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제인의 눈동자에 당혹스러움이 어렸다.
……그건 좀 말하기 어렵겠는데.
네 향기가 나서, 그래서 나도 모르게 걸어 들어갔다는 말을 내 입으로 어떻게 말해?
“그것보다…….”
제인이 어색하게 말을 돌렸다.
“그자는 어째서 나한테 저주를 건 거야?”
어물쩍 상황을 넘기려는 제인의 태도에 루가 고요한 미소를 띠었다.
루는 그레데엘므가 제인에게 어디서 어떻게 접근했는지, 손목 외에 그녀의 어디를 만지면서 저주를 걸었는지, 그리고 어떤 대화를 했는지 모조리 캐내고 싶었다.
그러나 애써 그 욕구를 억누르며 그녀를 당겨 안았다.
쓰러지듯 루의 품에 안긴 제인은 가만히 숨을 골라내는 그에게서 섬찟한 무언가를 감지했다.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그녀가 상체만 살짝 일으키며 물었다.
“뭐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나 있어?”
제인이 루에게서 느낀 무언가는 인간의 것과는 결이 다른 분노였다.
“네가 날 원망할 생각에.”
“…….”
원망.
그 두 글자에 제인의 눈동자가 잠식하듯 빛을 잃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장막 같은 은빛 머리카락에 음영이 드리워졌다.
루는 그녀의 그늘을 응시하다가 입술을 떼었다.
“제인. 그자는 내게 원한을 가지고 있어. 아주 오래전에 그자가 예뻐하던 죄 없는 인간 하나를 내가…….”
그의 말소리는 무척 느릿하고 나른했다.
꼭, 낮잠처럼.
“그의 손에 죽도록 만들었거든.”
루는 그 죽음으로 아득한 어둠 속에 봉인되었다.
그렇게 1세기가 흘렀다.
봉인되어 있던 루를 깨워 준 이는 호엘리반이었으나, 모든 건 그레데엘므의 의도였다.
어느 날 루를 찾아온 그레데엘므가 낭창하게 물었다.
-안녕, 애송아. 잘 잤어?
다시 만난 그레데엘므는 완전히 미쳐 있었다.
루가 말했다.
-미끼까지 써가면서 나를 다시 깨운 이유가 있을 텐데.
-응, 심심해서.
-…….
-나 무지무지 심심해.
-…….
-너도 알지? 내가 걸어둔 네 봉인이 완벽하게 풀린 게 아니라는 거.
-……모를 리가. 당신이 제대로 미쳤다는 것만큼이나 잘 알고 있지.
그레데엘므가 꺄르르 웃었다.
-그럼, 나와의 맹약도 잊지 않았겠네!
-……뭘 원하지?
루의 물음에 그레데엘므가 백금빛 눈동자를 동그랗게 떴다.
-애송아, 너, 알고 있잖아.
음습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순진무구하게.
-내가 뭘 원하는지. 네가 뭘 해야 하는지.
-…….
-나, 심심해.
그는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심심하다고.
그러니 오래전 약속했던 비극을 보여 달라고.
그 비극은 그레데엘므 만큼이나 루가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왜?”
숨소리에 섞인 물음은 너무나 희미했다.
하지만 루는 한 번도 그 목소리를 놓친 적이 없었다.
상념에서 깨어난 루가 아래로 향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는 말없이 차가운 손을 뻗었다. 푸른 보석을 두른 제인의 목덜미를 가볍게 쥐었다.
그가 대답했다.
“그냥.”
제인은 그를 보았다.
웃고 있는 그를.
죄 없는 인간 하나를 ‘그냥’ 죽였다고 말하는, 그러면서 입꼬리에 문 미소가 허무할 정도로 어딘가 텅 빈 그를.
제인의 심장은 바닥을 찧듯 내려앉았다.
머릿속에는 라트올이 했던 말들이 웅웅 울려 퍼졌다.
-루의 잔악함에는 항상 이유가 있어요.
