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68)화 (68/168)

68.

하지만 이게 순리이기는 했다.

그레데엘므는 천계의 질서라 불리는 신의 제1 대리자였다. 신이 인간들에게 영원을 가르쳐주고 침묵하게 되면서 그레데엘므는 천계의 질서에 버금가는 존재가 되었다.

비록 지금은 타락하여 명계로 쫓겨났다고 하나 이상하게도 본래의 힘과 신성력은 전과 다름없었다.

오히려 거기에 마력까지 얻었으니 힘으로만 본다면 아무리 루라고 할지라도 그에게 비할 바가 못 되었다.

팔랑…….

그때 루가 목록이 적힌 서류를 확인하고 작업대 위로 날리듯이 떨어트렸다. 이어서 손톱으로 테이블을 천천히 두드리다가 다른 팔로는 턱을 괴었다.

“목줄을 틀어쥐고 싶은 자보다 약하다는 건 참, 속이 뒤틀리는 일이지.”

문득 그가 나른한 미소를 물었다.

“속이 뒤틀리고 흥분이 돼.”

라트올은 불안이 엄습했다.

어…….

이거 잘 못 건드린 것 같은데.

차분해진 모습에 눈치껏 얘기를 꺼냈던 터라 라트올은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혹스럽기만 했다.

곧이어 선명하게 떠오르는 루의 재기발랄한 미소를 보는 순간, 그는 자신의 실수를 빠르게 인정해야 했다.

……망했다. 차분해진 게 아니라 차분하게 더 돌아버리신 거구나…….

라트올은 삼 분 전으로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자기 자신에게 아가리를 닥치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의 마음을 알 턱이 없는 루가 웃으며 말했다.

“그자가 나를 얕보는 게 무척이나 즐거워.”

“…….”

“지금보다 더 얕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만 해도 아래가 뻐근해.”

“…….”

그게 왜 거기서 뻐근한데요…….

라트올은 울고 싶었다.

“……어, 어쩌시려고요.”

여전히 휘어진 속눈썹 아래로 루의 음산한 목소리가 깔렸다.

“지금처럼 조용히. 아주 조용히 있어 볼까 해. 그자가 나를 더 얕보도록.”

“…….”

매끈하게 휘어진 푸른 눈 속에 기묘한 광분이 희끗거리고 있었다.

“그자의 모가지를 틀어쥘 때까지.”

라트올은 뒤늦게 깨달았다.

그의 느긋함이 전부, 모조리, 죄다 연극이라는 사실을.

* * *

다음 날, 세실의 집.

제인은 마비력에 주문을 섞어서 바깥으로 조준하는 법을 익히고 있었다.

그녀와 솜브가 숨을 죽인 채 서로를 노려보았다.

일순, 솜브가 왼쪽으로 빠르게 휙 날아갔다. 동시에 제인의 손가락이 솜브를 가리켰으나 조준이 보란 듯이 빗나갔다.

솜브는 떼구르르 구르며 웃어댔고, 제인은 이를 으드득거렸다.

“솜브, 재미있어 보이네.”

“네! 무지무지 재미있어요! 세실 님께서 수련이니 뭐니 도와달라고 부르셨을 때는 사실 귀찮았는데요, 이렇게 재미있을 줄 몰랐어요!”

솜브가 방방 뛰면서 엉덩이를 씰룩거렸다.

제인은 솜브의 엉덩이를 걷어차 버리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수통을 열고 물을 마셨다.

그때 둘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신문을 넘겨 읽던 세실이 파탐을 입에 물고 말했다.

“처음에는 생각처럼 안 되는 게 당연해. 당연한 일에 괜히 열 올리지 마라. 집중력만 흐트러지니까.”

“알고 있어요.”

“삼 분 휴식해.”

세실의 말에 제인은 그대로 바닥에 벌러덩 누워서 눈을 감았다.

세실은 신문을 넘기며 그녀를 힐끗 보았다.

제인이 가진 마비력은 감각을 마비시키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범위를 넓히면 움직임까지 마비시킬 수 있었다.

정확하게는 몸을 움직일 수 없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거였다.

제인의 마력은 계열 자체도 희소했으나 이제 막 돌입한 수련은 더구나 잘 알려지지 않은 마법이었다.

가르치는 세실도 이론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던 방식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가르침이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그저 제인이 능력을 발현할 수 있게끔 알아듣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게 전부였다.

나머지는 제인이 몸으로 익혀가면서 찾아가야 했다. 그런데도 수련 과정에 넣은 것은 제인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목표가 강해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약하지 않은 나로 살아가는 세상.

세실은 그 문턱까지 제인을 데려다주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제인이 몸을 일으켰다.

“다시 해볼게요.”

정확히 삼 분이 지나있었다.

제인이 머리카락을 높게 묶으며 말하자 세실은 변함없이 신문에 시선을 둔 채 솜브를 불렀다.

“솜브, 이번에는 정지된 상태에서 움직이지 말고 계속 날아 다녀봐. 네 마음대로, 실컷.”

“좋아요!”

제인은 숨을 깊게 내쉬면서 다시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 * *

콰광!

귀가 멀 듯한 굉음이 울리면서 호엘리반의 집무실이 폭발했다.

집무실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나벨의 몸까지 붕 떠서 벽 쪽으로 날아갈 만큼 강한 폭발력이었다. 벽에 부딪히기 직전, 나벨은 아슬하게 보호 마법을 썼다.

