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61)화 (61/168)

61.

“마음이 감당이 안 돼요.”

이어서 무작정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너무 좋고, 너무 무서워요.”

“…….”

“행복한데요. 버거워요.”

“…….”

“같이 있고 싶은데, 같이 있는 게 벅차요. 마음은 왜 마비가 안 돼요? 왜 그래요?”

제인은 오늘 아침을 떠올렸다.

눈을 뜨자마자 잠든 그를 보는 순간 주체할 수 없는 감정들이 집어삼킬 듯한 파도처럼 몰려왔다.

그와 몸을 섞은 어젯밤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가도, 그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정신을 못 차릴 만큼 행복했고 무서웠다.

그녀로서는 소화하기 버겁고 갑작스러운 감정이었다.

“그건 불가항력이니까.”

세실은 제인의 얼굴 위로 눈물 자국이 번져가는 수건을 거둬내고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사랑은 신이 인간에게 준 축복이거든.”

“축복이 뭐가 이래요.”

작게 중얼거리며 어기적어기적 상체를 일으킨 제인이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물기 어린 음성이 그대로 세실의 무릎에 전해졌다.

“마음이 마음대로 안 돼서 답답해 죽겠는데 뭐가 축복이라는 거예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무서워요. 너무 좋아서 무서워요.”

그러다 돌연 고개를 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게다가 사백 살이래요. 미친 거 아니에요?”

“…….”

“사백 살이면 페브리아 중정에 있던 고목이랑 나이가 비슷하다고요.”

세실은 조용히 그녀의 뒤통수를 눌러서 다시 자기 무릎에 얼굴을 묻게 했다.

“친구 하라고 해.”

* * *

이제 막 회의를 마치고 온 호엘리반은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라트올에게 물었다. 조소 띤 얼굴로.

“당신은 제가 수리공으로 보여요?”

소파에서 일어난 라트올이 불안한 기색으로 한 바퀴 빙 돌았다. 이내 두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다가 구불구불한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수리공은 오면 죽어.”

“…….”

“오자마자 죽을 거라고. 폐가 터져서! 난 인간이 죽든 말든 관심 없지만, 내 구역에 시체가 널브러지는 건 사양이야.”

그가 호엘리반을 향해 말했다.

“지금 거기서 목숨 부지하고 원상복구 할 수 있는 건 지금 너 말곤 없어.”

눈치 빠른 호엘리반은 루가 몹시 노여운 상태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해되지 않았다.

“뭘 어떻게 깨부쉈다는 거예요? 물건 던지면서 화내는 타입 아니잖아요.”

“어, 그럴 타입 아니지.”

라트올은 실금이 간 무테안경을 벗어서 호엘리반의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가끔 마력을 주체 못 해서 그렇지.”

호엘리반은 라트올의 안경알에 그어진 실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아는 루는 여간해서는 화를 내는 성정이 아니었다.

어떤 일이든 태연자약한 편이었고, 뭔가 마음에 안 들면 빈정거리면서 상대방 속을 뒤집어 놓을 뿐이었다.

그러나 한 번 분개 하면 숨통이 막힐 정도로 마력을 발산했다. 위협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가지고 있는 마력이 제어가 안 되는 거였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호엘리반이 연금술로 안경을 복구하면서 묻자 라트올은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그레데엘므가 제인에게 접근한 모양이야.”

호엘리반은 손에 쥐고 있던 라트올의 안경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자를 직접 만난 적은 없으나, 루에게 그자가 어떤 의미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름 자체만으로 루 앞에서는 금기어였으므로.

뽀-득, 뽀-득.

당겨 잡은 소매로 완벽하게 복구된 창문을 닦던 라트올이 뒤돌아서 소파에 앉아있는 호엘리반을 척하니 가리켰다.

“나는 너 재수 없어.”

호엘리반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거실 소파에 느른하게 기대어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라트올이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그건 네가 잘나서 재수 없는 거야. 이렇게까지 잘났는데 당연히 재수 없지. 장담하는데 아마 넌 평생 재수 없을 거야.”

“……머리 울려요. 조용히 할 수 없어요?”

호엘리반이 피로감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으나 라트올은 그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복구된 부엌 식기들을 보며 연신 감탄했다.

“진짜 재수 없다니까. 어떻게 이렇게 말끔하게 복원했지?”

인간인 호엘리반의 눈에 띄지 않게 여기저기 둘러보던 데코토들도 구석에 숨어서 경외심 가득한 초롱초롱한 눈으로 호엘리반을 향해 손뼉을 쳤다.

그에 반해 호엘리반은 피곤한 기색으로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유리 조각들은 박살 난 게 아니라 아예 가루가 되어 있었다. 유릿가루를 단시간에 완벽하게 복원하느라 진이 빠질 대로 빠진 상태였다.

“유리로 된 건 죄다 보호 마법까지 걸어놨어요. 다음부터 분은 밖에서 삭이게 하세요. 두 번 다시는 이런 일로 안 와요.”

“나도 그러고 싶지! 그런데 진짜로 전혀 내 말을 들을 상태가 아니었다니까. 눈이 뒤집혀서 뭐 하나는 잡아서 족칠 기세였어.”

