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70)화 (70/168)

70.

결론적으로 보자면 호엘리반은 세실의 부탁을 언제나 들어주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참으로 더럽고 치사한 경우가 많았다. 오빠라고 열 번을 부르게 한다거나 저를 찬양하는 듯한 말을 시킨다거나 하는 식으로 세실을 넌덜머리 나게 만들곤 했다.

지금처럼 깔끔하게 들어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결코, 단 한 번도.

“그러니까, 세실. 이 기회에 오빠에게 감사함을 제대로 머리에 박아 두는 건 어때? 우리 동생, 똑똑하잖아.”

“생일 두 달 빠른 거 갖고 죽을 때까지 그래라.”

“응.”

그가 짓궂은 얼굴로 담백하게 말했다.

“죽을 때까지 너랑 난 가족이잖아.”

“…….”

“감동했구나?”

“염병을 떨지, 아주.”

호엘리반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제인에게 필요한 게 있으면 말만 해. 달도 별도 따다 줄 수 있을 것 같거든.”

찻잔을 내려놓던 세실이 멈칫거렸다.

별도 달도? 이해득실에 맞지 않는 일에는 눈도 돌리지 않는 계산적인 새끼가 별도 달도 따준다고?

설마.

“프시오가 말했니?”

호엘리반의 미소가 더 완만해졌다.

세실은 그제야 어째서 자신의 부탁을 속전속결로 들어주는지 이해되었다.

제인이 정신계 치유 마법사가 된다면 프시오가 그녀에게 진료받길 원한다는 사실을 호엘리반이 알게 된 것이리라.

하지만 한편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프시오가 어째서 그 얘기를 벌써 입 밖으로 꺼냈단 말인가.

제인이 정신계 치유 마법사가 되는 건 아직 갈 길이 먼일이었다. 더군다나 관문을 넘을 수 있을지부터가 미지수였고, 프시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웬만해서는 매사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그녀가 쉽사리 꺼낼 대화 주제가 아니었다.

세실이 말없이 미간을 좁히고 있자 호엘리반은 허벅지에 두 팔을 올리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나도 너처럼 프시오가 자신에게 걸었던 저주 마법을 스스로 풀길 기다렸어. 하지만 세실, 그건 저주이기도 하지만 마음의 병이잖아. 치료가 필요한 병. 게다가…….”

세실은 인상을 더욱더 구기며 안쪽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한동안 줄이려고 했던 파탐 한 개비를 물고 불을 붙이려 할 때였다.

“프시오가 지금 모습으로 결혼식에 입장하는 건 조금 곤란하잖아?”

* * *

그날 저녁.

루는 언제나처럼 느릿하게 식사했다.

그리고 제인은 늘 그랬듯, 그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래서 저녁마다 도서관에 가서 서적을 좀 찾아보려고. 타락 천사라든지, 사랑의 묘약이라든지 뭐라도 찾아보면 저주를 풀 수 있는 실마리가 나오지 않을까 해서.”

“재미있군.”

루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앞에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뒤에서는 그 사랑을 끝내려 노력하는 모습이 가상하다고 해야 하나.”

그를 유심히 보던 제인이 옆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아, 이것도 마음에 안 들어?”

루는 핏기가 도는 스테이크를 입에 넣으려다가 멈추고 제인을 보았다.

그녀는 식탁 위로 턱받침을 하고서 장난스러운 투로 말했다.

“모를 줄 알아? 내가 저주에 걸리고 나서 계속 화나 있잖아. 그래서 뭐라도 찾아보겠다는데, 이것도 마음에 안 들면 어쩌라는 거야?”

루는 손에 들고 있던 포크를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그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는 마력을 제어하지 못할 때를 제외하고는 감정이 밖으로 드러나는 편이 아니었다.

심지어 최근 들어서는 제인에게 더욱 고분고분하게 굴었고, 방금까지도 평소와 다름없는 어조로 대화하던 중이었다.

어디에도 자신의 분노를 표출한 적이 없는데도 제인은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었다.

그는 의아함을 숨긴 채 나른하게 말했다.

“그야 묘약만 아니었으면 널 사랑하지 않았을 텐데, 라는 얼굴을 하고 있으니.”

제인은 억울했다.

그것도 많이.

“너를 사랑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야.”

“데시안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하지만 인간은 하지.”

대체 저 말을 몇 번을 들은 걸까?

제인은 손가락이 백 개라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루. 네 말대로 인간은 거짓말도 하고 말장난도 해. 하지만 지금 내 말에는 해당 사항 없어.”

그렇다고 루가 완벽한 진실을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제인이 이어서 말했다.

“데시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대신 진실의 일부분을 가지고 교묘하게 말장난을 치잖아. 그건 거짓말만큼 나쁜 거야.”

“데시안은 본디 나쁜 짓을 하기 위해 존재하지.”

말문이 턱 막혔다.

그녀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듯 도리질하다가 이마를 문질렀다.

이윽고 이전보다 차분하게 말했다.

“밥이나 마저 먹어.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니까.”

루는 제인이 조금 웃겼다.

그녀의 접시는 언제나처럼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인간은 사랑에 빠지면 낯짝이 두꺼워지나 봐.”

그의 말에 제인이 방긋 웃었다.

“식음 전폐로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래? 아사 직전까지도 가줄 수 있는데.”

“…….”

“먹어.”

루는 그녀의 얼굴을 잠시 살폈다.

이내 앞 접시에 있던 방울토마토를 포크로 찍더니 제인의 입가로 팔을 뻗었다. 일말의 거짓이 없는 말을 하면서.

