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그렇게 며칠 내내 세실이 내준 숙제에만 매달렸던 제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었다. 불행히도 숙제를 깔끔하게 끝내버린 탓이었다.
짧게 욕지거리를 뱉은 제인이 핍을 불렀다.
널브러져 있던 종이에 거칠게 휘갈겨 적은 후 다리에 묶어 주었다.
[루가 날 피하는 이유, 뭐예요? 당신은 알고 있죠?]
제인의 쪽지를 받은 라트올은 자신의 복슬복슬한 복숭아색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조용히 괴로워했다.
그의 몰골은 며칠 새 부쩍 퀭해져 있었다.
루가 멀쩡하게 복구한 본채를 놔두고 별채에서 지내고 있던 터라, 라트올은 라트올 대로 피가 말라서 죽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루는 작업도 미루지 않았으며 명계에 갈 물량을 직접 확인하는 연장근무까지 해댔다.
늘 권태로웠던 그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루는 빌다시피 말했다.
-루, 제발 그러지 마세요……. 무서워 죽겠다고요! 앞으로 잔소리 안 하……는 건 어렵고요……, 줄일게요! 안 까불게요!
하지만 루는 라트올을 바짝 말려 죽일 기세로 눈도 깜짝하지 않고 일 얘기만 했다.
-이번 명계 납품은 내가 직접 하지.
라트올은 졸도하기 직전이었다.
아름답지 않은 곳에는 발도 붙이지 않는다는 말도 안 되는 신념으로 이날 이때까지 명계에는 눈도 돌리지 않던 주인님이었다.
-이렇게는 못 살아요. 차라리 절 죽여요!
루는 라트올을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농담 같은 말을 똑같이 했다.
-아름다운 것들은 함부로 죽으면 안 돼.
-…….
-그자를 제외하고.
그자.
필시 그레데엘므이리라.
지금의 그레데엘므는 비록 타락했으나, 천계의 르젤이었던 시절에는 신과 비등했을 만큼 가히 압도적인 존재였다.
그런 자를 고작 4세기밖에 살지 않은, 그것도 1세기는 그자에게 봉인되었던 데시안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라트올은 암담한 심경으로 고래 싸움에 터지는 새우의 처지가 자기보다 더 낫겠다고 생각하며 며칠 새 푸석해진 얼굴을 벅벅 쓸어내렸다.
이어서 최후의 보루를 꺼내는 심정으로 제인의 쪽지에 답장을 써서 날려 보냈다.
* * *
세실은 소파에 앉아서 제인의 숙제를 유심히 읽었다. 마지막 장까지 꼼꼼히 확인하고는 스무 장의 종이 뭉치를 테이블 위로 무심하게 던졌다.
“나쁘지 않네.”
제인이 퉁명스레 물었다.
“뭐가요.”
“머리가.”
세실은 겉으로는 무심하게 말했으나 내심 놀랐다.
한 달 만에 해올 줄이야.
세실이 제인에게 내준 숙제는 치유마법 입문 강의 1년 치 수업량이었다. 그걸 한 달 만에, 심지어 어디 하나 모자라거나 과한데 없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왔다.
요약이란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고 요점을 파악해야 가능하므로 제인은 머리가 좋은 편이 확실했다.
“그거 칭찬이죠?”
제인이 바닥에 앉아서 세실을 올려다보았다.
“칭찬 좀 해줄래요.”
“이유나 알자.”
세실의 말에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칭찬받을 만하니까?”
“…….”
“이것보다 어떻게 더 잘해요?”
“……내 질문이 친절하지 않았네.”
세실이 새삼스레 물었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는 이유가 뭐니?”
제인은 그녀의 질문이 무척 낯설었다.
하임을 따라 페브리아 궁정에 입궁했을 때부터 하루도 열심히 살지 않은 날이 없었다. 가문도, 가족도 없는 그녀는 그렇게 해야만 그곳에 있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그러니 애쓰고, 노력하고, 열심히 하는 건 제인에게 마땅한 일이었다.
그게 무엇이든.
그러다 문득, 세실이 제게 제자가 되고 싶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법을 배우고 싶다고 했을 때 처음부터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곧바로 수수께끼 같은 시험문제를 내주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생각했다.
프시오가 내 얘기를 했었구나.
제인이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강해지고 싶어요.”
숨을 고른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
“약해빠진 제가 싫어요. 적어도 사는 동안은 빌빌거리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언젠가, 저도 강해질 수 있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
“그 말을 들으니까…….”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제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다른 세상이 열리는 기분이었어요. 가보고 싶어요. 그 세상으로. 약하지 않은 나로 살아가는 세상으로요.”
세실은 모호한 얼굴로 제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론은 저 정도면 됐고.”
세실이 탁자에 올려둔 종이 뭉치를 보며 자기 할 말만 하자 제인은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이내 두 팔을 벌리고서 바닥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와. 결국 칭찬 안 해주는 것 봐. 대답만 홀랑 듣고! 사기꾼!”
“똑바로 앉아. 오늘은 네가 가진 1할의 회복력을 어떻게 쓰는지 알려줄 테니까.”
세실은 소파에서 일어나면서 제인의 옆구리를 발로 퍽 찼다.
“악.”
“스승한테 사기꾼이라니, 쥐어패 버릴라.”
이 여자가 진짜, 패 버릴라는 무슨!
“팼으면서!”
