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63)화 (63/168)

63.

“응?”

“요즘 배우는 거예요.”

밀리타는 제인의 그림자 끝을 살살 긁어서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떼어냈다.

제인은 짐짓 놀란 눈으로 그녀와 끝이 검은 융단처럼 팔락거리는 그림자를 번갈아 보았다.

“와……!”

“연습하면 눈으로만 보고도 뗄 수도 있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있대요. 제가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서 숨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어요. 신기하죠?”

제인이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정말 마법 같네.”

밀리타가 킬킬 웃었다.

“마법이니까요. 프시오에게 당신이 배우는 건 치유마법이라고 들었어요. 맞아요?”

“……맞을걸?”

체감상 고문이지만.

제인은 어떤 식으로 가르침을 받고 있는지 대강 말해주었다.

밀리타는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얼굴로 제인의 팔을 잡고 엄지로 지그시 눌렀다. 매끈하게 자리잡힌 근육의 탄성이 느껴졌다.

제인도 자연스럽게 가까워진 밀라타의 드러난 몸에 눈길이 갔다. 칼자국처럼 보이는 크고 작은 흉터들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언제부터 배운 거야?”

“……열 살쯤부터 카이에게 배웠으니까, 벌써 십 년도 더 넘었네요.”

“어린애가 어린애를 가르쳤네.”

“맞아요. 카이는 개인 교습받은 다음 날이면 항상 제가 있는 보육원으로 와서 그대로 가르쳐 주곤 했어요.”

제인은 밀리타의 말을 듣자니 팔불출처럼 세실에 대한 자랑을 늘려 놓던 프시오가 생각났다.

“카이는 항상 저보다 앞서 있었어요. 따라잡았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멀리 가 있었죠. 한 번도 검으로 이겨본 적이 없어요.”

밀리타는 제 팔등에 난 흉터를 보며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악착같이 연습하고 또 연습했어요.”

“왜 그렇게까지?”

“……죽이고 싶어서요.”

밀리타가 작게 미소 지었다.

“카이를.”

제인은 반 박자 느리게 말하면서 피식 웃었다.

“농담도.”

“……농담 아닌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밀리타의 시선이 제인에게 고정되었다.

“당신과 한 약속 때문에 못 죽이게 생겼지만요.”

제인은 그녀의 시선을 온전히 받아 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핑계는.”

밀리타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이어지는 목소리는 제인의 것이었다.

“죽이려고 했다면 벌써 죽였겠지. 나나 너나 칼에 독을 찔끔 묻히면 그만이잖아. 스치기만 해도 목숨을 잃을만한 독은 우리가 아는 것만 수십 가지니까.”

밀리타는 말이 없었다.

“거기에다, 넌 살인을 싫어해.”

제인은 밀리타를 물끄러미 보았다.

골목길에서 앙디스인을 죽이던 그녀를 떠올리며.

당시 제인은 이상한 이질감을 느꼈다.

리졸브는 조금만 베이며 스쳐도 빠르게 몸에 퍼지면서 목숨을 잃는 맹독이었다. 살육에 미치지 않고서야 그렇게 찍어 누르듯이 칼을 휘두를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때 밀리타는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향하는 건 죽어가는 눈앞의 시체들이 아닌 그녀 자신이었다. 자신에게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새기는 것 같았다.

‘이 순간을 잊지 마.’

그러니 제인은 밀리타의 말이 의아했다.

“죽일 생각도 없으면서 왜 그렇게 말하는 거야?”

밀리타는 한참 이어지던 정적을 깨뜨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미워서요.”

그녀의 시선이 위층에서 씻고 내려온 카이에게 향해 있었다.

“죽이고 싶을 만큼.”

그는 얕은 한숨을 쉬더니 부엌으로 들어가 물 한잔을 마셨다.

조용히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제인은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 * *

그날 밤.

지하 작업실에서 라트올은 루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제가 그 말 엄청나게 싫어하거든요. 입장 바꿔서 생각해보라는 말요. 그렇게 생각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요. 어차피 바뀌지도 않을 건데.”

“…….”

“그런데 진짜로 입장이 바뀐다? 그건 또 얘기가 달라지거든요.”

루가 미소를 벗겨낸 얼굴로 서늘하게 말했다.

“얼마만큼 기어오를 거지.”

라트올은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 않은 주인님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식탐은 탐욕이자 욕구다.

데시안에게 욕구가 일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신경과민에 가까운 현상이다. 예민한 기운이 주변을 감싸도록 만든다.

폭풍전야인 데시안과 생활하길 일주일째.

라트올은 드디어 공손하게 까부는 법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기어오르다니요. 보세요. 저 지금 무릎 꿇고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죄송한데, 조금만 더 얘기해도 될까요?”

“사족이 길어.”

라트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만큼 에둘렀으면 됐다.

“정작 제인이 피하니까, 기분이 어떠세요?”

루의 침묵에 라트올이 얼른 이어서 말했다.

“무화과같이 심심한 과일 안 좋아하시잖아요. 제인 취향이죠? 시장을 다 뒤졌는데도 없더라고요. 아쉬운 대로 무화과잼이랑 치즈, 식빵 전부 사뒀으니까 데리고 와서 같이 드세요.”

“…….”

“아니면 제가 데려와요?”

“네가…….”

푸른 시선이 느릿하게 라트올에게 닿았다.

