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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59)화 (59/168)

59.

“라트올이 아름다운 걸 선물로 주면 좋아할 거랬어. 그래서 계속 생각해봤거든.”

아름다운 게 뭘까, 하고.

시선을 바깥으로 비켜낸 제인이 목덜미를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너 밖에 생각이 안 났어.”

정적이 일었다.

루가 뒤늦게 물었다.

“아. 그래서 거울을?”

“…….”

상자 안에 담긴 선물은 작은 벽면 거울이었다. 거울 프레임은 뱀과 월계수 잎 패턴이 정교하게 새겨져서 꽤 고급스러워 보였다.

루는 짧게 웃음을 터트리는가 싶더니, 정말로 즐겁다는 듯이 큰 소리로 유쾌하게 웃기 시작했다.

먼 곳을 응시하던 제인의 시선이 루에게 향했다.

제인은 처음 보는 그의 웃음소리와 얼굴을 속절없이 바라보다가 미간을 좁혔다.

미치겠네.

“네가 웃으니까 왜 이렇게.”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왜 이렇게 행복하지.”

* * *

제인은 식탁 위에 올려진 산호색 장미꽃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찌나 향기로운지 식탁에 앉는 순간 장미 정원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루가 웃으며 라자냐를 앞 접시에 덜어주었다.

“네가 이걸 맛있게 먹는다면 나는 몹시 행복할 테지.”

“……제발 그만 놀려.”

제인은 식탁에 팔꿈치를 걸치고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조금 전, 생각을 거치지 않고 내뱉은 말 때문에 침실에서부터 부엌에 앉을 때까지 시달리는 중이었다.

지금까지도 홍조는 가라앉지 않았고, 심장도 쿵쿵 뛰었다.

죽을 맛이었다.

“어서.”

맛있게 먹어야지.

루는 그런 눈으로 제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망할 놈의 묘비명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렇게 울며 겨자 먹기로 라자냐를 한 입 먹는 순간, 눈을 찡그리며 얕은 신음을 내뱉었다.

너무 맛있잖아.

이걸 못 먹고 죽었다면 무덤을 파헤치고 나왔을지도.

“맛있나 보군.”

제인은 만족스러워 보이는 루를 향해서 얼핏 반항적인 물음을 던졌다.

“이제 행복해?”

평소라면 그녀의 질문에 바로 키득거리며 짓궂은 말로 제인의 속을 긁어대야 했으나 루는 예상과 다른 차분한 미소를 입에 물고 있었다.

“행복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간질거리면서 부유감에 젖은 감상을 행복이라 부른다면…….”

포도주를 따라 마신 루가 화사하게 웃었다.

“몹시.”

제인은 조금 멍하게 루를 바라보았다.

처음 그를 만났던 날처럼.

그의 웃음이 무척이나 흉포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 심장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올 만큼 뛸 리가 없으니까.

루의 눈빛, 움직임, 말투.

모든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자신을 깨달았다.

설명하기 어려운 고단한 감각에 제인은 깊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래도 고동 소리는 멈추지 않고 귓가를 가득 메웠다.

어째서.

왜 하필 나는 너를.

앞에 놓인 먹음직한 라자냐를 말없이 보다가 큼지막하게 네 번 정도 더 덜어 먹은 후에야 포크와 나이프를 앞 접시에 내려두었다.

그 사이 루는 조용히 제인을 살폈다.

어딘가 가라앉은 표정.

붉은 홍조.

몸 곳곳에 묻어나는 서러움을 지그시 보다가 느릿하게 입술을 떼었다.

“너는 생일이 언제지?”

“……그런 거 없는데.”

케이크가 녹아내리는 입 안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담담하기만 했다.

“기일은 누가 기억해주려나 모르겠네.”

제인은 포크로 케이크를 뒤적거리느라 루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문득 그녀가 물었다.

“몇 번째 생일이야?”

그러고 보면 루에 대해서 아직도 아는 게 많이 없었다.

그가 아름다움을 탐닉하고, 그래서 시를 읽고, 동시에 나태함을 즐기는 데시안이라는 것조차 그의 거처에 와서야 알았다.

허구한 날 숲의 새들을 따라 그를 만나러 갔으면서도 그에 대해 알고자 하는 일이 없었다.

없었다?

아니다. 알려고 하지 않았다.

루만이 아니라더라도 제인은 타인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아 했다. 누군가를 알게 된다는 건 그녀로서는 마음을 나누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므로.

그때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4세기.”

“……어?”

입술 틈으로 멍청한 소리가 뱉어졌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케이크에 머물던 시선이 루에게로 옮겨갔다. 고개가 절로 갸웃거렸다. 세기라는 건 적어도 고대 유물 발견할 때나 쓰는 단위 아닌가?

루는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거나 말거나 우아한 자태로 케이크와 포도주를 먹고 마셨다.

“왜 단위가 년이 아니라 세기야?”

“사백 년은 어감이 영.”

그걸 물은 게 아니긴 한데.

“……4세기는 달라?”

“발화될 때 분위기가 달라지지.”

“…….”

제인의 초점이 산란해져 갔다.

“……그래서 사백 살이다?”

“체감상 3세기인데 말이야.”

그가 말을 이었다.

초연하게.

“1세기는 내내 잠들어 있었거든.”

백 년을 잠들어 있었다고 말하는 그는 낮잠이라도 잔 것처럼 말했다.

제인은 전보다 훨씬 더 가라앉은 기분으로 물었다.

“……어쩌다가?”

“벌 받은 거지.”

그가 턱을 괴고 웃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데시안은 죄악을 일삼는 존재니까.”