“난 내 강아지를 굶기고 싶진 않아.”

“…….”

“아, 해야지.”

얼결에 방울토마토를 받아먹은 제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네가 화가 난 이유까지 사랑하게 만들지 마.”

그녀는 꼬리 없는 인간으로 태어났음에 감사할 지경이었다. 만약 그런 게 있었다면 속절없이 흔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 식사를 마친 루가 그릇을 부엌 개수대에 넣으며 말했다.

“네게 화가 난 게 아니야.”

“……알아.”

그녀는 루와 멀어지기 싫었다.

앉은 자리에서 몸을 틀어서 개수대에 기대고 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곧 그녀의 손에 차고 흰 손이 잡혔다.

그의 짓누른 분노가 손끝을 타고 은근하게 느껴졌다.

“내 신경이 전부 널 향해 있으니까. 그래서 알아.”

나한테 화가 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제인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내가 뭘 하든 다 마음에 안 드는 것도 맞잖아.”

루는 대답이 없었다.

“루, 화가 난 이유를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되는데.”

제인은 당연히 그가 화가 나 있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이 느끼는 답답함을 해소하고자 제 곁에서 분을 삭이는 것도 힘겨워 보이는 그에게 따져 묻고 싶진 않았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녀가 무구한 얼굴로 물었다.

“그냥 웃고 있으면 돼? 그게 네가 원하는 거야?”

비아냥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거면 되냐고 묻는 물음에 루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의 손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는 제인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조용히 말했다.

“너 말고 전부 다.”

“…….”

“화가 나.”

제인은 속이 울렁거리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결이 고운 은색 머리카락이 아래로 사르륵 떨어졌다. 제인은 다른 한 손으로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렸다.

루가 제인의 턱을 살짝 들었다.

“계속 생각해. 저주 때문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더 보기 좋았을까, 하고.”

“나도 마찬가지야.”

제인은 턱을 들어 올린 그의 손을 잡고 자신의 한쪽 뺨을 어루만지게 했다. 홍조를 띤 얼굴에 또렷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널 사랑하는 게 묘약 때문이란 생각을 안 했으면 싶거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그 이전부터 널 사랑했던 것 같은데 억울해서.”

루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웃으며 몸을 떨어뜨렸다.

“아아. 그래? 언제부터.”

“처음부터.”

제인은 한순간도 루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더 가까이 있고 싶었다. 손을 마주 잡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

이렇듯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닿지 않을 땐 손끝이라도 닿고 싶다가도, 한번 닿으면 마주 잡은 손이 아쉬워서 온몸을 겹치고 싶게 한다. 욕정 이상의 사랑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사랑해.

사랑하고 있어.

그렇게 사랑을 말하다 보면 거짓이라도 좋으니 그 말을 듣고 싶어진다.

그의 숨결이 덧대어진 목소리로.

* * *

명계의 공기는 습하다.

라트올은 그 공기의 습도와 후덥지근한 냄새를 모두 싫어했다.

눈이 보이지 않았을 땐 후각과 청각, 마력에 의존해서 지냈기에 대기를 더 예민하게 느끼나 싶었다. 그러나 시력을 되찾고 나서는 딱히 그런 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냥 싫은 거다.

그렇게 불쾌 지수가 고공행진하고 있을 때, 라트올을 발견한 타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친근하게 굴었다.

“오늘 납품일도 아닌 데 왔네? 나 보고 싶어서 왔냐.”

라트올이 무심하게 용건만 말했다.

“몽말.”

타타는 라트올의 어깨에 두른 팔을 홱 풀며 학을 뗐다.

“진짜 싫다! 난 너 이럴 때마다 섬뜩하다고.”

그러고는 두세 발걸음 뒤로 물리며 라트올에게 삿대질했다.

“도대체 방금 채굴해서 입고된 건 어떻게 안 거야? 명계에 심복이라도 숨겨둔 거야, 뭐야? 대체 마법 양피지는 뒀다가 뭐 하는데?”

심복.

그 말에 라트올은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명계에 루의 심복이라고 부를만한 존재는 차고 넘쳤다. 그러나 그가 몽말을 가지러 온건 심복의 소행이 아니었다.

“시기상 오늘 채굴했을 거고, 그게 내 손에 들어올 게 뻔한데 뭐 하러 양피지로 속살거려?”

타타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소량으로 채굴되는 마석 재고 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절차를 속살거린다고 표현하는 자식은 라트올뿐이었다.

타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몽말을 가지고 왔다.

투명한 몽말은 명계에서 일 년에 한 번, 그것도 소량으로 겨우 채굴하는 귀한 마석이었다.

마석을 이리저리 훑어보던 라트올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네. 바로 가져갈 테니까 장부에 달아 놔.”

타타가 툴툴거리며 몽말을 포장해주었다.

“다음부터는 재고 좀 확인하고 와. 기분 별로야.”

“그건 네 기분이고. 간다.”

“엥? 야, 왜 그쪽으로 가?”

명계의 출구 쪽으로 몸을 트는 라트올을 잡고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녹니스 납품은? 명계엔 마석 보러 올 때 날짜가 비슷하면 바로 납품했었잖아.”

“이달 납품은 주인님이 하실 거야.”

“어……. 그냥 네가 납품하러 오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직접 하시겠다는데 내가 무슨 수로 말려.”

“그래도 말려봐. 그렇지 않아도 귀띔해 주려고 했는데, 너희 납품일에 고위급 회의 잡혀있단 말이야.”

그가 주변을 살피다가 재차 소곤거렸다.

“그레데엘므 님도 오실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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