호엘리반이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그 ‘뭐 하나’가 당신이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요.”

실로 ‘그 뭐 하나’가 될 뻔했던 라트올은 그저 헛웃음만 지었다. 아침의 일이 다시 생각나는지 몸을 부르르 떨고 루의 침실을 노크했다.

침실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문을 열자 루는 테이블에 발을 올려두고 의자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나와서 호엘리반에게 마음에 없는 칭찬이라도 해주세요. 그리고 전 오늘 당신이랑 일 못 해요. 안 해요. 별채에서 쉴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루는 대답이 없었다.

라트올은 속이 터진다는 표정으로 한마디를 더 했다.

“제인이 있을 때는 마력 조절하세요, 제발요. 데코토들도 시체는 못 치워요. 제가 정말로…… 당신 생각해서 하는 말이에요.”

고요한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으면서 비틀렸다. 루의 저기압에 라트올은 흠칫거리다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라트올의 평화로운 일상이 끝나버린 순간이었다.

* * *

꿈인가?

수련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제인은 눈앞의 광경을 도무지 현실감 있게 바라보지 못했다.

호엘리반이 거실 소파에 쓰러지듯 누워있었고 루는 그의 턱을 잡아 입을 맞추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무척 야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제인은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그 장면을 무표정하게 목도 하다가 욕실로 몸을 돌렸다.

“실례.”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면서.

제인이 욕실로 들어가자 호엘리반은 그 자세 그대로 미소를 지었다.

“……수리공으로 온 줄 알았는데.”

이어서 작게 속삭였다.

“치정 역할이었나 봐요.”

“원한다면 계속할 수도 있고.”

호엘리반은 웃음이 다 나왔다. 말과는 다르게 그는 조금도 흥이 돋지 않은 눈이었다.

“아쉽게도 제가 원하는 상대는 따로 있어서 말이죠. 게다가…….”

그가 닫힌 욕실 문을 흘깃거렸다.

“악의적인 고의가 목적인 상황에서 재미 보는 편도 아니라서요.”

“…….”

이어서 그대로 주먹을 쥐고 천천히 루의 상체를 밀어냈다.

“사람 홀리지 마세요.”

루가 짧게 혀를 차며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욕실에서 쿠당탕 걸어 나온 제인이 루의 손목을 낚아채듯 잡고 그를 노려보았다.

“실례는 무슨.”

루 역시 제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호엘리반은 그 가운데에서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수리공에 치정 역할도 했는데 이번에는 어떤 걸로 변신해야 하나.

짤막하게 고민하던 호엘리반은 순식간에 부엉이의 모습을 하고서 덜 닫힌 창문 틈으로 날아가 버렸다.

호엘리반이 떠난 자리는 완벽한 정적으로 이어졌다.

제인은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그가 현혹의 데시안이라는 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타고나길 색정적인 것 또한 그러했다.

하지만 그가 다른 누군가를 만지는 걸 직접 본 건 처음이었다.

질척한 감정들이 엉망으로 들끓었다.

개중 두드러지는 건 분노였다. 출렁이는 분노는 툭 치면 흘러넘칠 것처럼 주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알고 있었는데.

자신을 향한 다정한 손길과 눈빛에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쯤, 다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 왜. 어째서.

제인이 불현듯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손목을 더 세게 쥐었다.

“아무나 만지지 마.”

시계 초침 소리가 울릴 정도로 조용했다.

그녀는 세상에 이보다 더 끔찍한 침묵이 있을까 싶었다.

동시에 심장에 이어진 핏줄 몇 개가 끊어진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아플 리가 없었다.

잠시.

아주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의 손목을 깨물었다.

“나만 만져.”

목구멍을 막고 있던 말을 터트리자 한결 살 것 같았다. 숨통이 트이는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지.”

저보다 훨씬 더 화가 나 있는 그의 표정이.

초조하고 불안한 눈동자가.

땀에 젖은 그녀의 상의를 벗기는 손의 떨림이 뒤늦게 보였다. 무게감 있는 옷이 아래로 툭 떨어지면서 제인의 목덜미를 느슨하게 물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 * *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제인은 세실이 내준 숙제를 미친 듯이 했다.

베개로 쓰기 딱 좋은 두께로 스무 권이 넘는 책들을 주면서 한 달 안에 읽고 요약해오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속으로 오만가지 욕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 제인은 세실에게 무한한 감사와 찬사를 보내고 싶었다.

이렇게 집중할 거리라도 없었다면 벌써 돌아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일주일 내내 수십, 수백 번도 넘게 했으니까.

그날 그 사건 이후로 루는 제인을 열심히 피해 다녔다.

침실에는 발도 들이지 않았으며 저녁도 같이 먹지 않고 식탁 위에 덩그러니 차려놓기만 했다.

제인은 애가 타서 죽을 지경이었다.

보고 싶었다.

안고 싶고, 만지고 싶었다.

종일 루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차라리 누가 뒤통수를 박살 나도록 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제인은 생각했다.

만약 이 마음이 사랑이라면, 그건 저주의 또 다른 이름이 분명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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