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카샤가 무겁게 입술을 뗐다.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어.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냥 돌아가. 난 너 혼자 여기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게 눈에 밟혀서 온 거야.”
“날 위해서구나?”
솔레리안의 물음에 카샤가 고개를 주억거리려 할 때였다.
“그럼 해밀은 천계에 두고 갈게.”
해밀은 심장이 내려앉은 표정으로 솔레리안을 보았다.
두고 가다뇨. 저를요? 천계에요? 왜죠?
놀란 건 해밀만이 아니었다.
카샤 역시도 적잖이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솔레리안.”
“날 위한 마음이라는 건 알지만, 내가 원하는 건 아니라는 뜻이야. 무슨 일이길래 매번 약속까지 하고 왔는데도 뵐 수가 없는 거니?”
솔레리안이 다 식어버린 찻잔을 들어 보였다.
“응?”
“…….”
“해밀을 두고 갈까, 아니면 네가 말해줄래?”
잠시 눈을 질끈 감았던 카샤는 어디선가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솔레리안의 보좌관인 해밀이 카샤를 노려보며 천계에 남는 것을 완곡히 거부하고 있었다.
하급 르젤 주제에 지금 누굴.
카샤가 울컥하던 그때.
솔레리안이 힘을 주어 재차 카샤의 손을 잡았다.
“카샤.”
……이래서였다.
이렇게 솔레리안을 보면 마음이 약해지니까 오지 않으려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한두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내팽개치듯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연옥에 있던, 지옥에 있던 그녀는 저의 소중한 친우이거늘.
카샤는 ‘나도 이제 모르겠다’라는 얼굴로 재차 깊은 한숨을 쉬다가 무겁게 입술을 뗐다.
“그레데엘므 님께서 사랑의 묘약을 만드셨어.”
“……뭐?”
“그것도 연달아서 두 차례나.”
솔레리안의 얼굴이 빠르게 창백해졌다.
“……어째서? 분명 만드실 시기가 아닌데……. 이런 경우가…….”
“없었지.”
사랑의 묘약.
그것은 본래 축복이었다. 태초의 신이 인간들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주고자 그레데엘므를 통해 만든 축복.
하지만 신이 침묵하는 존재가 되고, 그레데엘므가 타락하면서 사랑의 묘약은 저주가 되고 말았다.
그 저주를, 그레데엘므는 반세기마다 한 번씩 만들었다.
사랑의 묘약이 저주라는 걸 알면서도 천계는 묵인했다. 모순적이게도 그 저주가 그레데엘므의 신성력을 유지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레데엘므가 사랑의 묘약을 만드는 것 자체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시기였다. 반세기가 되기 전에, 그것도 연이어 두 차례나 만든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솔레리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연달아 사랑의 묘약을 만들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카샤가 몸을 일으켜 세우고 솔레리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그녀는 무언가 결심한 듯 말했다.
“너한테 보여 줄 게 있어.”
솔레리안과 해밀은 카샤를 따라서 공중정원을 향해 걸어갔다.
카샤는 다른 르젤들의 눈에 띄지 않는 길목만 골라서 갔다. 제게 이목이 쏠리는 걸 싫어하는 솔레리안을 위해서였다.
이윽고 공중정원 입구 문이 열린 순간.
“뭡니까……?”
해밀은 저도 모르게 당혹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솔레리안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공중정원 한가운데에 붕 떠 있는 거대한 무언가를 보며 말했다.
“……카샤, 저게 뭐야?”
“모래시계.”
솔레리안도, 해밀도 그게 모래시계라는 것쯤은 알았다. 동시에 일반적인 시간을 알리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도 눈치챘다.
두 르젤의 시선이 카샤에게로 향했다.
카샤는 질린다는 듯이 재차 말했다.
“그레데엘므 님의 시간을 추적하는 모래시계야. 어느 날부터 고위급 르젤들이 모여서 뭘 만드나 했더니 저거더라.”
“……용도는.”
“그분의 생이 끝날 때 멈춰지게끔 설계돼있어.”
해밀은 속으로 경악했다.
드디어 고위급 르젤들이 미쳤구나.
타락해버린 그레데엘므 님께 미련을 못 버리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징그럽게 집착할 줄이야.
그와 동시에 의문점이 들었다.
시간을 추적하고, 생이 끝날 때 멈춘다.
그건 마치…….
“그레데엘므 님의 생사를 주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만 그렇습니까?”
해밀의 말에 곧 정적이 휩싸였다.
솔레리안과 카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느낀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이어지는 적막을 먼저 깬 것은 카샤였다.
“그리고 저거, 보여?”
그녀는 모래시계의 투명한 유리 부분에 그려진 연보라색의 불투명한 무늬를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동그라미였다.
개수는 총 세 개.
“저게 바로 그레데엘므 님이 만든 사랑의 묘약 표식이야. 모래시계를 만든 후로 줄곧 하나밖에 없다가 연달아서 두 개가 더 생겼어.”
* * *
라트올의 일상은 평화로운 편이었다.
오늘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지하 작업실에서 밤을 지새우며 작업에 매달리다가 부엌에 들른 참이었다.
물을 따라 마시던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코가 막힌 건가? 왜 이렇게 숨쉬기가 불편하지?
그때 루가 불렀다.
“라트올, 이리 와.”
“!”
라트올은 그제야 무거운 공기의 정체를 알아챘다. 안뜰에 서 있던 루가 전에 없이 활짝 웃으며 라트올을 부르고 있었다.
누구 하나 찢어발길 듯한 살기 어린 마력을 가감 없이 드러낸 채.