제인은 목구멍이 꽉 막혀오는 걸 느꼈다. 묻고 싶은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하지만 유독 마음에 걸리는 건, 잠들었다는 말이었다.

그 초연한 말에 기분이 젖은 솜처럼 무거웠고 먹먹해져 왔다.

“정말로 잠든 거야, 아니면 표현이야?”

루는 포도주잔에 조금 남은 포도주를 모두 마셨다.

느리고 아름답게.

그는 여전히 웃으며 대답했다.

“표현.”

제인은 얼마간 말없이 케이크 끝을 툭툭 잘라 먹었다. 표현이라는 두 글자가 이렇게 서글픈 말이었나, 곱씹으면서.

이윽고 그의 아득했던 공허함이, 흘러넘치는 쓸쓸함이 그려졌다.

그 시간이 백 년을 말하는 걸까.

케이크는 맛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정확한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목울대 밑으로 무언가 울컥거려서 부드럽게 넘어가지 않았다.

이상했다.

이유 없이 신경질이 났다.

포크와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남은 케이크를 자르는데, 그녀의 턱 밑으로 들어온 차가운 손가락에 시선이 올라갔다.

“내 강아지가.”

어느새 곁에 선 루가 허리를 숙여서 제인의 눈물을 핥았다.

“연민이 지나치네.”

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울어주기까지 하고.”

그의 말에 순간적으로 고개를 숙이자 맺혀있던 눈물방울이 기다렸다는 듯이 아래로 후두둑 떨어졌다.

제인은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하임을 따라 궁정에 오기 전에 보육원에서조차 울지 않는 아이로 통했을 정도로 운 적이 없었다. 눈물을 애써 참은 것도 아니었다.

아, 나는 눈물이 없는 아이구나.

그렇게만 생각했다.

울지 않으니 아무도 제인을 달래주지 않았다. 제인은 그렇게 위로받는 법도, 위로하는 법도 배우지 못한 채 자랐다.

그러니 제인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울다니. 울 수도 있다니. 내가…….

한번 터진 눈물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루는 웃으며 제인의 눈물을 핥아 주었다. 마치 예쁘고 소중한 걸 발견이라도 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웃지 마.”

제인은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툭 쳤다.

그러자 루의 입꼬리가 더욱 짙게 패었다.

더 깊어진 그의 미소를 보는 순간, 제인은 무언가 심장을 난폭하게 움켜잡는 통증을 느꼈다.

그때부터였다.

그 뒤로는 기억이 선명하지 않았다.

아프고 슬픈 동시에 신경질이 나고 화도 났다. 애틋하고 절절한 마음도 들었다.

대체 언제부터,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도 모를 감정들인지 순서 없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왔다.

어느덧 정신을 차렸을 때, 제인은 그의 어깨와 목덜미를 잡은 채 입술을 맞추고 있었다. 이내 조그맣게 벌어진 입안으로 포도주 맛이 나는 차가운 혀가 들어왔다.

그의 온기를 천천히 받아 내다가 가볍게 안겨서 침대에 눕혀졌다.

그녀는 계속 울었고, 그는 흘러내리는 눈물방울을 모두 핥아 주었다. 아득히 멀게 느껴지던 그를 조금이라도 가까이하려는 듯이 계속해서 끌어당겼다.

벼랑 끝에 선 것처럼 아주 간절히.

루는 그녀의 손길에 상응하듯 부드럽게, 깊게 파고들었다. 차갑기만 하던 그의 살결에 미약한 온기가 덧대어졌고, 제인의 피부는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녀가 달뜬 숨을 뱉으며 나지막이 물었다.

“혼자 있었어?”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렸지.”

그는 제인의 품에 깊이 파고든 채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누군가 와주길, 오랫동안.”

* * *

솔레리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천계에 온 지 한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으나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접빈실은 휑하기만 했다. 이렇게 약속을 어긴 게 벌써 세 번째였다.

그녀는 다 식어버린 찻잔을 물끄러미 보다가 해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만 갈까.”

해밀은 자신이 보좌하는 분이 이따위 대접을 받는 게 분통이 터지고 화가 났으나 참고 또 참았다.

솔레리안이 원하는 건 언제나 눈에 띄지 않는 것이었기에.

그렇게 솔레리안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응접실 바깥에서 희미한 기척이 들려왔다. 해밀은 귀를 쫑긋 세웠다. 발소리가 확실했다.

그럼 그렇지. 우리 솔레리안 님을 세 번이나 바람을 맞히는 건 말이 안 되지.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솔레리안은 그대로 멈춰서 열리는 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카샤……?”

솔레리안의 오랜 친우인 카샤가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쉿, 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고는 바깥을 두리번거리다가 문을 잠갔다. 카샤는 다소 복잡한 얼굴로 솔레리안 앞에 마주 앉아서 나직하게 말했다.

“기다리지 마, 솔레리안. 라카엘 님은 오늘도 안 오실 거야.”

라카엘.

현재 천계에서 최고위 르젤이자, 솔레리안이 기다리던 존재였다.

해밀은 당장이라도 카샤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어대고 싶었다. 도대체 그 망할 영감탱이가 어디서 뭘 하느라 약속한 날마다 코빼기도 안 보이냐고.

그때 솔레리안이 웃음을 살짝 머금고 카샤의 손을 잡았다.

“오랜만이네, 카샤. 잘 지냈어?”

“……솔레리안. 돌아가.”

“라카엘 님께 무슨 일이 있는 거니?”

솔레리안이 몸을 기울였다.

이내 카샤의 귓가에 그녀의 목소리가 뭉근하게 울려 퍼졌다.

“아니면, 천계에 무슨 일이 있는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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