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프시오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호엘리반이 상냥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내 집무실이 엉망이 된 것도, 퇴근을 못 하게 생긴 것도, 그들이 나를 압박하면서 휘두르려 했던 것도…… 그 무엇 하나도 괜찮지 않아.”
호엘리반이 프시오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자신의 허리춤에 오는 그녀와 마주 보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네가 곁에 있어서 숨통이 트여.”
프시오는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제가 말씀드린 사항은 생각해보셨습니까.”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 자세는 꽤 낭만적인데 네 대화 주제는 삭막한 쪽으로 흘러가네. 마음에 안 들게.”
“낭만적이기엔.”
프시오가 어린아이의 모습인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 꼴이 이래서 말입니다.”
호엘리반은 조용히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다시 천천히 걸으며 작품을 감상했다. 반질거리는 대리석에 닿는 두 사람의 발걸음만이 전시실을 울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아직도 내 계획이 더 깔끔하다고 생각해.”
호엘리반의 계획은 일 년 전쯤부터 마련되어 있었다. 페브리아와의 전쟁을 결심한 그는 페브리아의 결계 속성을 알아보면서 마탑 교과 과정에 공격형 마법 과목을 대폭 추가했다.
그 자체가 마법 부대 결성이라는 걸 눈치챈 프시오는 결국 호엘리반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마탑을 사직하고 사막으로 떠난 게 일 년 전쯤이었다.
“관건은 페브리아의 결계인 걸로 압니다.”
프시오의 말이 옳았다.
페브리아의 결계를 무너뜨리지 않는 이상 아무리 강한 마법으로 공격해도 승산이 낮은 전쟁이었다.
호엘리반이 프시오를 슬쩍 곁눈질하며 미소 지었다.
“밀리타라는 암살자를 온전히 믿는 건 아니지만, 페브리아에서 드래곤의 마석을 사용하는 게 사실이라면 결계를 풀 수 있는 방법도 어느 정도 짐작 가잖아?”
프시오는 그가 말하는 짐작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뜻을 쉽사리 굽히지 않으리라는 것까지.
호엘리반이 이어서 말했다.
“물론 그게 정말로 가능한 방법인지는…… 나도 이론상으로만 짐작하는 거라 확인이 필요하지만.”
“결국 전쟁을 치르는 게 낫다는 겁니까.”
“최대한 인명피해 없이, 속전속결로.”
프시오의 음조가 낮아졌다.
“그건 최소한의 인명피해가 불가피하다는 말과 같지 않습니까. 대의를 위한 전쟁이라는 건 모순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나에게 희생 운운하는 것도 모순이지. 안 그래?”
프시오는 입술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가슴이 옥죄여 왔다.
그의 곁에 있으면서 어느새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보다 그가 처한 답답한 상황에 더 마음이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프시오.”
호엘리반이 프시오의 침묵에 선을 그었다.
“내가 전쟁을 통해서 얻으려는 건 페브리아에 속박된 앙디스의 땅과 자유만이 아니야. 내 다리에 묶인 족쇄를 끊어내고 오롯이 살아가기 위함이기도 해.”
“…….”
“드호아망의 마탑주이자, 집권자로서.”
드호아망은 국가 개념이 아니었다.
어느 국가에서도 정치적인 개입을 할 수 없는 자유 도시였으며, 매해 각국에서 마나를 보유한 인재들을 마법사로 교육시키기 위해 유학을 보내는 등용문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마탑은 드호아망의 심장이자 뿌리였다.
여러 나라 사이에서 평화와 발전을 도모하는 마탑의 주인이자 드호아망의 집권자인 그에게 앙디스인들이 가하는 범법 행위로 당장 그들을 잡아 가둔다 해도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호엘리반은 자신을 지속적으로 위협하는 앙디스인들에게 어떤 조치도 하지 않고 조용히 페브리아와의 전쟁을 준비했다.
앙디스의 땅을 되찾아 주기 위해.
그래서 그 땅의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호엘리반의 시선이 벽을 따라 이어지는 작품에서 프시오에게로 옮겨졌다.
“앙디스인으로 태어난 정체성과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의 근원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하지만 그게…… 내가 원해서 선택한 건가?”
그는 원하지 않았다.
프시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두 사람은 어느덧 전시회에 걸린 작품 중에서 가장 큰 그림 앞에 서 있었다. 여유를 가지고 관람하던 호엘리반이 그 그림 앞에서는 우뚝 서서 감상했다.
“인생 전반에 걸쳐서 내가 원해서 선택한 건 세 가지뿐이었어. 루의 미학적인 안목, 드호아망 집권자로서의 미래.”
그가 미소를 닦아낸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너.”
“……호엘리반.”
프시오가 불렀으나 그는 못 들은 체하며 대화 주제를 바꿨다.
“이번 전시회에서 난 이 작품이 제일 좋았어. 그래서 네게 보여주고 싶었어.”
작품명.
《고여서 썩어버린》
주변으로는 흐드러진 꽃이 핀 가운데 검은 이끼로 가득한 연못 그림이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너 같아서.”
프시오는 고개를 돌려서 벽면을 가득히 채운 작품을 눈에 담았다.
그가 한 말의 의미는 어린아이 모습으로 지내는 그녀의 모습이리라.
“프시오, 그만 고여있자.”
