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남자들은 몸을 일으켜 세우고 품에 가지고 있던 단검을 꺼내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뒤로 힐끔 돌아봐도 잠긴 문이 열린 흔적은 없었다.
문으로 들어온 게 아니다.
마법사인가?
머릿수로는 그들이 우세했으나, 마법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경계심을 잃지 않는 상태로 조용히 불청객을 위아래로 훑었다.
칠흑 같은 검은 머리.
푸른 동공.
서늘한 미소가 황홀한 남자.
분명 낯선 얼굴인데 이상하게 낯익은 익숙한 모습이었다.
긴장한 남자들과 달리 불청객은 여유가 낙낙한 자태로 뒷짐을 진 채 남자들 주변을 걸었다.
“누가 이렇게 귀여운 짓을 했나 했더니.”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끝맺었다.
“앙디스인들이었군.”
“!”
“인간들의 피는 뭐랄까, 못 속인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어.”
앙디스인들은 다리를 주춤거리며 손에 든 단검을 재차 바로 잡았다. 그러나 그 순간, 공기가 무거워지면서 숨이 막혀왔다.
불청객이 나른한 웃음을 흘렸다.
“세대가 바뀌어도 치졸하고 영악하게 구는 건 여전하니 말이야.”
남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은 둘째치고 무거워진 공기로는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그들은 질식의 공포에 허우적거리며 눈이 터져 나올 것처럼 커졌고, 단검을 쥔 손들이 하나같이 부들거렸다.
결국 단검을 놓친 이들이 바닥에 엎드린 채 침을 질질 흘렸다. 그들의 몸에서 막연한 두려움이 흘러나왔다.
불청객이 남자들 앞에서 몸을 낮춰 앉았다.
곧이어 무언가 깨달은 듯 아, 하고 한 남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가끔 조절이 안 돼서.”
돌연 공기가 가벼워졌다.
남자들은 하나같이 허덕거리며 밭은 숨을 내쉬느라 바빴다.
불청객은 어깨를 두드려 주었던 남자의 머리칼을 움켜잡은 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너희 선대들이 나를 참 사랑했지.”
“……!”
“말로만.”
앙디스인들은 그제야 그가 누군지 알아챘다.
백 년 전, 선대 앙디스인들이 신처럼 받들어 모셨던 현혹의 데시안.
루였다.
* * *
추기경 말렌 렌드만은 소문 때문에 종종 골이 아팠다.
소문이라는 게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저 귀로만 들리는 것이었다면 이 정도로는 머리가 지끈거리지 않았을 것이다.
골머리를 앓고 있는 연유는 그가 지닌 특수한 마나의 힘 때문이었다. 그의 마나는 페브리아와 교황청과 관련한 소문들이 귀가 아닌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정말로 끊임없이.
웅웅. 윙윙.
처음 마나가 발현되었을 땐 정신이 나가버릴 정도로 신경이 과민해지곤 했으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지 않던가.
시간이 지나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한 가지 다행인 건 소문을 들을 수 있는 영역이 페브리아의 결계 안이라는 점이었다.
생각보다 소문은 매일 새롭게 생겨나지 않았다.
페브리아와 교황청과 관련한 소문이라는 제약과 더불어 소문이 되기까지는 적어도 백 명 이상의 입에 일정하게 오르내려야 했다.
그저 한 번 골치 아픈 소문이 퍼져나가면 골이 흔들릴 정도로 두통이 몰려왔는데 요즘 그런 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주먹으로 머리를 퍽퍽 치고 싶은 걸 꾸역꾸역 참아가며 마드리안에게 인사를 올렸다.
“부르셨습니까, 교황님.”
“예.”
마드리안은 책상 위에 있던 말렌의 보고서를 손톱으로 톡톡 두드렸다. 중후한 목소리에 만족스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소문을 신속하게 추적하고 진상까지 정확히 파악했더군요.”
소문을 추적하는 일.
더 나아가 소문의 진상을 파악하는 일.
때로는 소문을 퍼트리는 일.
마드리안이 말렌을 곁에 두는 가장 큰 이유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말렌은 두통 때문에 거들먹거릴 힘도 없었다.
그답지 않게 말없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더불어 이번에도 제 몫을 해냈다는 안도감에 마른침을 삼키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마드리안이 재차 입술을 뗐다.
“노예가 된 페브리아인들을 찾아서 다시 앙디스인으로 교환을 추진하세요. 페브리아 한 명당 앙디스인 두세 명으로, 최대한 빠르고 조용히.”
“예, 교황님.”
“그리고 페브리아인을 노예로 맞바꾼 앙디스인들은.”
말렌은 다시 마른침을 삼켰다.
이번엔 어떻게 하시려나.
마드리안은 이 나라와 종교에 흡수되지 못하고 유일하게 반란과 문제를 일으키는 앙디스인들을 결국 쳐내고자 했다.
그렇게 타국에 파견을 명목으로 헐값에 노예로 팔아넘기던 중이었다. 바퀴벌레 같은 앙디스인들도 처리하고, 소소하게 이익도 얻고.
말할 것도 없이 일거양득이었다.
문제는 이 일이 암암리에 진행되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만약 교황청에서 공식적으로 이 일을 거론하게 된다면 수습해야 할 시간과 비용, 그리고 인력이 더 많아질 상황이었다.
