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천사의 얼굴로 악마처럼 묻는다.
죽어 줄 수 있어?
그를 위해서.
사랑하는 그를 위해서.
제인은 고개를 떨구었다.
아까부터 자꾸만 루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심장은 속절없이 뛰고, 마음 한구석이 답답했다. 제인은 그 답답함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가 보고 싶은 것이다.
빌어먹게도, 무척이나.
제인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잿빛 눈동자가 그의 백금빛 눈동자를 똑바로 직시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키득거림이 새어 나왔다.
“싫은데요.”
“……싫어?”
“사랑한다면 목숨 바쳐서 죽어버리는 게 아니라…… 곁에 있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마침표를 찍었다.
“쓸쓸하지 않게.”
제인은 조용히 탄식했다.
-쓸쓸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득할 정도로 멀게 느껴지던 루에게 했던 말이었다.
언제부터 그런 마음이 들었던 걸까.
제인은 사실 혼자서 식사하는 게 익숙했다.
그녀가 페브리아에서 했던 식사는 식사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빵 조각, 식어버린 수프를 쓰러지지 않을 만큼만 먹는 게 전부였으니까.
그 모든 걸 쓸쓸하다고 느낀 적도 없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루가 혼자 식사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그건 마음에 가을바람이 부는 일이었다. 푸른 잎이 채도를 잃는 일이었고, 건조하게 마르는 일이었으며,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일이었다.
무척이나 쓸쓸한 일이었다.
그때였다.
“손님.”
기쁜 듯한 그의 백금빛 눈동자에 수천 가지 감정과 생각이 실려 있었다. 그는 작게 감탄하며 들고 있던 향수와 흰 손수건을 내려놓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어서 제인의 심장을 손으로 움켜잡는 듯한 말을 했다.
“손님은 그를 사랑하는구나.”
사랑.
남자의 말에 숨이 턱 막혀왔다.
손에 들고 있던 루의 생일 선물에 시선을 두었다가 헛웃음을 짓고는 그를 향해 더욱 입꼬리를 올렸다.
“불행히도.”
그러자 남자도 마주 보며 싱그럽게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녀는 얕지 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긴 머리를 재차 거칠게 쓸어 넘기며 가게를 나가려 몸을 틀었다. 문고리를 잡고 밀려는 순간, 우뚝 멈춰서 손목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데 이 향수, 이름이 뭐예요?”
“손님에게 뿌려준 거?”
제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찬란하게 빛나는 미소를 머금었다.
“붉은 정원의 수레바퀴.”
“제 이름은 제인이에요. 당신 이름은요?”
남자가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레데엘므.”
* * *
제인이 향수 가게에서 나간 후.
그레데엘므는 향수병들을 마저 닦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점점 콧노래의 볼륨이 높아지더니 흥이 돋는지 혼자서 우아한 자태로 왈츠를 추었다.
기품있게 회전을 도는 찰나, 가게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남자는 손님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어서 와, 손님.”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향수병을 진열대에 올려두고 킥 웃으며 말했다.
“손님 이름이 엔니오였던가. 엔니오 칼다프.”
* * *
그 시각.
오랜만에 집에 일찍 귀가한 호엘리반이 서재에 가볍게 노크하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책상 한쪽에서 높이 쌓인 서류를 검토 중이던 프시오를 지그시 눈에 담았다.
고개를 든 프시오가 호엘리반에게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호엘리반에게 집이란 큰 의미가 없었다.
평소 잠만 자고 나가는 데다 그 잠조차 일상이 되어 버린 야근 덕분에 마탑의 개인 집무실에서 눈을 붙일 때가 많았다.
하지만 요즘 그에게 집의 의미가 크게 달라졌다.
프시오.
집의 의미를 바꾸어준 사람이었다.
호엘리반은 상냥하게 웃으며 홍차와 쿠키가 종류별로 담긴 쟁반을 내려놓았다. 이어서 서류 더미에 팔을 얹고 물었다.
“지금까지 모은 정보들이야. 좀 도움이 돼?”
“돼야죠. 기부금을 대신 내주었는데 그만큼 제 몫은 해야 하니까요.”
마침 허기져있던 프시오는 버터 쿠키를 집어 먹었다.
“솜브는요?”
“잠들었어.”
“괴롭히지 마세요.”
“노력 중.”
프시오가 이럴 겁니까? 라는 눈으로 보자 호엘리반이 빙그레 웃으며 두 팔을 들고 어깨를 으쓱였다.
프시오는 얼굴을 조금 찌푸리며 버터 쿠키를 하나 더 먹고 홍차를 마셨다.
“말씀드린 부분은 생각해보셨나요.”
“……페브리아 교황청 소속 암살자였던 자에게 마법을 가르쳐주는 대가로 페브리아와 마드리안 교황에 관한 정보를 얻는다. 그리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계책을 세운다는 그 계획?”
“네.”
“프시오, 나는 가끔 널 이해하기 어려워.”
상냥한 음성에 염려가 섞여 있었다.
“밀리타라는 암살자를 어떻게 믿는 건지. 벌써 그자를 네가 지내던 사막 집에서 머물 수 있게 해주었던데.”
“신원 확인하신 줄로 압니다.”
“그래서 그래. 서면상으로는 암살자가 아닌 약제사로 등록되어 있지만 지금도 페브리아 교황청 소속이잖아. 그 여자가 흘린 정보를 어떻게 믿지?”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압니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해요.”
