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그녀의 뺨을 만지는 손길이 움직임을 멈췄다.
제인의 기척에 언제나 기민하게 반응하던 이가 루였다.
루의 아래에서 쓰러져있던 호엘리반을 봤을 때 제인이 목석처럼 굳어버렸던 이유도, 마음이 아프고 화가 났던 이유도 모두 하나였다.
목적이 뚜렷한 고의성.
일부러 보란 듯이 상황을 목도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대답했다.
“사랑의 묘약은 그자의 것이니까.”
제인이 알아들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자, 루가 이어서 말했다.
“차라리 내가 주는 상처에 아파하는 걸 보는 게 낫겠다 싶어서.”
“……뭐?”
“그가 건 저주로 인해서 네가 괴로워할 게 눈에 보였으니.”
제인의 표정이 곧바로 일그러졌다.
루는 담담하게 말했다.
“약속하지 않았나? 네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건 오직 나여야 한다고.”
제인의 머릿속에 루와 계약했던 날이 떠올랐다.
무척 빠르게.
-그 전에 한 가지 약속했으면 하는데.
-자학은 그만둬.
-네 슬픔과 고통과 절망은 오직 나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걸 잊지 말도록 해. 너를 두렵고 상처받게 하는 것 역시 오직 나여야 한다는 것도.
제인은 헛웃음이 나왔다. 이건 소유욕의 개념이 아니다.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혹은 이해되어서는 안 되는 생각과 감정이었다.
“좋았어? 원하는 대로 돼서.”
“……아니.”
“…….”
“……아니더군.”
제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올가미 같은 푸른 시선에 묶인 기분으로 그와 눈을 맞출 뿐이었다.
그때였다.
루가 스르륵 몸을 일으키고 제인의 위로 올라탔다.
귀 뒤쪽부터 목덜미, 쇄골 아래 가슴과 허리까지 모두 느릿하게 입을 맞춘 그는 손끝까지 한기가 느껴질 만큼 차가웠다.
“그래서, 제인.”
곧이어 느슨한 목소리가 팽팽하게 울렸다.
“그자를 어디서 어떻게 만났지?”
주변 공기가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달라졌다.
제인의 온몸 감각이 경고했다.
말하라고.
말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제인.”
타이르듯 이어지는 그의 부름에 그녀는 발끝까지 소름이 끼쳤다.
“네 향기……!”
저도 모르게 뱉어낸 두 음절에 공기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졌다. 제인은 생존본능처럼 마비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으나 편안히 호흡하기가 어려웠다.
“……아.”
루는 무언가 깨달은 듯 숨이 꼴깍 넘어갈 듯이 숨을 몰아쉬는 제인의 머리를 다정하게 귀 뒤로 넘겨주었다. 이어서 잠시 통제력을 잃었던 마력을 낮췄다.
그 틈에 제인이 다급하게 루의 옷깃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네 향기가 나는 향수 가게로 들어갔어……!”
이윽고 아름다운 입매에 사나운 웃음이 걸렸다.
“어디를, 어떻게 만지면서?”
* * *
세실은 며칠 동안 프시오에게 상당히 시달리고 있었다.
나이는 서른인 주제에 액면가만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그녀는 사랑의 묘약을 제조한 마법사를 못 찾겠다며 며칠에 한 번씩 그녀의 집으로 찾아왔다.
집에 오는 것?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무룩한 표정만 짓다가 가곤 하는 몹쓸 추태였다. 세실은 그 꼴값을 며칠 내내 보고 있자니 속이 뒤집히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은연중에 작은 기대를 했다.
혹시라도.
정말 만에 하나.
아주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제인이 정신계 치유 마법사로 활동할 수 있다면 언제 깨어날지 알 수 없는 로안나도 회복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소박하고 작은 기대.
“……근데 그걸 네가 걸려서 왔네?”
세실이 앞뒤 다 잘라먹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자 제인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팍 찡그렸다.
딱!
아니나 다를까, 세실은 제인의 이마에 딱밤을 놓았다.
이제 사소한 욕이나 구타는 억울하지도 않았다. 루와 지내면서 마비력을 숨 쉬듯이 반사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 덕분에 딱밤 정도는 수월하게 막아냈다.
도리어 아픈 건 세실의 손이었다.
세실이 손을 털며 꼴통 새끼, 하고 욕을 곱씹을 때였다.
“그래서요.”
땀에 절어진 채로 바닥에 누워있던 제인이 가볍게 튕겨 나가듯 자리에 앉았다.
“로안나 씨와 같은 저주, 맞아요?”
제인은 어젯밤 루에게 그레데엘므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그가 어디를 어떻게 만지며 제인에게 저주를 걸었는지 낱낱이 말하고 나서야 그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착각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루에게 모든 사실을 말하고 한숨 돌리려던 그때.
그때부터 제인은 온기가 덧칠된 그의 품 안에서 몇 번이고 달뜬 숨을 뱉어내야 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고 쾌락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다가 동이 터오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질 낮은 수면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수련을 끝낸 제인은 세실에게 사랑의 묘약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을 실토했다.
그리고 조금 전, 로안나와 같은 저주에 걸린 게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진단을 부탁했던 상황이었다.
