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제인은 종종 의문을 가지곤 했다.
나의 서글픔과 타인의 서글픔에는 거리가 있을 텐데, 서글프다는 말만으로 서로의 마음을 살펴 줄 수 있을까.
납득할 수 있을까.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너는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루는 망부석처럼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제인에게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단조롭게 물었다. 일말의 흐트러짐이 없는 목소리였다.
“여긴 어쩐 일로.”
제인의 시선은 루에게만 머물지 않았다.
시선이 머무는 종착지는 루도, 루의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들도 아닌, 좁은 문 안쪽에서 손발이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는 한 노인이었다.
“사람 좀 찾으러.”
루가 노인을 향해 느슨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이 자?”
“아마도.”
제인이 노인에게 다가가자 루는 조용히 한 걸음 물러나 주었다.
노인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멍 자국과 크고 작은 상처로 엉망인 얼굴은 한쪽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할 만큼 피떡이 되어 있었다.
제인은 노인의 손과 발에 묶인 밧줄을 풀어주었다.
“괜찮으세요?”
노인은 기력이 없는 쇳소리로 대답했다.
“예…….”
“일어날 수 있으세요? 밖에서 무하가 기다려요.”
무하라는 이름에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우던 노인의 눈이 커졌다.
“무하, 우리 무하가……!”
“네. 그러니까, 이런 상처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제인은 먼지가 묻은 노인의 손을 툭툭 털어주고 담담하게 말했다.
“똑바로 걸으세요.”
제인을 멍하니 보던 노인은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루와 제인에게 가볍게 묵례한 뒤 발에 힘을 주며 그곳을 빠져나갔다.
주변은 더없이 고요했다.
제인은 뒤를 돌아서 입에 보석이 가득 물린 시체들을 조용히 보다가 짧지 않게 묵념했다.
그동안 루는 그녀를 말없이 보기만 했다.
잠시 후.
묵념을 마친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았다.
“가자.”
제인은 루의 손을 잡고 한참을 걸었다.
정처 없이, 발길이 닿는 대로 걷고 또 걷다가 강물이 흐르는 다리 한가운데에서 걸음을 멈췄다. 서서히 해가 지는 노을에 시선을 두었다.
“꼬마가 거지꼴로 길가에 앉아있길래 사과를 하나 줬거든. 그랬더니 울면서 할아버지를 찾아 달라고 하잖아. 겨우 찾으러 갔는데.”
제인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네가 있었어.”
이윽고 다리 난간에 팔을 포개고 기대어 섰다.
“서글펐어.”
하늘은 청명했다.
그 아래에는 붉게 물드는 석양으로 인해 보랏빛과 자줏빛 구름이 섞여 있었다. 마치 낮과 밤 그 어떤 경계에도 속하지 않는 시간처럼 보였다.
“바로 눈앞에 있는 네가, 너무 멀게 느껴져서.”
거리감.
제인이 루에게 거리감을 느낀 건 처음이 아니었다.
그의 눈에서 속절없는 공허를 보았을 때도, 호엘리반이 루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는 듯이 말했을 때도 느꼈던 감정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 이토록 멀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제인은 난간에서 상체를 일으키더니, 루의 차디찬 흰 손을 다시 잡았다.
“뭐랄까. 예전부터 느낀 건데 너는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것 같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제인은 먹먹하게 차오르는 안쓰러운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 마음이 어째서 길을 잃고 울던 꼬마와 상처투성이의 노인, 거품을 물고 죽어있던 시체들이 아니라, 여상히 서 있던 루를 향했던 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녀가 보기에 그는 너무나 아득한 거리에 있었다.
“넌 얼마나 오랫동안 쓸쓸하게 있었던 거야?”
루는 무겁게 덮이는 침묵 속에서 자신의 푸른 눈에 제인을 담았다.
그러다 입술에 곡선을 그렸다.
“아주 오랫동안.”
그의 아름다움이, 담담함이, 아득한 공허함이 제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목구멍 아래로 무언가 툭툭 치고 올라왔다.
“인간은 믿고 싶은 대로 믿어. 그러다 오해도 하고, 실망도 하고 그래.”
“알아.”
제인은 그와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네 곁에 있을게.”
“…….”
“쓸쓸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루가 빙그레 웃었다.
“연민인가?”
제인은 대답이 없었다.
루는 차디찬 품속으로 그녀를 끌어안으며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토록 금방 배울 줄이야.”
* * *
집으로 돌아온 제인은 루와 식사하면서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되었다.
보석을 문 채 거품을 흘리며 죽어있던 시체들은 루의 마석을 위조한 자들이었다.
“위조품이라니. 그건 아름다움을 능멸하는 거야.”
드호아망의 축제가 끝나던 날, 노인이 보석 세공사라는 걸 흘려듣고서 납치를 감행한 그들은 가짜 라라테를 만들도록 협박했다고 했다.
보석 세공사로서 긍지를 가지고 있던 노인이 거절하자 납치범들은 노인이 말을 들을 때까지 흠씬 두들겨 팼고, 그 흔적이 고스란히 멍과 상처로 남아있던 것이었다.
노인은 그들에게서 무차별적인 폭력을 당했고, 무하는 고아가 될 뻔했다.
