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엔니오는 피가 말라붙은 붕대 감긴 그의 손목부터 덜덜 떨리는 손, 그리고 피딱지가 덕지덕지 눌어붙은 단검에 말없이 시선을 두었다.
소스키엘이 눈을 치뜨며 말을 덧붙였다.
“너만 죽으면, 그러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거야.”
“소스키엘.”
엔니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넌 몇 번을 죽였어?”
말귀를 못 알아들은 소스키엘의 눈썹이 한순간 짓뭉개졌다. 엔니오는 소스키엘이 내민 단검을 받아서 들며 되물었다.
“네 머릿속에서 나를 몇 번이나 죽였어?”
소스키엘은 그제야 입꼬리를 위로 끌어 올리고 눈을 번뜩인 채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하하!”
“난 셀 수가 없어. 수천, 수만 번 너를 죽였어.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너를 죽였어.”
몸을 바짝 붙이면서 창살을 부여잡은 소스키엘이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그럼 그 칼로 날 죽이던가!”
잔 백작이 일의 원흉은 맞으나, 소스키엘이 아니었더라면 로안나가 강에 몸을 던질 일도, 의식불명이 될 일도 없었을 터였다.
“그러고 싶어.”
엔니오는 검집에서 빼낸 단검의 날카로운 칼날을 거친 돌벽에 북북 문질렀다.
“그러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 난 조각가야. 신께 바치는 작품을 창조하는 데 쓰는 손과 칼에 피를 묻힐 순 없으니까.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칼날을 계속 갈던 엔니오는 고개만 약간 틀어서 소스키엘의 정신 나간 눈을 응시했다.
“로안나에게 살인자 남편은 안 어울려.”
“……하하, 하하하, 하하!”
광기 가득한 눈으로 작게 웃던 소스키엘은 악다구니를 써댔다.
“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로안나도! 전부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나도 마찬가지야. 머릿속에서 너를 죽였던 만큼 나도 나를 몇 번이나 죽였어. 하지만 살 거야. 살아서 로안나 곁에 있을 거야.”
엔니오는 칼날이 다 갈려서 뭉툭해진 단검을 소스키엘의 손이 전혀 닿지 않는 구석으로 내팽개치듯 던져버렸다.
“그러니 소스키엘. 죽지 말고 살아. 살아서 로안나와 내가 얼마나 행복하게 살아가는지 똑똑히 봐.”
* * *
제인은 은근한 박하 향에 눈을 떴다.
루의 품 안이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녀는 정오의 햇살이 쏟아지는 침실에서 기지개를 쭉 켰다. 오랜만에 늦잠을 자서 그런지 무척이나 개운했다.
그러다 일순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분명 늦은 밤까지 부엌 식탁에서 마법서를 읽고 요약하다가 잠들었는데.
제인의 시선이 잠든 루에게 닿았다.
침실로 옮겨줬나 보네.
그러다 잠시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아름다운 그의 외모를 감상했다.
촘촘히 박힌 짙은 속눈썹을 따라 내려오면 반듯하게 올라간 콧대가 있다. 조금 더 아래엔 더없이 퇴폐적인 입술이…….
……이게 아니지.
문득 정신을 차린 제인이 뛰다 못해 터질 것 같은 심장 고동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녀는 조용히 일어나서 부엌으로 갔다.
식탁에 앉아 짧은 문장의 쪽지 한 장을 쓰고 창문가에 앉아있던 핍의 다리에 묶었다.
잠시 후.
넓고 긴 날개를 펼친 채 날아갔던 핍이 되돌아왔다. 그녀에게 전혀 도움 되지 않는 라트올의 글씨체가 적힌 쪽지와 함께.
[당신이 주는 건 무엇이든 기쁘게 받을걸요. 단, 아름다운 것에 한해서.]
제인은 막막한 듯 한숨 쉬었다.
이어서 시계를 보았다.
프시오와의 점심 약속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서둘러 외출 준비를 마치고 제법 능숙하게 이동의 문을 열었다.
* * *
드호아망의 음식점 안.
제인이 시큰둥하게 밀리타를 불렀다.
“밀리타.”
“네.”
“언제까지 만질 생각이야?”
밀리타는 제인의 어깨에서부터 팔뚝까지 탄탄하고 예쁘게 자리잡힌 근육에서 시선을 떼고 놀람 반, 흥미 반이 섞인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죠?”
“뭐가.”
“당신, 몸에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그새 이렇게 근육이 붙을 수가……?”
제인이 다소 흐린 눈으로 먼 곳을 응시했다.
“있더라고.”
“그러니까 어떻게……?”
“……더는 묻지 말아 줄래. 생각만 해도 지옥문이 아른거리거든.”
끔찍한 얼굴로 음울하게 중얼거리다가 일순간 카이와 눈이 마주쳤다. 살짝 벌어지던 제인의 입술에 묘한 미소가 그려졌다. 이어서 제 몸을 만지는 밀리타의 손을 잡아서 소파 위에 올려두었다.
밀리타가 짐짓 눈을 가늘게 하고서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프시오가 음식점 안으로 들어왔다.
“!”
제인은 어째서 프시오가 암살자든, 뭐든 상관없다고 했는지 확실히 납득했다. 프시오는 인사와 동시에 결박 마법을 써서 밀리타와 카이를 꼼짝 못 하게 묶어버렸다.
“오랜만이군요, 제인.”
잠시 후, 다행스럽게도 밀리타와 카이는 결박 마법에서 풀린 채 평범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프시오는 그들에게 일종의 경고를 한 것 같았다.
허튼짓할 생각은 꿈에도 말라는 경고.