세실이 미간을 한껏 좁히며 말했다.
“기본적인 틀은 같아.”
“무슨 뜻이에요?”
“살짝 다른 부분이 있어. 대상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제조됐어. 비유하자면 같은 케이크 시트에 다른 과일을 얹은 거라고 보면 돼.”
“향수로 제작한 거니까 향의 차이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이 커.”
제인은 평소보다 잠을 못 자서 조금 피곤했다.
그녀는 테이블에 놓인 파탐을 가리켰다.
“펴도 돼요?”
“그러던지.”
제인이 조용히 파탐을 피우는 동안 세실은 생각에 잠겼다.
사랑의 묘약을 제조한 게 마법사가 아니라 타락한 천사였다니. 그러니까 프시오가 못 찾지.
로안나의 의식이 돌아오면 묘약의 해독제를 알아볼 요량으로 제조 마법사를 찾으라 했던 세실은 착잡했다.
제인에게 대략적인 내용을 들어보니 뾰족한 수가 없어 보였다.
-오늘 그 향수 가게를 다시 찾아갔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옆 가게에 물어봤더니 처음부터 와플 가게였대요.
이 얘기를 프시오에게 해줄 생각을 하자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그녀의 실망스러운 표정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속이 거북해져 왔다.
세실은 이성적으로 생각을 이어가고자 노력했다.
로안나가 혼수상태가 된 근본적인 이유는 묘약의 저주가 맞으나 원인은 아니었다.
원인은 그것과는 별개로 그녀가 깨어나길 원치 않는단 것이었다. 그러니 만약, 제인이 희박한 확률을 뚫고 정신계 치유 마법사가 된다면?
머릿속으로 수많은 경우의 수를 대입해 본 그녀는 얼추 생각을 정리하자, 자연스럽게 제인에게로 눈이 갔다.
누구는 자살을 시도할 만큼 사람을 미치게 하는 저주인데 얘는 괜찮은 걸까.
이내 제인이 덧붙였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와플 하나 사 먹고 왔어요.
……괜찮아 보이긴 한데.
그 사이 제인은 파탐을 두 개비째 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너, 괜찮니?”
세실의 물음에 멀뚱한 얼굴로 파탐을 피던 제인이 말갛게 웃었다.
세실은 할 말을 잃었다.
“아뇨.”
그 미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머리털이 쭈뼛하게 서면서 닭살이 돋을 만한.
“절대로.”
살짝 맛이 간 미소였다.
* * *
라트올은 콧노래를 불렀다.
오랜만에 편히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얼마 만인가!
눈치 볼 필요 없는 혼자만의 공간!
게다가 시간적으로도 무척 여유로웠다. 최근 들어 작업에 몰두한 루가 연장근무까지 해준 덕분이었다.
물론 시간이 넉넉해졌다고 해도 작업량을 줄일 라트올이 아니었으나 마음의 여유가 주는 상황을 여과 없이 즐겼다.
막 씻고 나온 그는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눈을 감은 채 상쾌한 공기를 한껏 마셨다. 이윽고 물기가 촉촉한 머리를 손으로 대충 쓱 쓸어 넘기며 본채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빵에 무화과잼을 열심히 발라 먹고 있는 인간 여자가 하나 있었다.
제인이 빵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먹을래요?”
“군고구마 해 먹을 거예요.”
라트올이 고구마 하나를 들고서 눈치로 먹을 건지 물어보았다. 먹을 거면 몇 개 더 넣어야 하니까.
제인은 잼 바른 빵을 흔들며 거절의 의사를 표시했다.
부엌 화덕에 은근하게 불을 피운 라트올은 고구마를 몇 개 넣으며 제인에게 물었다.
“루는요?”
“아직 자요.”
평소라면 둘의 대화는 하루치 할당량을 채운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라트올이 치즈를 얇게 썰어서 접시에 담아주며 대화를 이어갔다.
“같이 곁들여 먹어봐요.”
빵에 무화과잼을 바르려던 제인은 나이프를 내려놓고 치즈를 얹었다. 그 위에 잼을 발라서 크게 한 입 베어 물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천재예요? 너무 맛있는데.”
“루가 좋아해요. 그렇게 먹는 거.”
커피를 타던 라트올은 이번엔 묻지 않고 두 잔을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여기.”
“안 그래도 탈까 싶었는데. 잘 마실게요.”
“루가 얘기했어요?”
전조 없는 질문에 커피를 마시려던 제인이 멈칫거렸다.
그녀는 눈을 굴리다가 눈치껏 되물었다.
“……묘약?”
제인은 라트올이 자신의 저주에 대해서 모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예상대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했구나. 계속 미루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제인은 라트올의 입에서 걱정했다는 말이 나온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건 사람이나 할 법한 말이었다. 빵을 삼킨 제인이 의아한 얼굴로 라트올을 응시했다.
“맥락상 이 개 같은 상황에서 절 걱정하는 게 맞거든요. 그런데 당신은 그럴 리가 없는데, 누구를 걱정했다는 거예요?”
라트올이 누구긴 누구냐는 얼굴로 대답했다.
“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