 심장 하나를 지그시 거머쥐었다.

“사랑해, 제인.”

* * *

세실은 밤늦게 찾아온 프시오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이 시간엔 웬일.”

“호엘리반이 제인에게 줄 신분증이랑 도서관 출입증 가지고 왔길래. 웬 거냐고 물어보니까 네가 부탁했다더라고.”

“천천히 줘도 되는데. 내일은 제인한테 하루 쉬라고 했거든.”

프시오가 가지고 온 포도주병을 흔들었다.

“너랑 한잔하고 싶기도 해서, 겸사겸사.”

그 모습에 피식 웃던 세실은 부엌으로 가서 포도주잔을 챙겼다.

“언제까지 흥미도 없는 꽃차나 홀짝 대면서 엉큼하게 구나 했다.”

“엉큼하게 굴어서 미안하네. 지금 모습으로는 음주 가무에 영 흥이 안 나서 그랬던 거니까, 대충 넘어가 주라.”

프시오가 부엌 식탁에서 능숙하게 코르크를 따는 동안 세실은 찬장에서 꺼낸 크래커를 들어서 보여주었다.

“안주로 할 게 이거밖에 없는데, 먹을래?”

“우리 세실.”

프시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직 어리구나. 이 포도주에는 별이 빛나는 밤과 너만 있으면 돼.”

세실이 그녀 앞에 포도주잔을 내려놓으며 산뜻하게 경고했다.

“마시기도 전에 토 나오게 하지 마라.”

프시오는 후후 웃으며 포도주를 따랐다.

두어 잔쯤 마셨을 때 프시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호엘리반이 전쟁을 유보했어.”

“그래.”

세실이 포도주를 비운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실실거렸다.

“신화 속 전쟁에서도 사랑이라는 요소가 적지 않게 포함되어있지. 호엘리반도 그런 로맨틱한 이유로 유보한 거니? 예를 들면 결혼이라던가.”

세실의 거창하고 긴 농담에 당혹스러움을 감추려는 듯 프시오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포도주를 마셨다.

“호엘리반이 이제는 네가 스스로 걸었던 저주를 풀자고 설득에 설득을 거듭했을 테고.”

“…….”

“그래서 네 제자도 아니고, 내 제자인 제인이 정신계 치유 마법사가 될 것처럼 말했구나?”

프시오는 들고 있던 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네 제자니까.”

그리고 창밖에 두었던 시선을 거두고 세실을 뚫어져라 보며 웃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되는 거 아니야?”

세실은 잠깐 넋 나간 얼굴로 프시오를 보았다.

이윽고 낯빛이 하얗게 될 때쯤 어린아이 얼굴로 맹랑한 말을 하는 그녀에게 삿대질하면서 몸을 뒤로 내뺐다.

“이런, 미친! 세상에 당연한 게 어딨어!”

“있어.”

프시오는 웃는 얼굴로 그녀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내 친구한텐 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처하면서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것 봐! 징그러워 죽겠네, 진짜!”

프시오는 그로부터 얼마간 어마어마한 욕을 안주 삼아 먹었다.

세실은 세상에 있는 욕, 없는 욕을 모조리 뱉어내고 나서야 잠잠해졌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세실. 전투 대비를 잠정 중단했다는 게 중요한 거지.”

“…….”

“호엘리반이 전쟁하도록 내버려 둘 순 없어.”

한바탕 욕을 하고 난 세실은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어있었다. 그녀는 집에 있던 술을 모조리 가지고 나와서 연거푸 마셨다.

세실도 전쟁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호엘리반이 겪고 있는 상황은 확실히 매듭지을 필요가 있었다.

그게 전쟁이라 할지라도.

“프시오, 잘 생각해야 해. 그들은 계속해서 호엘리반의 피를 빨아 먹고 살점을 뜯어내려 할 거다. 거머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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