나란히 서 있는 호엘리반은 아름다운 꽃들 틈에 고인, 그리고 검게 썩어가는 연못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내게 흘러와.”
“…….”
“네가 가진 모든 상처, 아픔, 눈물, 그리고 떨쳐내지 못하고 너를 잠식하는 과거까지 모두 너와 함께 내게 흘려보내.”
프시오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정말, 다시 흐를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과 같은 시간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스스로 걸었던 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너도 알다시피 나도 그리 맑지 않아. 그러니 내게로 흘러들어와도 돼. 우리 함께 더 깨끗하고 맑은 곳으로 흘러가자.”
“호엘리반, 난…….”
프시오가 천천히 호엘리반을 응시했다.
“네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길 바랐어.”
“…….”
“그 누구도 아닌, 너만큼은.”
그녀는 한참 뜸을 들였다.
이윽고 괴로움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목소리를 내었다.
“내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지 않길 바랐어.”
“…….”
아늑한 새장 밖으로 나와 지독한 전쟁의 참상을 처음 봤을 때, 프시오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저주에 걸린 지금의 모습처럼.
“한 번의 전쟁은 수많은 고아를 만들어내. 그 아이들은 보호받을 수 있는 세상을 통째로 잃어버리는 거야. 그렇게 무수히 많은 세상이 사라지는 거야.”
그녀는 지금까지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그런데도 그녀의 아버지가 수많은 땅에 그린 핏자국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내 이름 끝에 걸린 가문의 이름과 아버지의 정체를 누가 알게 될까, 전전긍긍하는 건…….”
“…….”
“충분하잖아…….”
호엘리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뻗어서 그녀를 품에 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에게서 몸을 떨어트린 호엘리반은 냉소적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렵게 돌아가는 건 이해도 안 되고 적성에도 안 맞아.”
그러다 이내 옅은 미소를 그렸다.
“그렇지만 너와 함께라면 가볼 만하지 않을까.”
프시오의 마음의 연못에 작은 파동이 일었다.
뭉근하고 잔잔하게.
“내 애제자는 나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으니까.”
* * *
같은 시각.
제인은 분통이 터지는 얼굴로 곤히 잠든 솜브를 줄기차게 노려보았다.
“저거 한 대만 쥐어박아도 돼요?”
세실은 대답 대신 되물었다.
“이제 좀 알겠니?”
“뭘요.”
“널 보는 내 마음이 항상 그렇거든.”
“제가 저렇게 열받게 한다고요?”
“비슷해.”
“말도 안 돼요.”
장장 세 시간이 넘도록 솜브에게 결박 주문을 겨우 두 번 걸었다. 한 번은 솜브가 꼴사납게 엉덩이를 흔들다가, 한 번은 제인이 발을 헛디뎌서 얼결에.
그런 제인을 솜브는 내내 약을 올리며 놀려대다가 수련이 끝나자마자 피곤한지 잠이 들었다.
제인이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자는 솜브를 못마땅하게 보고 있을 때였다.
세실이 무심하게 물었다.
“요즘은 어떻니.”
세실은 제인이 걸린 저주와 관련해서 괜찮냐고 묻지 않았다.
말간 얼굴로 소름 끼치게 웃으며 ‘아뇨, 절대로.’라고 대답하던 제인의 표정을 보는 건 한 번으로 족했다.
제인이 피식거렸다.
“저주요? 그건 더 열받고요. 볼 때마다 더 좋아지는데 정말 돌 것 같아요.”
이것 보라. 안 괜찮지 않은가.
제인이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누가 제 심장 좀 갈아 끼워 줬으면 좋겠어요. 지금처럼 계속 두근거리다가는 단명할지도 몰라요. 아니면 눈알이라도 파내고 싶어요. 눈에서 안 보이면 덜하지 않을까요?”
그녀는 마지막 말을 하고서 멈칫하더니 황급히 말을 거뒀다.
“그건 안 되겠다. 생각만 해도 보고 싶어서 못 견딜 것 같거든요. 사실 지금도 보고 싶어요.”
“너…….”
세실이 아주 단단히 미쳤구나, 하는 눈으로 보자, 제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루하루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걸 보면 언젠가는 루가 손가락 두 개만 까딱거려도 개처럼 쪼르르 뛰어갈 제 모습이 눈에 선연했다.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루의 눈짓, 손짓 한 번에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 물음의 결론은 간단했다.
일단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는 것.
사람은 보통 습관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녀는 약제사 시절부터 연구원 때까지 안 풀리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찾는 곳이 정해져 있었다.
“세실.”
제인이 오래간만에 미치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드호아망 도서관 출입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 * *
호엘리반의 집무실 안.
“나벨, 들었지? 제인 이름으로 된 드호아망 신분증과 도서관 출입증 준비해줘.”
“네.”
나벨은 호엘리반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집무실을 나섰다.
반면, 세실은 그의 신속하고 깔끔한 일 처리에 상당히 찝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테러에서 복구된 집무실 안으로 먼지 같은 정적이 쌓였다.
세실이 물었다.
“뭐니?”
“뭐긴 뭐야, 하늘 아래 하나밖에 없는 내 동생 부탁을 들어 준거지.”
“내 말이. 내 부탁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렇게나 순순히? 네가? 나한테? 내일 세상이 멸망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