프시오가 잠시 숨을 고르고 말문을 열었다.
“교황청에서 마나를 주입한 것이 사실이라면 분명…… 드래곤의 마석과 관련 있을 겁니다. 그러면 많은 것들이 맞아떨어져요.”
“…….”
“잘 아실 텐데요.”
호엘리반은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만은 못했다.
마나는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힘이다.
후천적으로 얻을 수 있는 수단은 드래곤의 마석을 통한 방법 외에는 현재까지 밝혀진 바가 없었다.
각국에서 드래곤의 마석 채취가 금지된 연유는 흡수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그로 인해 생명을 해치면서까지 무분별하게 마력을 흡수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잊지 않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앙디스가 페브리아에 삼켜진 결정적 이유도 드래곤의 마석 때문입니다.”
프시오의 목소리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니 호엘리반, 모든 사항을 참고해서 고려해주시길 바랍니다”
* * *
루가 다소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투로 제인을 불렀다.
“제인.”
“어.”
“뭐 하는 거지.”
“어, 추워서.”
둥글게 이불을 말고서 꼭꼭 숨어 버린 제인은 얼굴만 커튼 뒤로 숨긴 고양이 같았다. 루는 그 모습이 황당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저녁 식사하지, 좋게 말할 때.”
“있잖아.”
“없어. 나와.”
제인은 울컥 화가 치밀었다.
라트올도 그렇고 이것들은 사람 말을 끝까지 들을 줄을 몰라.
제인이 이불속에서 입술을 뗀 순간이었다.
“……내가.”
펄럭…….
덮고 있던 이불이 허공 위로 나풀거렸다. 이불 속에 웅크리고 있던 제인은 멍한 얼굴로 루와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이 너무나 느릿하게 느껴졌다.
툭, 하고 이불이 땅에 떨어진 순간부터 제인의 심장이 전보다 더 요동치기 시작했다.
쿵쿵쿵.
“내가 좀 아파.”
제인의 심장은 목구멍으로 뱉어질 듯 뛰었고, 속은 울렁거렸다. 드호아망의 축제에서 불꽃놀이를 보았던 그날처럼.
도무지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제인은 집에 오자마자 욕조에 몸을 담그고 곰곰이 되짚어보았다.
대체 언제부터지? 쓸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부터였나?
그러자 셀 수없이 많은 찰나가 스쳐 지나갔다. 결국에는 처음 만났던 그날까지 돌아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언제 같은 건 없다.
처음부터였던 거다.
달빛이 내려앉은 어느 밤에 혼잣말처럼 그가 제인, 하고 웃었을 때부터 사악한 미혹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이었다.
-언젠가 죽으면 내 묘비명엔 이런 문장이 새겨질지도 모르겠어. 악마에게 홀려 죽은 인간.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만약 정말 그 말이 씨가 된 거라면 제인은 그날로 돌아가서 제 입을 꿰매고 싶었다. 그리고 귓가에 씹듯이 속삭여 주고 싶었다.
제발 그 입, 닥치라고.
그렇게 생각 없이 내뱉었던 묘비명이 농담이 아니게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그녀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때, 한겨울 같이 차가운 손이 제인의 이마를 조심스럽게 짚었다.
루가 말했다.
“……열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쿵쿵쿵…….
제인은 심장이 너무 뛰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닿고 싶고, 만지고 싶었다.
그렇게 모든 감각이 한 데 뒤섞이자 별안간 서러움에 눈물이 핑 돌았다.
……핑?
어이가 없어서 하하,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운 기억이 까마득할 만큼 눈물이 없는 인간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이 순간, 목구멍이 아릴 만큼 무언가 북받쳐 올라왔다.
루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마에서 떨어진 그의 손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제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제 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빌어먹을 심장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오거나, 속에서 터져버리거나.
그렇게 망연자실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루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떨어뜨리며 제인을 살폈다.
“몸살인가.”
……다행이다.
루가 저처럼 사랑 따위는 모르는 바보 멍청이이라서.
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섬주섬 이불을 끌어당겼다.
“그런가 봐. 열도 나고 춥고 그러네.”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이마가 그의 차가운 어깨에 닿았다.
“그럼 잠시만 이렇게 있지.”
그는 제인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식사 후엔 해열제 챙겨 먹고.”
“…….”
제인은 정말이지 콱 죽고 싶었다.
이제 심장은 터지도록 뛰다 못해 아프기 시작했다. 무언가 쿡쿡 찌르는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 쥐고 놓아주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아프고 서러웠다.
울컥 눈물이 나려 할 때였다.
“생일 선물도 받아야 하고.”
“어……?”
“준비한 거 아니었나?”
라트올 이 자식, 그새 말했구나.
제인의 눈물이 쏙 들어간 사이, 루가 능청을 떨었다.
“깜짝 선물이었다면 받을 때 눈을 동그랗게 떠줄 수도 있는데.”
“……동그랗게 뜨기만 해.”
제인은 아직도 열기로 가득 찬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침대 밑 구석에 놓아두었던 선물 꾸러미를 주섬주섬 꺼내서 그에게 내밀었다.
“자.”
“인사도.”
준비 안 했으면 어쩔 뻔했을까…….
“축하해. 생일.”
루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선물 꾸러미의 리본을 풀었다.
상자 안의 포장 종이까지 모두 해치자 선물의 정체가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