“으…….”

강도 낮게 부딪힌 등허리가 욱신거리긴 했으나 보호 마법 덕에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나벨은 짧은 신음을 토해내며 집무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집무실은 안팎으로 거의 날아간 공간에 건물 뼈대 구조물까지 훤히 드러나 있었다.

근처에 상주하고 있던 경비병들이 폭발음에 우르르 몰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경비병들은 참혹한 폭발 현장을 보고 순간 말을 잃었다.

그 순간.

자욱한 연기가 바깥으로 빠져나가면서 바닥에 적힌 붉은 글씨가 드러났다.

[기억해. 우리의 희생을.]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붉은 글씨의 문장을 누가 쓴 것인지. 모두가 할 말을 잃은 가운데 나벨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했다.

호엘리반의 공적 집무실까지 피해를 주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과 다른 점은 호엘리반의 공개 일정에서 그가 자리를 비운 시각에 터졌었고, 이번에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폭력적인 행위의 빈도와 강도가 높아져 가는 건 페브리아의 교황청에서 앙디스인들을 ‘사탄’이라는 이름으로 탄압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주변국에서는 그걸 이렇게 불렀다.

사탄 사냥.

나벨은 그 이름에 기꺼이 손을 들어주고 싶었다. 적어도 호엘리반에게 앙디스인들은 사탄이 분명했다.

게다가 저 메시지는 볼 때마다 실로 불쾌함을 자극했다.

희생이라니.

그걸 희생이라고 할 수가 있나?

앳된 경비병 하나가 천천히 일어나는 나벨의 어깨를 잡고 부축해주었다.

“괜찮으십니까?”

“고마워요. 전 괜찮아요.”

“호엘리반 님은…….”

앳된 경비병이 말을 매듭짓지 못하고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나벨이 옷에 붙은 먼지를 털어내며 그분은, 하고 대답하려던 찰나였다.

“난 안 괜찮아.”

서고에서 집무실로 복귀하던 호엘리반이 복도 끝에 서 있었다.

그는 아수라장이 된 집무실과 바닥에 적힌 붉은 글씨를 보며 산뜻하게 웃었다.

“내 집무실이 개차반이 됐잖아.”

그는 나벨을 향해 몸을 틀었다.

“다친 데는?”

“없습니다.”

“그래도 네르기니에 잠깐 다녀와. 근육이 놀라서 풀어줘야 할 거야.”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

호엘리반은 허리를 곧게 편 자세로 뒷짐을 지며 말했다.

“나벨이 다치면 내 업무에도 차질이 생길 수 있으니까 고집부리지 말고 말 들어. 집무실은 수리하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내가 복구할 수 있게 자재만 구비해 줘.”

“……네.”

나벨은 호엘리반의 등 뒤에서 뻣뻣하게 굳어 있는 한 사람을 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호엘리반 님. 이렇게 된 거, 땡땡이나 치고 오시는 게 어떨까요.”

호엘리반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

“이럴 때라도 쉬셔야죠. 집무실에 있던 서류는 화염에 죄다 날아갔을 겁니다. 퇴근은 물 건너가신 거 아실 테고, 자재가 도착할 때까지 땡땡이나 치고 오시는 게 좋겠어요.”

호엘리반은 “그렇긴 하지?”라며 웃고는 경비병들에게 훠이훠이 손짓했다.

“이만 가봐. 피해라고는 내 소중한 일상, 그리고 몇 푼 안 되는 자재 비용밖에 없으니까.”

경비병들이 자리에서 물러나자 휑한 집무실 안으로 들어간 나벨이 주문해야 할 자재의 종류와 수량을 확인했다.

대충 상황을 정리한 호엘리반은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그리고 한 발자국 뒤에서 얼어붙어 있는 프시오를 향해 살갑게 웃었다.

“프시오, 문제 하나 낼 테니 맞춰봐.”

“호엘리반…….”

“내가 너랑 결혼하는 게 빠를까, 암살당하는 게 빠를까.”

“…….”

호엘리반은 대답 없는 프시오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몸을 빙글 돌려서 어디론가 걸어갔다.

그가 프시오를 데리고 간 곳은 마탑의 전시실이었다. 이어서 전시실 직원에게 잠시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아무렇지 않게 작품을 감상하는 호엘리반과 달리, 프시오는 작품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집무실 테러도 처음은 아닌가 봅니다.”

“응.”

단조로운 대답에 프시오는 조용히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은 끊임없이 나를 원망하고 전쟁을 종용해.

처음에는 그 말이 와닿지 않았다.

호엘리반은 드호아망에서 누구보다 강한 마법사였다.

방금 일어난 테러 위협도 일반 사람들에게는 목숨을 잃을 만한 일이었으나 그가 집무실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다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금 전과 같은 폭탄이 연속으로 떨어졌어도 타격을 입지 않을 만큼 그에게는 강한 보호 마법이 걸려 있었다.

문제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호엘리반의 곁에 돌아와서 자신이 목격한 것만도 여러 차례였다.

그를 겨냥한 크고 작은 협박과 테러는 곁에서 보는 사람마저도 숨 막히게 했으며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심지어 강도는 나날이 더 심각해지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지냈던 겁니까.”

벽에 걸린 작품에 머물던 그의 시선이 프시오에게로 향했다.

언제나처럼 담담하게 웃으며.

“네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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