그리고 뒤에 스치듯 했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드물게 예외가 있긴 하지만…….
루는 그녀의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갔음을 눈치챘다. 그건 루에게 유쾌한 일이 아니었기에, 그녀의 목덜미를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아프지 않게. 하지만 제게 집중할 수 있을 만큼.
그러자 제인의 시선이 다시 루에게 닿았다.
루가 말했다.
“그자는 나의 불행을 바라고, 지금 난 그자의 바람대로 매우 불행해.”
“…….”
“그자가 만든 사랑의 묘약은 마음을 구속하는 저주지. 그의 저주로 사랑에 빠진 인간이 자기가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결말은 둘 중 하나야.”
“…….”
“천천히 미쳐가던가, 혹은.”
그의 목소리가 달콤했다.
귀가 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당장 죽어버리던가.”
제인의 고개는 여전히 아래를 향한 채 허리만 꼿꼿하게 세워졌다. 그러자 그녀의 목을 쥐고 있던 손이 자연스레 풀어졌다.
손의 주인은 그녀와 멀어지는 게 내키지 않는 듯, 상체를 일으키며 다가갔다.
잔인하리만큼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랑하는데도 그 사랑을 믿을 수가 없어서.”
이번에는 제인이 한 손으로 그의 목을 쥐었다. 굵은 목이 한 손에 담기지도 않아서 쥐었다는 표현보다는 만지는 모양새에 가까웠다.
“어떡하지? 이런 걸로는…….”
그녀는 보란 듯이 루의 어깨에 입을 맞추며 말을 끝맺었다.
“원망이 들지 않는데.”
제인이 고개를 들었다.
흔들리는 푸름과는 달리, 잿빛 눈동자는 또렷하기만 했다.
“정말, 조금도.”
순간적으로 루의 내면에 어떤 충동이 일었다.
제인의 품속 가장 깊은 곳에 저를 밀어 넣고 싶은, 그렇게 집어삼키고 싶은, 하지만 오히려 온몸을 쥐고 놓아주고 싶지 않은 욕구에 자신이 삼켜지는 것 같았다.
그가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이어서 정돈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충동을 억누르고자 무의식적으로 손에 힘을 주었다. 제인의 손목 부근은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질려갔다.
제인은 마비력을 끌어 올린 상태였기에 신체적으로는 고통스럽지 않았으나, 소리 없이 괴로워하는 그의 모습에 심장이 욱신거렸다.
“……이렇게 안 잡아도 되는데.”
푸른 시선이 그녀의 눈짓을 따라갔다.
그리고 하얗게 질려서 피가 돌지 않는 손목에 닿았다.
“어디 안 갈 거니까.”
고작 그 한마디에 거짓말처럼 손의 힘이 풀어졌다. 잡혀있던 손목 주변에 고여있던 피가 빠르게 몰려들어서 다시 혈색을 띠었다.
“그래서.”
제인이 물었다.
“그 사랑의 묘약이라는 거, 정확히 뭐야? 뭐로 만들어진 건데?”
루는 조금 멍했다.
원치 않는 사랑에 빠진 인간이 미쳐버릴지도 모를 운명 앞에 서게 되었다. 가장 먼저 하리라 생각했던 건 원망이었다.
하지만 제인은 원망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 말대로, 조금도.
루가 말없이 눈만 깜빡거리자 제인이 “루.” 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심지어 그녀의 부름에는 그를 향한 미약한 걱정까지 묻어 있었다.
루가 소리 없이 웃었다.
지금까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느슨한 미소였으나 분명 다른 감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공허한 이유도, 공허를 채우는 방법도 알 수 없었던 오래전과 다름없이.
오래된 시간만큼 그는 본능과도 같은 현혹을 인내해온 데시안이었다. 그러니 드러내고 싶지 않은 감정을 미소 뒤에 숨기는 일은 무척 쉬웠다.
지금의 웃음처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상당수의 감정은…… 사랑의 파편이지.”
