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그럼 그렇지.
제인은 심드렁하게 빵을 마저 먹었다.
라트올이 식탁 위로 팔을 올리고 턱을 괴며 물었다.
“그거 알아요? 루가 일주일 넘게 아무것도 안 먹어서 필요한 게 뭐냐고 물으니까 고작 찾은 게 무화과였어요.”
라트올이 잼이 든 유리병을 다른 손으로 퉁명스럽게 툭 쳤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제인은 무화과잼을 가만히 보았다.
루를 다시 만났던 작년 가을에 이어서 올해 가을에도 그와 함께 무화과를 먹었다.
그래서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럼 뭘…… 좋아하는데요?”
제인이 손에 든 빵을 내려놓고 재차 물었다.
“루는 뭘 좋아해요?”
* * *
그 시각 명계.
두꺼비처럼 생긴 타타는 커다란 몸을 숨기고 눈만 빼꼼히 내민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는 평생 명계에서만 살아왔던 메 데시안이었다. 그래서 이 바닥에 정신 나간 새끼가 많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막막한 존재’에 비하면 그놈들은 앙증맞게 보일 지경이었다.
그때, ‘막막한 존재’가 미친 소리를 하며 키득 웃었다.
“예쁘게 웃으래도.”
그의 몸에서는 검은 광기가 용암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명계의 공기까지 비틀릴 지경이었다.
다만, 어깨까지 오는 그의 연보라색 머리카락만이 봄바람에 나부끼는 제비꽃처럼 살랑거렸다.
타타의 눈에는 도륙의 현장에서 부드럽게 살랑거리는 머리카락만이 아니라 그의 일거수일투족 모든 게 기괴하게만 보였다.
그의 손에서 죽어가고 있는 데시안도, 그의 발밑에 목이 졸려 죽은 데시안의 사체도 끔찍하기 짝이 없었으나 가장 기이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건 그의 발랄한 콧노래 소리였다.
타타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왜 또 지랄…….”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 사이 묘약의 저주는 제인을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마음이라는 게 주체가 안 되었다.
떨어져 있을 때면 머릿속에 루의 생각으로 가득 찼다. 붙어 있으면 그의 눈짓, 손짓 하나에 몸이 반응했으며 심장이 두근거리거나 아프거나 애가 탔다.
아무튼 정상적으로 반응하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가장 미치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다.
사랑한다는 고백이었다.
청명하고도 푸른 눈을 바라보자면 목구멍에서부터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들이 오르골처럼 줄줄 나오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널 사랑해.’
‘사랑해.’
‘너를 사랑하고 있어.’
제인은 그럴 때마다 혀뿌리를 뽑아 버리고 싶었다. 그 말 만큼은 절대로 내뱉고 싶지 않아서 갖은 애를 썼다.
주체가 안 되는 마음만큼이나 그 마음을 의심하는 건 실로 사람을 미치게 했다.
사랑하는데.
이렇게 절절하게 사랑하는데.
그를 사랑하는 게 맞는지 아니면 묘약의 환영인지 매번 의심이 들었다.
어디까지가 내 진심일까. 또 어디서부터 묘약의 환각일까.
의심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떠올랐고, 의식하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더욱 또렷해져만 갔다. 마치 태양 아래의 그림자처럼.
“……만!”
세실이 제인을 발로 차버렸다.
제인이 이미 한계점을 월등히 뛰어넘은 상태로 마비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새끼야! 그만하라는 말 안 들려?”
“…….”
“골로 가고 싶어서 환장한 거 아니면 정신 똑바로 차려, 꼴통 새끼야! 쥐어패려고 하면 마비력이나 쳐올리질 않나!”
방금은 제인이 요단강을 봤던 날보다 몇 배는 더 위험한 상황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세실이 괄괄하게 욕을 퍼붓다가 뚝 멈췄다.
제인이 돌연 숨을 헐떡거리며 과호흡하기 시작했다.
“가지가지 한다, 아주!”
곧바로 세실은 고도의 마나로 제인에게 회복 마법을 걸어주었다.
제인은 끅끅거리며 숨이 넘어갈 듯한 소리를 내다가 곧바로 푸하! 하며 살 것 같다는 얼굴로 세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방긋방긋 웃었다.
“저 오늘 한계점 갱신했죠? 나 너무 대단한데?”
“허…….”
세실은 경악과 분노 사이에 서서 제인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느꼈을 기도 압박은 보통이라면 죽을 것 같은 공포심에 덜덜 떨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어찌 된 게 제인은 그런 통각과 공포심에 익숙해 보였다.
한계점이 어딘지 모를 만큼.
“어떡해. 나 재능있나 봐.”
수줍게 말하는 제인에게 세실이 진심을 가득 담아서 물었다.
“……열받게 하는 재능을 말하는 거니?”
제인은 대답 대신 킬킬거리며 땀을 닦았다.
그런 그녀를 볼 때마다 세실의 심경은 복잡해지곤 했다.
재능.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있다. 그것도 뛰어난.
제인은 매우 빠른 속도로 완성도 있게 마나를 조절하고 있었다.
마비력에 비해 턱없이 비율이 적은 회복력 또한 그녀가 가르치는 대로 곧잘 배웠다.
그 문턱만 넘으면 될 텐데 과연 넘으려나…….
“세실.”
방금까지도 방긋거리던 제인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불렀다.
