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53)화 (53/168)

53.

호엘리반은 앙디스인이었음에도 결코 앙디스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사내들의 안색이 무참히 어두워져 갈 때였다.

루가 흘러가는 투로 말했다.

입가에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은 채.

“그런데 봉인에서 완벽하게 풀린 게 아니거든.”

그 모호한 말에 사내들은 희망을 걸어도 될지, 아니면 절망밖에 남지 않은 건지 좀처럼 분간하기 어려웠다.

“자, 이제 생각을 해봐.”

루가 즐거움이 실린 투로 말했다.

“너희 선대의 세 치 혀로 아주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던 데시안이 세상 밖으로 나왔는데, 그 봉인마저도 완벽하게 풀린 게 아니었을 때.”

루는 나른한 몸짓으로 턱을 괴며 사내들을 내려다보았다.

“기분이 어떨지.”

사내들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입 안이 바짝 말라서 침을 삼키자 입천장이 비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꽤 나쁘지 않았을까?”

한 사내가 바닥에 바짝 엎드리며 말을 더듬었다.

“사, 사, 살려 주십시오…….”

루의 미소가 짙어졌다.

“살려주었잖나. 지금까지.”

“…….”

“질문을 바꿔보지. 너희와 같은 인간도 아니고, 데시안인 내가 봉인이 풀리고 나서도 앙디스인을 살려 둔 이유는 뭐였을까?”

테이블에서 내려온 루가 다시금 그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재차 말문을 열었다.

“뭐였을까.”

서늘한 목소리가 깃든 물음이 언뜻 독백처럼 들리기도 했다.

냉랭한 정적이 이어졌다.

사내들이 공포로 점철된 침묵을 견디는 동안, 루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서늘한 시선이 닿은 곳은 갖가지 보석이 쌓인 테이블 위였다.

일순, 테이블 위를 훑어 내리던 푸른 눈동자가 우뚝 멈췄다.

루의 눈길을 머물게 한 것은 그가 되찾으러 온 라라테가 아니었다.

사파이어였다.

삼 페렐츠도 안 할 것 같은 싸구려 모조품이 아닌, 한낮의 빛을 머금고 청량한 푸름을 발산하는 진짜 사파이어.

그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자 우습게도 모든 게 설명되었다.

앙디스를 떠나지 못했었던, 봉인이 풀리고도 앙디스인을 살려두었던, 1세기가 지나서도 그들을 기다린 이유까지, 모조리.

속아 주었던 거다.

믿음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데시안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자비가 속아 주는 것 외에는 없었던 것이었다.

루가 소리 없는 웃음을 흘릴 때였다.

살얼음판 위에 있는 기분으로 침묵을 견디며 그의 발끝을 바라보던 한 사내가 떨어뜨렸던 단검을 슬쩍 주우려 했다.

어느새 곁에 선 루가 그의 손등을 지그시 밟았다.

“윽……!”

손뼈가 우두둑,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고통에 찬 앓는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그게 뭐가 되었든, 여기서 중요한 건.”

루는 부서진 손을 누르듯 밟으며 그들을 지나갔다.

“너희가 이 자리에서 죽는 게 앙디스인이라서가 아니라.”

곧이어 보석이 쌓인 테이블에서 라라테를 주워들고 한쪽 눈을 살짝 감은 채 햇빛이 쏟아지는 창문가에 비춰보았다.

“내 것에 손을 대었기 때문이야.”

네 개의 라라테를 다 챙긴 그가 테이블 끝을 살짝 들어 올렸다. 쌓인 보석들이 중력을 거스르지 못하고 바닥에 와르르 쏟아졌다.

“나를 위해서 죽어 줄.”

한낮의 햇살에 저마다의 빛을 내었다.

“단 한 명의 인간을 위해, 오래전부터 하나하나 정성 들여 만들어 온 것을…….”

고요한 공포로 가득 찬 실내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게 멈춘 것 같은 곳에서 루는 바닥에 쏟아진 보석 하나를 장난스레 툭, 차며 말했다.

“감히, 너희 따위가.”

* * *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는 가히 처참했다.

눈은 죄다 흰자위만 보이게끔 까뒤집혀 있었고, 입 안에는 터질 듯한 보석들을 한가득 문 채 거품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 처참한 현장을 만들어 낸 루가 더러운 것이라도 보듯 눈길도 주지 않고 그곳을 벗어나려던 찰나였다.

끼릭…….

구석에 있는 좁은 문 쪽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려왔다.

루는 소리가 난 문 쪽을 물끄러미 보다가 한 걸음 한 걸음 느릿하게 걸어갔다.

문고리를 잡고 여는 순간, 그의 입가에 비소가 걸렸다.

“뭘까, 이건 또.”

* * *

그 시각.

제인은 과일 가게 앞에서 곤란한 표정으로 오도 가도 못 하고 서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사소했다.

과일 가게를 나오면서 거지꼴로 앉아있던 어린 소년을 발견했다.

제인은 아무것도 본 못 듯이 휙 지나칠 수가 없었다. 연민의 참된 의미를 깨우친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래서 소년에게 사과 한 알 쥐여 주고 지나가려 했다.

그러려고 했는데.

“……도와주세요.”

소년이 제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이 아닌가.

그 바람에 제인은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때, 앞서 걸어가던 라트올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소년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뭐해요. 식육점에 가야 하는데.”

라트올의 말에 소년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밑을 내려다보자, 커다란 눈망울은 수도꼭지라도 되는 것처럼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가 뚝뚝 떨어지기 무섭게 다시 차올랐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좀…… 찾아주세요…….”

“…….”

얘야.

치맛자락 좀 적당히 잡아 당겨줄래?

제인이 말없이 계속 서 있자 라트올은 한 번 더 재촉했다.