이어서 몹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고작 왜, 라는 물음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라트올은 섬뜩함에 몸을 떨었다. 그의 물음에는 어떠한 살기도, 분노도 없었음에도 그를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공포로 내몰았다.

그 순간 라트올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루는 욕구가 일지 않았던 게 아니다.

오히려 주체할 수 없는 욕구를 억누르고 있던 것이다. 현혹이라는 본능을 오랫동안 인내하고 있던 것처럼.

라트올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오한에 바르르 떨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그를 잠깐 보던 루는 아무 관심도 없는 듯 시선을 거두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의 귓가에 제인의 목소리가 꽂혔다.

‘이리 와.’

* * *

-데시안과 계약한 인간은 그 데시안을 부를 수 있어. 부르는 방법은 간단해. 네가 나를 간절히 생각하면 돼.

루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네르기니에서 세실에게 마나를 조절하는 법을 익힐 때, 제인은 본능적으로 루를 떠올렸었다. 그때 어렴풋이 짐작했다.

내가 불러서 온 거구나.

그래서 이번에는 그가 알려준 대로 의도적으로 간절히 생각했다.

그랬더니.

“와. 정말 왔네?”

모두가 잠든 자정.

옥상 난간에 앉아있던 제인이 루를 향해 웃었다.

전혀 기쁘지 않은 얼굴로.

인간의 마음은 흐르는 물과 같다. 그래서 다잡고 또 다잡아도 물살에 이겨내지 못하고 쓸려가 버린다. 루가 제인을 찾기도 전에 그에게로 흘러가는 마음을 이겨내지 못하고 이렇게 불러냈듯이.

한편, 루는 무감한 표정으로 제인을 물끄러미 보았다.

부르라고 알려주긴 했으나 불러낸 타이밍도, 어휘도 무엇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동의 문을 연 그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들어가. 네 발로 직접.

낮은 음성이 들리는 태도였다.

그러자 셀 수 없는 감정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그녀 안에서 휘몰아쳤다. 그녀는 문득 궁금했다. 사람이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이 대체 몇 개나 되는 걸까.

이어서 루를 보며 생각했다.

가기 싫다. 그런데 가고 싶어. 내가 원하는 건 뭐지?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원하는 건…….

숨 쉬는 것도 잊은 사람처럼 앉아있던 제인은 어둠 속에서 가장 빛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가 데리러 와.

나를 원하는 네 모습을 보여줘.

“내 강아지가…….”

걸어온 루가 제인의 무릎 사이로 손을 넣으며 가볍게 안아 들었다. 빛이 알알이 박힌 아득한 밤하늘 아래, 제인의 은발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부드럽게 섞였다.

“짖지 않고 애원하는 법을 배웠군.”

제인은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그의 온도와 살결, 냄새가 좋았다.

끔찍할 정도로.

둘은 이동의 문을 통해서 곧바로 침실로 왔다. 제인을 안은 루는 그대로 침대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그의 위에 올라탄 제인은 아득한 푸른 눈을 보았다.

“이건 정말 개 같은 일인데, 루.”

그리고 전보다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네가 행복하면 난 더 행복하고, 네가 애달프면 난 죽을 만큼 더 애달파.”

그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미친 게 아닐까.”

루는 나직하게 웃었다.

찢어발기고 싶은 그레데엘므의 낭창한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마력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가 물었다.

“식사는.”

“…….”

제인이 대답이 없자, 루가 같은 어조로 재차 물었다.

“식사는.”

“했어. 안 먹어도 돼.”

제인도 일주일 내내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내일부터는 같이 먹어, 저녁.”

그가 입꼬리를 위로 끌어 올리며 의미 모를 말을 했다.

“앞으로 네가 나와 식사를 같이 할까 싶은데.”

“……나랑 밥 먹기 싫어?”

“아니.”

그가 다정하게 말했다.

“네가 싫을걸.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를 들으면.”

* * *

제인은 손목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다.

석양.

붉은 정원의 수레바퀴.

며칠 전, 향수 가게에서 뿌렸던 그 향이 아직도 나고 있었다.

향은 손목에 코를 밀착시키면 진하게 풍겨 나왔고 코를 떼면 맡을 수 없었다. 그러니 지금껏 몰랐던 것이었다.

루는 그 향수가 사랑의 묘약이라 불리는 저주라고 말해주었다.

제인은 머리가 아찔했다.

로안나가 걸린 저주와 같은 저주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묘약은…….”

제인의 입가에 황당한 웃음이 실렸다.

“보통 복용하는 걸로 만들지 않아?”

“상식적으로는 그렇지.”

이어지는 말에 제인은 공기가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그런데 제조한 이가 상식 밖의 인물이라.”

제인은 무거워지는 공기가 루의 마력 때문이라는 걸 알아챘다. 본능적으로 마비력을 올리자 숨 쉬는 게 전처럼 편해졌다.

“네게 묘약의 저주를 건 자는 타락한 르젤.”

단번에 알아듣기 힘든 명칭에 제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타락한 천사.”

“……그레데엘므?”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제인은 한 번 더 마비력을 더욱 끌어 올렸다. 호흡이 이전처럼 편안해졌다. 그녀는 지금까지 고문과 다를 바 없이 수련시켜 준 세실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맞나보네.”

“…….”

“천사처럼 생겨서 악마 같다고 생각했는데.”

루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겠지.

그자는 천계의 르젤이었고 지금은 데시안과 다름없으니.

“그런데, 제인.”

그가 잠깐의 정적을 꿰다가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자를 어디서 어떻게 만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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