라트올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죽는다.
저기 가면 반드시 죽는다.
몸이 사정없이 떨렸고 숨이 턱턱 막혀왔다. 라트올은 어렵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어요, 그런 간단한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루는 더욱 방긋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착하지.”
라트올의 발이 저절로 바닥에서 떨어지더니 루를 향해서 걸음이 옮겨졌다. 현혹의 힘이었다. 라트올은 서늘한 한기에 털이 쭈뼛 서면서 소름 끼치는 걸 느꼈다.
이런 식으로 갔다가는 정말로 죽는다.
“가, 가, 갈게요! 제가, 제가 갈게요……!”
루가 웃는 얼굴 그대로 등을 돌리자 다행히 걸음이 멈춰졌다.
다리에 힘이 풀린 라트올은 기어가다시피 바짝 엎드린 채 루의 곁에 섰다. 그러자 루가 복슬복슬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옳지.”
라트올은 루의 살기 어린 마력에 숨이 막혀서 죽을 지경이었다.
누군가가 코와 입을 막아서 그사이 새어 나오는 숨을 겨우겨우 쉬게 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몸이 벌벌 떨려오는 탓에 복숭아색 머리끝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루가 한낮의 하늘을 가리켰다.
“잘 기억해둬. 바로 저 자리야.”
“……?”
그가 가리킨 곳은 구름 한 조각 없는 깨끗한 하늘이었다.
“대답.”
“……네, 네!”
라트올은 다급하게 대답했으나 상황 파악이 안 됐다.
정오가 되기도 전 시간이었다.
보통 이 시간이면 루는 느긋하게 일어나 시집이나 읽으며 여유를 만끽했고, 제인은 마법을 배우러 가고 없을 때였다.
본채 어디에서도 제인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봐서 그녀는 마법을 배우러 간 게 틀림없었다. 더군다나 그녀에게 화가 났다면 이런 식으로 라트올을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뭐지? 뭐 때문에 이렇게까지 분개하는 거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짐작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그때 루가 다시 한번 더 아무것도 없는 맑은 하늘을 가리키며 부드럽게 말했다.
“저 자리니까 절대로 잊지 마.”
라트올이 엉거주춤 일어서며 물었다.
“……뭐, 뭐가요?”
목숨을 내놓고 하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제대로 묻지 않으면 나중에 어떤 후환이 닥칠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라트올이 두려움에 떠는 그 순간.
루가 씹어 뱉듯이 말했다.
“그레데엘므가 죽어서 틀어박힐 자리.”
“!”
그레데엘므라는 이름에 놀라 자빠지기도 전이었다.
루는 쥐고 있던 편지를 라트올의 가슴팍에 밀어붙이듯 퍽, 소리 나게 주고는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넘어질 듯 휘청거리던 라트올은 다리에 힘이 쭉 풀려서 다시금 주저앉았다. 그리고 막혔던 숨을 몰아쉬고는 손에 든 종이의 내용을 천천히 읽어나갔다.
[시답잖은 애송이에게.
안녕, 애송아!
설마 잘 지내고 있어?
나는 순정파라 하루도 빠짐없이 애송이가 개새끼처럼 빌빌거리며 지내길 바라고 있어! 그런 의미로 어제 깜짝 선물을 보냈어.
이름하여, 붉은 정원의 수레바퀴!
제인이라는 인간에게 뿌린 사랑의 묘약이야.
지금쯤 그 아이는 우리 시답잖은 애송이에게 껌뻑 넘어가 있을 테지. 너와 내가 보고 싶은 결말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으니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길 바라.
그럼 이만!
추신. 사는 동안 늘 고통스럽길.
질질 짜면 더 좋고.
귀여운 그레데엘므가.]
라트올은 백지장같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종이를 보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때였다.
쩍.
라트올의 안경알에 실금이 갔다.
“헉……!”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뻑뻑한 공기에 순간적으로 동공이 축소된 그는 본채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이내 유리창에도 실금이 쩍 가더니 폭발하듯이 와장창 부서졌다. 욕실 안의 욕조부터 부엌에 있는 유리잔과 접시들도 모두 산산조각이 났으리라.
라트올은 깨진 창문 틈으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청소 유령인, 데코토들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목소리가 없는 데코토들은 저게 무슨 날벼락이냐는 표정으로 라트올을 올려다보았다.
“……저건 치우지 말고 놔둬. 호엘리반을 불러올게.”
* * *
그 시각, 세실의 집.
“솔직히 말해봐요.”
제인은 땀 범벅인 상태로 팔딱거리는 근육들을 고스란히 느끼며 물었다.
“방금 저 정말로 요단강 건널 뻔했죠?”
제인은 확신했다. 수련이 끝나갈 무렵, 눈앞이 새하얘지면서 요단강 비슷한 걸 보는 순간 죽는구나 싶었다.
파탐을 흡입하던 세실은 쿨럭이며 기침하다가 머쓱한 태도로 말했다.
“한계점 측정하려다가.”
“보낼 뻔하셨구나…….”
“……의도치 않게.”
일어날 기운마저 소진된 제인은 세실의 발끝 아래에 퍼질러 누운 채 팔을 어른거렸다. 그러자 세실이 옆에 걸쳐져 있던 수건을 대충 던져 주었다.
제인은 평소처럼 땀을 훔쳐내지 않고 얼굴에 수건을 얹은 상태로 말했다.
“인간적으로 조금이라도 미안하면요, 제 얘기 좀 들어 줄래요.”
세실은 파탐을 버리고 소파 등받이에 기대었다.
긍정의 의미가 담긴 침묵에 제인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