동시에 세실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면서 학을 떼는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부르지 마. 집에 가.”
제인은 세실이 그러거나 말거나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물었다.
“사랑한다는 말이요, 그거 말고 다른 말은 없어요?”
“…….”
“사랑한다는 말이 너무한 것 같아요.”
“난 네가 너무 한 것 같은데. 제자가 그만 꺼져주길 바라는 스승의 마음 좀 알아주지 않으련?”
세실의 타박에도 제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테이블에 있던 파탐 한 개비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공손한 자세로 세실의 입에 물려준 뒤 불을 붙이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들어봐요, 세실.”
저주다.
이건 앞으로 구르나 뒤로 구르나 저주가 확실했다.
세실은 타락 천사가 만든 묘약의 저주를 씹어먹어도 시원찮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정도로 주변 사람까지 미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인이 그 저주에 걸린 후, 수련할 때 몰입도는 눈에 띄게 상승했다.
신체에 무리가 갈 수도 있을 정도라 적당히 하라고 타일렀으나 제인은 광기가 희끗거리는 눈을 하고서 이죽거렸다.
-집중해야지 아무 생각이 안 들거든요.
하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수련을 마친 후였다. 세상 무너지는 표정으로 루를 향한 사랑에 번뇌하곤 했다.
웃다가 울다가 화내다가 망연자실하다가…….
아무튼 매일 같이 삽질을 해댔다.
그래도 오늘은 나름대로 덤덤한 편이었다.
제인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제 마음의 크기에 비해서 사랑한다는 그 말이 너무 작게 느껴져요.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이 가혹하다고 생각해요. 절대로 그 한마디에 마음이 담기지 않는데.”
세실은 말이 없었다.
바닥에 앉아있던 제인은 남 얘기하듯, 무심한 얼굴로 세실이 앉은 소파에 팔을 괴었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을 못 해요.”
표정과는 달리, 애틋하기 그지없는 말을 하면서.
“사랑한다는 한마디에 다 담지 못하고 흘러넘치는 마음들이 안타까워서요.”
루를 볼 때마다 사랑한다는 말을 수백, 수천 번 하고 싶었으나 하기 싫었던 이유였다.
매 순간 들이닥치는 의심 때문이 아니라, 고작 그 한마디에 들어갈 마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떡해요?”
세실은 그녀의 머리 위로 무심하게 손을 얹었다.
“그러게. 널 어떡하면 좋을까.”
제인은 쓰다듬는 것도 아니고 툭 얹기만 한 그녀의 손길이 좋았다.
다정하고 따뜻했다.
“우산 두 개 들고 가는 사람 본 적 있니?”
제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세실은 파탐을 끄고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건 마음을 전하러 가는 거야.”
“…….”
“네가 비를 맞지 않았으면 좋겠어, 혹은 너를 생각해, 라고.”
제인은 세실의 말을 곱씹었다.
네가 비를 맞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를 생각해.
“꼭 우산을 건네주어야만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내일 비가 올지도 모르니 우산을 챙겨가라는 한마디로도 사랑하는 마음을 전할 수 있어.”
“…….”
“알겠니?”
세실은 제인의 어깨에 걸쳐있던 수건을 그녀의 얼굴에 툭 덮어 주며 말했다.
“사랑하는 마음을 반드시 사랑한다는 말로만 전할 필요는 없어.”
* * *
제인은 시장 입구에 있는 와플 가게를 지나갈 때마다 기분이 착잡했다.
루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그는 다신 그레데엘므와 마주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제인을 물끄러미 보더니 오싹한 말을 덧대었다.
-묶어서 가두는 데에는 취미 없어.
지독하게 아름다운 눈동자에 살기가 뒤섞여서 보기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져 왔다.
-응, 없는 취미를 굳이 만들 필요는 없지.
제인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게 최선이었다.
동시에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소유욕과는 결이 다른 그의 욕망이 자신에게 향한다는 사실이 기뻐서.
기쁨이라니.
제인은 혼란스러웠다.
나는 그의 구속까지 사랑하는 걸까. 아니면 이것도 환각일까.
거듭된 생각에 내려진 결론은 우습게도 간단했다.
어떤 형식으로든 그가 나를 원한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 제인은 마음이 벅차올랐다.
그러므로 루에게 묶인다고 해서 아주 불행할 것 같지도 않았다.
미친 게 틀림없었다.
제인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
어느덧 시장 안쪽까지 걸어온 제인은 시장에서 제일 큰 식료품 가게로 들어갔다. 그리고 물고기들이 차곡차곡 쌓인 생선 매대 앞에서 비릿한 냄새를 맡으며 쭉 훑어보았다.
-루는 뭘 좋아해요?
며칠 전, 제인의 물음에 라트올은 무테안경을 닦으며 대충 대답했다.
-직접 물어봐요.
-저도 요리해주고 싶어서요.
그래서 대놓고 묻기에는 좀, 이라고 작게 웅얼거렸다. 시무룩하게 빵 쪼가리나 만지작대고 있으니 라트올이 귀찮다는 듯이 설명했다.
-말했다시피 루는 요리하는 과정부터 식사까지 모두 탐닉해요. 일종의 놀이처럼. 그래서 남이 해주는 요리에는 큰 흥미가 없어요.
이어서 무심하게 말했다.
제인이 태어나서 제대로 된 요리를 해본 적이 전무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 채.
-해산물 요리 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