고아였던 그녀는 무하를 떠올리자 그들의 죽음에 큰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당장 발견한 피해가 둘이지만 뒤에서 더한 짓을 하고 다녔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루가 말했다.
“그런 자들에게 묵념 따위를 하더군.”
그릇을 보며 식사하던 제인은 잠시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고개를 들고 말을 돌렸다.
“그런데 너 정말 고양이 아니야?”
“아니야.”
아니란 말이지.
제인은 루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정말로 뚫어져라.
시선을 피하던 루가 살짝 미간을 좁히며 티슈로 입술을 닦았다.
“아니긴 한데.”
대답이 석연찮게 바뀌자 제인의 목소리에 확신이 차올랐다.
“일부러 보여준 건 맞잖아.”
루가 부정하지 않고 짧게 대답했다.
“그래.”
“길고양이라도 마주쳤나 봐?”
포도주병으로 손을 뻗던 루는 우뚝 멈춘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그의 태도에 제인의 미간이 급속도로 좁혀졌다.
“고양이가 다친 참새를 물고 있었고?”
포도주를 따라 마신 루는 애먼 곳을 응시했고, 제인의 표정은 더 질색에 가까워졌다.
“그걸 나한테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구나.”
“…….”
“어째서?”
“드디어 기회를 주는 건가? 정답 맞추기 대회처럼 그것까지 맞추려던 건 줄 알았는데. 잠깐이지만 우승 트로피라도 준비해야 하나 싶었어.”
제인은 능청스럽게 농담하는 루를 향해 뒤숭숭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좋아할 줄 알았어?”
“그렇기도 하고.”
루는 비워진 잔에 다시 포도주를 따르더니 제인에게 밀어주었다.
“보아하니 세실의 시험에 들려면 한세월 걸리겠다 싶어서.”
웃음기를 닦아낸 루가 제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나직하게 말했다.
“자기 연민에 빠진 인간은 연민의 본질을 볼 수 없으니까.”
제인은 하마터면 루가 밀어준 포도주를 들이켤 뻔했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그리고 포도주가 든 잔을 다시 그에게로 밀어주었다.
“이제 확실히 알겠어.”
루의 고개가 약간 기울어졌다.
제인이 이어서 말했다.
“데시안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거짓말이 필요할 땐 교묘하게 말장난을 할 뿐이야.”
“그런 모습까지도 나야. 싫어도 어쩔 수 없어. 내일도, 모레도 이런 나와 함께 해야 해.”
“싫지 않아.”
제인의 대답에 루가 의외라는 듯이 웃었다.
“질색할 줄 알았더니.”
“고마워.”
되돌아온 잔을 들어 올리던 루는 제 귀를 의심하며 맞은 편을 보았다. 거짓말처럼 제인이 자리에 없었다.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 곁에 선 그녀가 루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덕분에 연민을 알았어.”
그의 손길이 닿아있는 투명한 잔 속, 붉은색 포도주가 소리 없이 일렁였다.
* * *
며칠이 지났다.
새끼 참새는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 잡아주는 벌레를 어찌나 잘 받아먹는지 살이 통통하게 올라왔다.
그러다 햇살이 좋은 날, 제인은 핍과 함께 참새의 집을 찾아주고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쯤.
제인은 오매불망 바라던 세실의 제자가 되었다.
물론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니까 가엽게 여기는 마음이라는 게…….
세실 앞에 선 제인은 페브리아에서 궁정 약제사 시험을 치를 때보다 더 긴장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목덜미를 문지르며 말을 이어갔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 거였어요. 연민은 보호받아야 하고, 도움이 필요하고, 약한 것들을 보살펴요. 자랄 수 있게 하고, 살게 해요.
-…….
-……제가 살면서 받았던 연민은 유난스러운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거였어요. 그걸 위선이라고 생각했던 건…….
제인이 크게 심호흡하고 마침표를 찍었다.
-그들의 선의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제 왜곡이었어요.
세실은 파탐의 재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줄도 모르는 듯이 멍하니 물고 있다가 인상을 팍 구겼다.
-누구야.
-네?
-누가 도와줬어.
-…….
-내가 내준 과제가 쉬운 거였는 줄 알아? 혼자서는 일 년은 걸릴 과제였다고. 프시오한테도 이것만큼은 도와주지 말라고 골백번도 더 얘기했는데 대체 누가…….
그녀는 황당함을 실어서 물음표를 던졌다.
-루?
제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옆으로 흘렸다.
그리고 미세하게 주억거렸다.
세실은 한바탕 오만가지 욕을 하면서 파탐이 동이 나도록 다 피우고서야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정신계 치유 마법사가 되는 방법은 자신의 가장 깊고 어두운 내면을 직시하는 관문을 넘는 거다. 하지만 넘지 못하면 정신이 완전히 망가질 수도 있어. 그래도 해야겠니?
제인의 대답은 간결했고.
-네.
그 대답을 들은 세실의 감상은 저주 같았다.
-넌 끝까지 못 하고 포기할 거다.
-그 말씀.
제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픽 웃으며 말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되새길게요.
-꼴통 새끼.
짧게 욕하던 세실은 두 손으로 얼굴을 벅벅 쓸어내리다가 무어라 중얼거렸다.
-내 안식년. 내 팔자. 개 같은 것들…….
그렇게 제인은 무사히 세실의 제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