그의 시선이 옭아매듯 제인을 바라보았다.
“이를테면 애증, 질투, 미움, 그리움, 애틋함, 그리고 연민까지. 사랑의 파편은 깨져버린 유리 조각처럼 헤아릴 수없이 많아.”
루의 다정한 음성이 이어졌다.
“그자는 인간이 가진 파편을 건드린 거야. 제아무리 작디작은 파편 일지라도 인간의 내면을 완전히 망가뜨릴 힘을 가지고 있으니.”
비단 인간뿐일까.
그자는 세상에서 파괴하지 못할 게 없다는 걸 루는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제인이 다시 한번 더 자기 손목을 들어서 향을 맡았다.
한참을 가만히 향을 맡던 그녀가 물었다.
“저주에서 풀려나는 방법은?”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
“한 치의 의심 없이.”
“…….”
“하지만 그건 불가능에 가깝지. 묘약의 저주는 어디서부터 묘약의 저주고,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매 순간 의심하게 만들 테니까.”
루가 제인의 손을 잡았다.
늘 그렇듯 거칠고 따뜻한 손이었다.
“그렇게 사랑을 의심하는 것. 그런데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 그로 인해 천천히 미쳐버리거나 당장 죽어버리는 것.”
“…….”
“바로 그게, 그자가 만든 묘약의 저주야.”
말을 마쳤을 때, 루의 입가에 진득한 호선이 걸렸다. 도무지 다듬어지지 않는 분노가 그레데엘므의 잔상을 더욱 또렷하게 그려냈다.
그는 며칠 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레데엘므가 이런 짓거리를 한 이유에 대해.
이유는 차고 넘쳤다.
하지만 모든 이유를 단숨에 짓밟아 버릴 만큼 그레데엘므는 루가 보여주는 비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면 원하는 결말을 눈앞에 갖다 바쳐 줄 텐데, 왜 그랬을까.
곧이어 수없이 많은 이유가 떨어져 나가고 딱 하나만 남았다.
루의 턱 근육이 뭉근하게 움직였다.
그는 그레데엘므의 잔상을 떨쳐내듯 고개를 들어서 제인을 보았다. 그녀에게서 흘러넘치는 사랑과 두려움 중에서 오직 두려움만이 눈에 담겼다.
데시안의 눈은 그런 것이다.
어둡고 음습한 감정만을 볼 수 있고, 맡을 수 있다. 그 빈틈을 파고들어 간교하게 움직이는 게 데시안의 본능이었으니.
루는 늘 그랬듯, 그 본능을 억눌렀다.
그사이 제인은 얼굴을 스치는 한기에 어깨를 떨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루가 뺨을 만지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저를 향한 그의 시선이 무엇보다 세밀하다는걸.
제인은 얼굴을 삐딱하게 기울이며 루의 손을 떨어뜨렸다.
“……호엘리반과는.”
그녀는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벌리듯이 물었다.
“어떤 사이야?”
루는 제인의 의도를 묻지 않고 순순히 대답했다.
“잠든 나를 깨워주었지.”
제인은 할 말이 없어졌다. 얕지 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너한테 특별한 사람이겠네.”
“그럴 리가.”
“아니야……?”
루의 눈과 입술이 반듯하게 휘어졌다.
“그래. 호엘리반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야.”
제인이 어쩌면 데시안이 거짓말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루의 차가운 손가락이 다시 제인에게 닿았다.
“그 녀석은 길가에 차이는 돌멩이 정도쯤 되려나.”
“…….”
“그만큼 아무것도 아니야.”
“…….”
“내게 의미 있는 건, 오직…….”
그의 손가락이 제인의 이마에서부터 미간, 콧대, 코끝, 입술까지 닿을 듯 말 듯 건드리다가 이전처럼 뺨을 만졌다.
다정한 눈을 하고서.
“너 하나야, 제인.”
제인은 그런 루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왜…….
“왜 나한테 일부러 상처 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