그런 이유로 앙디스인에게 노예 교환을 가지고 벌을 내릴 순 없었기에 마드리안은 소란스럽지 않게 일을 처리하길 바랐다.
그리고 페브리아인을 노예로 맞바꾼 겁도 없는 앙디스인들.
마드리안이 그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말렌은 감조차 잡지 못했을 때였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말렌.”
“예. 예?”
말렌은 멍청하게 나온 대답이 두통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싶었으나 그게 더 구차한 것 같다는 생각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어버버거렸다.
“아, 예, 저는, 그러니까.”
“마음 같아서는 집단 화형을 시켜버리고 싶은데 말이죠.”
말렌의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식은땀이 비질 나왔다.
“안 됩니다. 지금까지 만들어 놓은 교황청의 이미지에 큰 타격이 있을 겁니다. 페브리아에서 처형이나 화형은 이단으로 확정되었을 때나…….”
설마.
앙디스인들을 지금까지 이단으로 내몰지 않았던 이유는 패전국에 한한 방침이 가장 큰 이유였다. 샤로 교화되기 이전에 이단으로 내몰 수 없다는, 몹시 너그러운 방침.
“방침을 바꾸시려는 겁니까?”
“마음 같아서는요.”
방침을 바꾼다는 건 종교의 뿌리가 흔들릴 일이었다. 말렌이 이번에도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이려 했으나, 마드리안의 목소리가 조금 더 빨랐다.
“하지만 그럴 순 없으니 아주 살짝 비틀어보려 합니다.”
말렌의 안색은 벌써 하얗게 질려있었다.
아주 살짝.
뭘 비트시겠다는 겁니까.
암만 생각해봐도, 교황님께서 비틀고자 하시는 건 앙디스인들의 모가지 말곤 없을 것 같은데요. 더군다나 살짝 비틀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만…….
그때 마드리안이 쓰고 있던 안경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백 년 전, 앙디스인들이 신처럼 모셨던 존재가 악마라는 건 제법 유명한 일화죠.”
말렌의 시선이 마드리안의 안경 옆에 수북이 쌓인 역사서로 향했다.
며칠 동안 밤낮으로 무슨 책을 그리 읽으시나 했더니, 이제는 학자들에게마저 관심 밖으로 사라진 백 년 전 앙디스의 역사를 찾아보셨구나.
그 일화에서 근거를 찾기 위해서이리라.
마드리안이 말을 이었다.
기분 좋은 미소가 걸린 얼굴로.
“그런 의미로 이건 어떨까 싶습니다. 모종의 이유로 봉인되었다는 악마가 깨어나고 앙디스인들이 다시 그 악마를 믿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은밀하게.”
순간, 말렌의 머릿속에 샤의 방침 하나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샤의 찬란한 믿음을 어둠으로 물들이는 자가 있거든 벌하라.’
그걸 이용하시려는 거구나.
하얗게 질려있던 말렌의 얼굴은 이제 새파랗게 되어갔다. 말렌의 낯빛이 어떻게 되거나 말거나 마드리안은 역사책 한 권을 앞에 두고 의미 없이 차르륵 넘겼다.
“그 정도면 이단이 아니어도 처형대에 올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녀가 페브리아를 위해서 원하는 방향대로 조용히 움직이려 할 때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이를테면 회유, 협박, 절도.
때로는 모함.
그리고 그녀를 모시는 말렌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페브리아의 최고위 성직자가 저를 곁에 두는 이유 중 하나.
소문을 퍼트리는 일이었다.
나머지는 마드리안 데 칸의 손안에서 조작될 소문을.
그녀의 중저음이 신호탄처럼 쏘아 올려졌다.
“사탄을 사냥해 보도록 하죠.”
* * *
불청객의 정체를 깨달은 앙디스인들은 사색이 되어 굳어버렸다. 루에게 머리카락을 잡힌 사내는 두려움과 한기로 인해 몸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너희 선대들은 내게 그토록 달콤하게 사랑을 속삭였으면서, 날 위해서 하찮은 목숨 하나 내놓지 못했어.”
머리칼을 움켜잡은 손에 힘이 더 실렸다.
“단 한 명도.”
돌연 지나간 목소리들이 루의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여기 아름다운 현혹의 데시안 님께 앙디스의 이름으로 고하오니, 목숨을 다해 온 마음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맹세합니다!
-맹세합니다!
-맹세합니다!
그는 푸른 눈을 곱게 접으며 생각했다.
나는 그 말을 믿었던가?
그럴 리가.
데시안에게 믿음이란 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 나는 왜 앙디스를 떠나지 못했었나.
무엇 때문에.
그때, 옆에서 땅바닥을 짚고 있던 자가 멀건 얼굴로 더듬거렸다.
“보, 봉인, 봉인되었다고…….”
루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푸른 시선과 마주친 사내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압박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루는 발발 떨고 있는 다른 사내의 머리카락을 풀고 느릿하게 일어나서 그들을 지나쳐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창문을 열자 온도가 낮은 깨끗한 공기가 훅하고 들어왔다.
그는 이어서 가까운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후대 앙디스인 하나가 봉인을 깨주었지.”
그의 말에 사내들의 낯빛에 일말의 희망이 반짝거렸다. 정말로 앙디스인이 루를 봉인에서 구해주었다면 저희를 해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너희도 그 녀석을 알 텐데.”
그러나 이어서 나오는 이름에 다들 말문이 턱 막혔다.
“호엘리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