밀리타는 프시오에게 자신과 카이를 소개했다. 제인은 그 자리에서 카이가 교황청 직속 성기사 신분이라는 사실을 새로이 알게 되었다.
성기사와 암살자.
제인은 두 사람의 관계가 꼭 햇빛과 그늘 같다고 생각했다.
얼마 후, 테이블 위에는 후식으로 나온 커피와 차가 올려져 있었다.
프시오는 찻잔을 들어서 가볍게 마시고 나서 밀리타에게 물었다.
“저에게 마법을 배우고 싶다는 말입니까?”
“네.”
“이유를 말씀해보세요.”
“먼저, 제 소개에서 빼먹은 게 있어요.”
그녀는 프시오를 향해 나긋하게 말했다.
“미르나비 보육원 출신, 밀리타입니다.”
“……!”
제인도 프시오도 놀란 눈치였다.
밀리타는 그들의 반응에도 익숙한 듯 개의치 않고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어렸을 때부터 궁금했어요. 보육원에 후원하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몰래 후원 명단을 훔쳐본 적이 있어요. 그때 당신의 존재를 알게 되었죠.”
밀리타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드호아망의 연금술 마법사, 프시오.”
밀리타에게 향해 있던 제인의 놀란 얼굴이 이번에는 프시오 쪽으로 돌아갔다.
보육원에 후원하고 있었어? 그럼 돈에 그렇게까지 열과 성을 다했던 이유가…….
그때 밀리타가 말을 이어갔다.
“마법을 배우고 싶은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당신처럼 돈을 많이 벌고 싶어요. 하지만 후원 같은 건 할 생각이 없어요. 혼자 잘 먹고 잘살고 싶을 뿐이죠.”
이내 프시오가 야트막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합격입니다.”
합격.
그 한마디에 커피를 마시던 제인은 사레들려버렸다. 그녀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한참을 쿨럭거리다가 촉촉해진 눈가를 닦아냈다.
놀란 건 제인뿐만이 아니었다.
밀리타와 카이 역시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프시오를 바라보았다.
프시오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당신의 진취적이고 현실적인 태도, 아주 마음에 듭니다.”
제인은 버석한 미소를 물었다. 그동안 세실의 제자가 되게 위해 애처로웠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덤으로 무수한 욕과 핍박까지도.
-꺼져, 새끼야.
그랬는데.
마법사 제자가 되는 일이 이렇게 쉬운 일이었나.
제인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번지는 사이, 밀리타는 기쁘면서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자 프시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의 의지와 태도는 합격이지만 제가 마탑 교수로 복귀하는 건 내년 가을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더불어 당신이 마나 소유자인지, 만일 가지고 있다면 제가 가르칠 수 있는 영역인지도 확인이 필요합니다.”
잠깐의 정적이 이어졌다.
“가지고 있어요. 마나.”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밀리타가 무겁게 입을 뗐다.
“암살자로 임명될 때 마나도 함께 주입 받았거든요.”
그 순간 제인과 프시오는 동시에 같은 의문을 품었다.
마법이 금지된 페브리아에서.
그것도 교황청에서 마나를 주입했다?
프시오가 물었다.
“어떤 힘을 가진 마나입니까.”
“그림자로 죽음의 여부를 알 수 있어요. 죽기 직전의 순간에요.”
“…….”
“암살 시, 확인 사살할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요.”
할 말을 잃은 제인과는 달리 프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언가 확신에 찬 표정을 지었다.
“내년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겠군요.”
프시오는 햇살에 드리워진 찻잔의 그림자를 손톱으로 가볍게 짚었다.
“그림자 마법은 독특한 갈래로써 마탑의 정규 과정에 속한 분야가 아닙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사적으로 제 선에서 가르칠 수 있는 건 모두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적극적인 프시오의 태도에 모두가 당황스러워했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는 눈이 많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자리를 옮겨서 합시다.”
* * *
프시오와의 만남 후, 묵고 있던 숙소로 돌아온 밀리타는 허름한 침대에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프시오의 사막 집에서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밀리타, 제가 아는 그림자 마법을 당신께 하나부터 열까지 남김없이 가르쳐드리겠습니다. 그동안 이 집에서 지내도 좋습니다. 지금은 빈집이라 아마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겁니다.
-대가가 필요하다는 뉘앙스네요. 수업료 말씀인가요?
-아뇨.
담담한 그녀의 목소리와 검은 동공에 힘이 실려 있었다.
-페브리아와 마드리안 교황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밀리타는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그녀에게 페브리아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나라였다.
동시에 고향이었다.
고아로 자라온 그녀에게 고향의 의미는 결단코 가볍지 않았다.
소중했다.
그녀는 쥐고 있던 프시오의 회중시계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윽고 큰 결심을 한 얼굴로 신발을 신고 나가서 옆 방의 문을 두드렸다.
열린 문틈 사이로 카이가 나오자, 밀리타는 숨도 쉬지 않고 다짜고짜 말했다.
“나, 페브리아에 안 돌아가.”
카이는 놀라는 기색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그가 평소와 같은 어조로 대답했다.
“알아서 해.”
“너는 이제 돌아가, 카이.”
얕은 탄식과 함께 짧은 머리를 쓸어 넘기던 카이는 안으로 들어오라고 눈짓했다.
바깥에 서서 잠시 고민하던 밀리타가 문 안쪽으로 몇 발짝 걸어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이내 그녀의 귓가에 카이의 낮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밀리타, 약속 지켜.”
그의 이마가 그녀의 어깨에 가볍게 떨어졌다.
“네 옆에 있을 거야. 있게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