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느지막하게 일어난 루는 방금 씻었는지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부엌 의자에 앉았다.
그는 식탁 위에 올려진 케이크와 포도주, 산호색 장미 꽃다발을 물끄러미 보다가 꽃을 들어서 향기를 맡았다.
“호엘리반이 보냈나 보군.”
“네, 제인은 조금 전에 드호아망에 갔어요.”
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트올이 조리대에서 석류 주스를 만들며 물었다.
“한 잔 드려요?”
“응.”
루는 단조롭게 대답하며 장미꽃을 세밀히 바라보았다.
꽃잎은 부드러운 살결처럼 고우면서 촉촉했고 향기까지 완벽하게 구현되었다. 도저히 연금술로 만든 조화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호엘리반은 정점의 미학을 위해서 저를 깨운 인간이었다.
루는 그의 탐욕이 퍽 기특했다.
그때 라트올이 석류 주스 두 잔을 식탁에 올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이어서 대뜸 일 얘기를 꺼냈다.
“마석 재고 파악만 할까 해요. 저녁 전에 끝낼 생각이고요.”
“해야 하나.”
“해야 해요.”
“꼭 해야…….”
탁.
라트올이 비운 잔을 내려놓으며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외주업체 납품 물량까지 확인하려면 평소처럼 일하는 게 낫거든요. 그건 저 혼자 밤새워서 하면 되는 거라 마석 재고 파악만 하려고 했…….”
“하지.”
라트올은 입을 다물었고, 루는 야트막한 한숨을 쉬며 이어서 말했다.
“재고 파악.”
“어차피 하실 거면서 왜 입 아프게 만드세요? 전부 당신이 원해서 하는 일인데.”
“이왕 나를 위하는 김에 잔소리를 줄여 줄 생각은?”
“없어요.”
“야박하기 짝이 없군.”
루가 라트올의 턱밑을 톡 두드리며 장난스레 말했다.
“꽃처럼 예뻐서 데려왔더니.”
라트올은 질색하며 장미꽃을 성의 없이 품에 안겨주었다.
“꽃은 여기 있고요. 당신이 절 데려오신 이유는 녹니스 때문이잖아요.”
루는 대답 대신 나직하게 키득거리다가 다시 꽃을 내려놓았다.
“다듬어서 꽃병에 담아놔.”
“그럴게요.”
라트올이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제인도 오늘 무슨 날인지 아는 것 같던 데요. 호엘리반이 유별난 줄 알았더니 인간들에게는 중요한 날인가 봐요.”
루는 석류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단조로운 투로 말했다.
“그들의 생은 짧으니까.”
“당신이 제인에게 어떤 선물을 받을지 궁금하네요.”
“어쩌지. 조금도 기대가 안 되는걸.”
루가 산뜻하게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은 미적 감각이 없거든. 전혀.”
* * *
드호아망의 어느 매장 안에서 제인은 계산대에 올린 물건을 가리켰다.
“이거, 포장해 줄 수 있나요?”
“그럼요. 선물하실 건가 봐요.”
“네. 꼼꼼하게, 예쁘게 부탁드려요.”
이어서 무척이나 음산하게 말했다.
“……책잡힐 일 없게요.”
점원이 “네?” 하고 되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제인은 그저 미간 사이를 문지르며 라트올의 말을 떠올렸다.
-루는 아름다운 걸 탐닉하는 데시안이란 말이에요.
제인은 루와 함께 지내는 동안 라트올이 했던 말의 의미를 몸소 체감하고 있었다.
그는 진정으로 사소한 것 하나까지 아름답지 않은 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듯했다. 미적 감각이 0에 수렴하는 제인은 그의 시선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루의 생일 선물을 고르기 위해 프시오를 따라가지 않고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고르고 고른 선물이었다. 포장 하나까지 세심하게 신경 쓰지 않으면 주고도 욕을 먹을 게 뻔했다.
그 사이 점원은 영업용 미소를 짓고는 정말로 꼼꼼하게 포장해주었다.
그녀야말로 어딘가 이상한 여자에게 책잡히지 않기 위해,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나가길 바라는 심정으로.
“여기 있습니다.”
제인은 점원이 건네주는 선물 꾸러미를 받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게에서 나왔다. 큰 숙제라도 끝낸 기분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이제 집으로 가볼까.
오늘은 유독 날씨가 좋았다.
초겨울이라기엔 햇볕이 무척이나 따뜻했다. 그러면서도 깨끗한 겨울 냄새가 물씬 나서 기분 좋게 숨을 한껏 들이켰을 때였다.
……이 향기.
익숙한 향기를 맡은 제인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문득, 맞은편 향수 가게가 그녀의 시선에 걸렸다.
홀린 듯 물끄러미 쳐다보던 제인은 저도 모르게 향수 가게를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 진열장에 놓인 향수들을 보면서 더욱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많은 향수가 있는데, 어째서 맡아지는 건 박하 향뿐일까.
“어서 와, 손님.”
안쪽 공간으로 이어진 아치형 문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제인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당신은…….”
그 사내였다.
엔니오와 로안나가 저주에 걸렸다고 말했었던.
무척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남자가 신비로운 백금빛 눈동자를 접으며 웃었다.
“또 만났네.”
제인이 잔뜩 경계하며 대뜸 물었다.
“당신이 그때 말했었죠? 언약식을 했던 연인, 저주에 걸려서 불행해질 거라고요.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었죠?”