* * *
제인이 수련하러 간 사이, 라트올은 별채 끝방에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루는 누워서 시집을 읽고 있었다.
“장 보러 갈 건데, 뭐 사다 드려요……?”
라트올이나 루나 뭘 먹지 않아도 죽지 않는다. 다만 식욕은 존재한다. 심신이 온전치 않을 땐 그마저도 사라져 버릴 때가 있었다. 좋지 않은 신호였다.
라트올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는 말없이 시집을 넘겨 읽었다.
얕은 한숨을 내쉰 라트올이 조곤조곤 말했다.
“요즘 저녁 안 드시는 건 아는데요. 생각나는 거라도 말해주면 사 올게요.”
“무화과.”
“……그건 이제 겨울이라서 안 나올 텐데.”
“그럼 말고.”
라트올은 머리가 아팠다.
그는 메 데시안 중에서도 상당히 강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마석을 다루는 일에 한정된 힘이었다.
계절을 넘나들 정도의 마력을 지니지 못한 그는 언제까지 이렇게 조마조마하게 지내야 하나, 생각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조금만 건방지게 굴어도 돼요?”
“…….”
“진짜 조금요.”
“…….”
“제인한테 말해줘야 하지 않아요? 본인 상태를 당신이 아니라 그자를 통해서 듣게 되면 나중에는 오해가 더 깊어질 텐데요.”
“……4세기를 살았는데도 모르는 게 있어.”
루는 펼친 시집을 그대로 얼굴에 덮어 버렸다. 그리고 같은 말을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모르는 게 있어. 모르는 게…….”
라트올에게 루는 주인님이었다.
그는 주인님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를 위해서 죽으라면 죽을 것이고 누군가를 죽이라면 죽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과의 교감에 관련된 문제는 라트올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게 사랑이라면 더더욱. 사랑이 무엇인지는 메 데시안인 그 역시 잘 알지 못했으므로.
다만, 한 가지.
제인이 그의 눈에서 보이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 * *
사막, 프시오의 집 옥상.
제인은 프시오의 집 옥상에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얼빠진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밀리타와 카이는 검을 들고 칼춤을 추듯 거울을 갖다 놓은 것처럼 몸을 비슷하게 움직였다. 갈대처럼 부드러우면서도 결정적인 찰나에는 활처럼 쏘아 올리듯, 상대방을 파고들면서 공격과 방어를 이어갔다.
둘의 차이점이라면 카이의 힘이 더 압도적이라는 거였다. 어느 순간부터 밀리타가 살짝 밀리는가 싶더니 곧이어 그녀의 검이 옆으로 날아가서 꽂혔다.
카이가 검을 정리하며 말했다.
“막지 말고 피했어야 했어.”
“못 피해서 막은 거거든?”
함께 검을 정리하면서 밀리타가 말하자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막지도 못하고 피하지도 못한 거네.”
그의 말에 밀리타는 말없이 후후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이내 입술을 작게 벙긋거렸는데 아무래도 손이고 입이고 모두 욕을 하는 듯싶었다.
곧이어 검을 다 챙긴 밀리타는 제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내려가요. 더 있으면 감기 걸려요.”
밀리타의 말과는 달리 프시오의 집은 결계 덕분에 춥지 않았다.
그러나 제인은 별말 없이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서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대련을 마친 두 사람이 각각 다른 층에서 씻는 사이, 그녀는 소파에 앉아서 석양이 지는 사막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인은 라트올이 보내준 답장을 떠올렸다.
[제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에요. 이 집에서 나가세요. 그리고 루가 당신을 찾을 때까지 들어오지 마세요.]
제인은 그 쪽지를 보고 조금 웃었다.
루가 자신을 찾는 게 더 빠를지, 아니면 그를 보고파 하는 마음에 제 심장이 남아나지 않는 게 더 빠를지 의문이 들었다.
제인은 잡념을 지워내고 라트올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루가 자신을 피하는 게 일 분 일 초마다 체감되는 그의 집을, 그녀도 떠나있고 싶었다.
어디로 갈까.
그러다 생각난 게 프시오의 사막 집이었다.
핍을 통해 밀리타와 종종 안부를 주고받던 제인은 그녀가 카이와 함께 사막의 집에서 지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라트올의 말대로 집을 나가자고 결심했을 때, 이곳만큼 적절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후, 씻고 나온 밀리타가 젖은 머리를 하고서 곁에 앉았다.
제인이 물었다.
“일 구했다며?”
“네. 프시오가 저랑 카이에게 마탑에서 검술 가르치는 일을 소개해 줬어요. 일단 집은 해결됐지만, 생활비는 필요하니까요.”
“그렇구나.”
밀리타와 달리 제인은 당장 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딱히 돈을 쓸 일이 없었다.
루가 자신을 피하기 전까지만 해도 안락한 집과 풍족한 먹을거리, 입을 일 없는 드레스가 반 이상이긴 해도 넘쳐나는 옷가지가 있었다.
한 번은 이러다 태만해질 것 같다고 걱정하자 루는 기뻐하며 그녀를 안아주었다.
-훌륭해.
그건 정말로 이상한 칭찬이었다.
불현듯 제인의 심장이 욱신거리며 조여왔다. 루를 생각할 때면 따라오는 통증은 어떠한 맹독보다 견디기 어려웠다.
제인이 얕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을 때였다. 그녀의 표정을 물끄러미 보던 밀리타가 살짝 웃으며 말을 걸었다.
“제인, 재미있는 거 보여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