“안 갈 거예요?”

“라트올, 그거 알아요?”

“아니요.”

저게 진짜 듣지도 않고.

“오늘이 저한테는 특별한 날이거든요. 연민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역사적인 날이라. 그래서 말인데요.”

제인은 벗겨질 듯한 치마를 부여잡고 이어서 말했다.

“같이 찾아볼 생각은?”

“있겠어요?”

“딱 봐도 없어 보이긴 한 데.”

“정답.”

라트올이 가볍게 뒤돌아섰고, 제인도 어깨를 으쓱거리며 등을 돌렸다.

* * *

대체 얼마나 걸었을까.

드넓은 드호아망을 제법 돌아다닌 제인은 벤치 의자에 앉아 잠시 숨을 돌리는 중이었다.

그녀의 곁에 앉아있는 무하는 오랫동안 굶었는지 사과 한 알을 통째로 씨앗 째 씹어 먹고도 시장에서 사 온 빵을 허겁지겁 흡입하고 있었다.

“천천히 먹어.”

무하는 제인이 건네주는 우유를 받으면서 고개를 끄덕였으나, 좀처럼 먹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제인은 벤치 등받이에 기대어 잠시 눈을 감았다.

무하의 말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드호아망의 축제를 보고파 하는 저를 위해서 타지에서 왔다가 갑작스레 행방불명되었다고 했다.

그런 이유로 근방에는 무하와 어르신을 아는 지인도 없을뿐더러, 무하가 그린 노인의 몽타주는 오랑우탄 발가락으로 그리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엉성했다.

제인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몽타주 그림을 다시 꺼내 보았다.

동그라미 안에 눈, 코, 입으로 추측되는 점들이 군데군데 찍혀 있었고, 가장 위에는 머리카락으로 추정되는 것이 세 가닥 삐쭉삐쭉 나 있었다.

그게 다였다.

“…….”

막막해하고 있던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되게 무능한 인간이구나.”

라트올이었다.

어느새 장을 다 보았는지 양손에 한가득 식자재 봉지를 들고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제인은 인상을 구기며 다시 몸을 앞으로 돌려 앉았다.

“행방불명된 사람 찾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요?”

“쉬운 일이에요. 당신은 그 쉬운 일을 어렵게 하고 있고요.”

“무슨 뜻이에요?”

이전보다 더 얼굴을 찌푸리며 묻자, 라트올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나왔다.

“핍.”

“핍?”

“호엘리반이 훈련 시킨 부엉이 맞죠? 불러서 인상착의를 자세하게 말해주면 찾아 줄 거예요. 그 하등 쓸모없는 몽타주는 갖다 버리고요.”

“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제인이 탄식하며 이마를 치는 사이 라트올은 이동의 문을 열고 발걸음을 옮겼다.

“전 식자재 정리해야 해서 먼저 집에 가요. 연민인지 뭔지 실컷 하세요.”

제인이 기분 좋게 씩 웃었다.

“잘 가요, 부엌 요정님.”

“전 님프가 아니라 메 데시안, 저기요, 말하고 있는데 가는 게 어디 있…….”

허.

라트올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핍을 불러서 제멋대로 가버리는 제인을 어처구니없다는 듯 보다가 루를 떠올렸다.

“잘 어울려. 더럽게 잘 어울려.”

* * *

핍이 제인에게 안내한 곳은 술집이었다.

이런 대낮에 행방불명된 노인을 찾으러 가기에는 아주 어색한 감이 없지 않았다.

“저기가 맞아?”

핍은 가슴을 쭉 내밀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감 있는 태도.

“핍, 너 멋진 녀석이구나?”

핍은 기분이 좋은지 부드럽게 날개를 펼쳐서 허공을 한 바퀴 크게 돌았다.

그 사이 제인은 얼굴에 눈물 자국이 말라붙어 있는 소년을 보며 말했다.

“부엉이랑 여기서 기다려.”

“……워요.”

소년은 자신의 목소리가 작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한번 더 말했다.

“고마워요.”

“인사가 이르네. 아직 찾은 것도 아닌데.”

“……누나 말고는 없었어요.”

소년이 울먹거리며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가 사라지고 나서 사람들한테 도와달라고 했는데…… 아무도…….”

제인은 보육원 아이들이 떠올랐다.

누가 오든지 간에 노려보기 바빴던 제인과는 달리 대부분은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제법 친해진 봉사자들이 오는 날에는 달려가 선물을 받고 꽃처럼 활짝 웃던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덜떨어진 머저리들.

너희를 불쌍하게 보는 인간들이 뭐가 좋다고 실실 웃는 거야?

그랬었는데,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았다.

보육원 아이들과 무하의 마음에는 누군가가 건네주는 선의의 연민이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있었던 거다.

타인에 대한 미움과 스스로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차 있던 자신과는 다르게.

제인은 말없이 소년의 머리를 가볍게 톡톡 두드리고 건너편 술집으로 걸어갔다.

술집 문은 굳게 잠겨져 있었다. 손으로 그늘을 만들어서 문 안쪽을 들여다보았으나 정적 그 자체였다.

핍이 헛다리를 짚은 걸까.

피어오르는 의구심에 제인이 도리질했다.

페브리아에서 루의 새들은 제인이 언제 어디에 있든지 항상 찾아왔었다. 그녀는 핍을 믿고 다시 살펴보았다.

그러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발견했다.

그녀는 까마득하고 가파른 계단 위를 가만히 보다가 한 칸씩 올라갔다.

어두운 구간을 지나자 어슴푸레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의 풍경까지도, 서서히.

이윽고, 제인의 입에서 부름인지 탄식인지 알 수 없는 이름이 흘러나왔다.

“루…….”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