“음.”
잠시 뜸을 들이던 남자가 상냥한 투로 말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저주에 걸린 건 신부였어.”
“그러니까 당신이 그걸.”
“손님.”
“…….”
제인은 몸이 순식간에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그저 남자가 미소로 일관된 표정으로 손님, 하고 불렀을 뿐이건만 절벽 끝에 내몰린 것처럼 위압감이 느껴졌다. 생을 통틀어 이렇게까지 압도적인 존재를 마주한 적이 없었다.
머릿속에서 경고의 목소리가 쨍쨍 울렸다.
조심하라고.
이자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절대로.
제인은 침착하게 생각했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 자인지 알았으니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게 아니더라도 별수 없었다.
남자는 제인이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그 정도로 마주 선 것만으로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존재였다.
제인이 숨도 못 쉬고 남자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손님.”
그가 살랑살랑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 조금 더 재미있는 대화를 하자.”
그녀는 순간적으로 그가 자기에게 흥미를 갖고 있음을 눈치챘다. 나쁘지 않은 신호였다. 조금 더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정보를 캐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평범한 대화를 이어 나가고자 했다.
“……여기서 나는 박하 향도 향수인가요?”
하지만 그게 잘못된 질문이라는 걸 알게 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허리를 살짝 굽힌 남자가 제인에게 훅 가까이 다가와 제 목덜미를 내어주듯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 이건 내 살냄새.”
“……!”
역시 루의 냄새와 똑같았다.
눈을 감고 있으면 루가 앞에 서 있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그러다 돌연 그의 숨결이 뺨에 와닿을 만큼 그가 가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혹스러움에 한두 발걸음 뒷걸음질 치는데, 그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손님, 내 살냄새를 맡고 온 거구나.”
그는 다시 한번 더 목덜미를 제인 쪽으로 내밀었다가 천천히 떼어냈다.
“이 냄새, 좋아해?”
그 순간, 뒷걸음치던 제인은 강렬한 위화감을 느꼈다. 조용히 눈동자만 굴린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발이…… 안 떨어져.
등골이 오싹해졌다.
늪에 빠진 듯한 막연한 공포가 그녀를 덮치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덧 제인의 손목이 그의 손에 잡힌 뒤였다. 밀려 올라간 옷 소매 아래, 루의 각인이 가려진 팔찌가 드러난 채.
“손님에게는 이 향이 어울려.”
톡.
향수 한 방울이 떨어졌다. 팔찌를 옆 하얀 살결 위로, 가볍게.
남자가 향수를 떨어뜨리자 박하 향이 가득하던 주변에 부드러운 향이 덧씌워졌다.
“……향수 안 좋아하는데.”
제인의 말에 그가 웃었다.
“손님, 향수 가게에 와서 할 말은 아니지 않아?”
남자는 제인의 양쪽 손목을 쥐고는 손목 안쪽으로 문지르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면서 조금도 강요하거나 강압적인 기분이 들지 않게 했다.
그건 꼭 서투른 것을 도와주는 태도이자.
“혹시 알아? 이제 좋아하게 될지.”
동시에 밀어낼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다.
“내 살냄새도 좋아하잖아, 손님.”
그때였다.
직전의 공포가 환영이라도 된 것처럼 발이 쉽게 들어 올려졌다. 제인은 남자에게서 몸을 더 멀리하며 말했다.
“당신과 똑같은 냄새를 가진 사람이 있어요.”
사실 사람이 아니지만.
남자에게서 멀리 떨어진 제인은 그제야 손목의 향을 맡았다.
“!”
석양.
손목에 떨어진 부드러운 향수는 낮과 밤 사이의 석양을 떠오르게 했다.
그때 남자가 해사한 얼굴로 말했다.
“그를 생각하면서 들어왔구나?”
제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반사적으로 입을 가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루가 떠오르자마자 심장이 튀어나올 듯이 쿵쿵 뛰었다.
“손님은 그를 사랑해?”
“…….”
“사랑해?”
“……무엇으로도.”
머뭇거리던 제인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아득한 공허가 보여요. 그래서 곁에 있어 주고 싶다면, 그게 사랑인가요?”
제인은 알고 있었다.
저를 향한 루의 감정이 소유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그랬기에 제인도 자신의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바로 곁에 있는데도 루가 아득하게 멀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에게서 흘러넘치는 쓸쓸함이 애처로웠다.
사랑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는 그것이 사랑인지 연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남자가 빙그레 웃더니 유리 진열장 뒤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
“손님에게도 쓸쓸함이 있어.”
그리고 엎드린 채 고개만 들어서 제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소년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동시에 이해받지 못할 거라 믿는 지독한 쓸쓸함. 만약에 나도 손님 곁에 있어 주고 싶다면 그건 사랑일까?”
제인이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하자 그가 꽃처럼 활짝 웃었다.
“하지만 손님, 나는 손님을 위해서 죽고 싶지는 않아.”
이어서 몸을 일으킨 그는 진열장 안에 있던 향수병들을 하나씩 꺼내어 닦기 시작했다.
일상처럼 보이는 행동이었으나 제인은 꿈꾸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그는 존재만으로도 주변을 몽환적으로 만들었다.
“사랑은.”
이내 남자의 시선이 향수병에서 제인에게로 옮겨졌다.
“목숨 정도는 바칠 수 있어야 사랑이 아닐까.”
“…….”
“그를 위해서 죽어 줄 수 있어, 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