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다음 날, 늦은 아침.
제인은 부엌 식탁에 앉아서 깍지 낀 손에 이마를 받치고 괴로워하다가 고개를 쓱 들었다.
머리는 산발에 눈 밑은 퀭했다.
그녀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핍. 꿈이라고 말해줘.”
맞은편 선반 위에 있던 핍은 그녀의 어둑한 눈을 마주치고는 움찔거리다가 시선을 회피했다.
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천천히 핍에게 다가갔다.
“너 말 못 해? 너라면 할 수 있잖아.”
아주 조금, 광기 어린 눈을 하고서.
“해. 괜찮으니까 말해. 내 머릿속 잔상들이 제발, 제발 꿈이라고 말해 달라고.”
푸드덕!
핍은 제인의 손이 닿지 않게끔 아슬아슬하게 날아서 부엌 창문 밖으로 도망갔다.
쿵. 쿵.
제인은 선반의 기둥에 머리를 갖다 박았다. 그런데도 드문드문 떠오르는 자신의 지랄 맞은 술주정은 잊히지 않았다.
쿵. 쿵. 쿵.
“……미치겠네.”
“이미 미친 것 같은데요.”
“악!”
기둥에 머리를 박던 제인은 놀라 자빠질 듯이 소리를 질렀다.
옆을 돌아보자 처음 보는 사내가 식자재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누구세요?”
“라트올.”
부드럽게 곱슬곱슬한 복숭아색 머리에 옅은 갈색 눈동자를 가진 그는 네모난 무테안경을 착용하고 있었다.
미인.
당장 그 말이 떠오를 정도로 미모가 상당히 출중했는데, 선이 진한 미남보다는 미소년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겉으로만 봐서는 제인의 또래이거나 조금 더 어려 보였다.
제인이 아무 말이 없자 라트올은 호박 한 덩이를 꺼내더니 요리조리 살피며 물었다.
“소개가 부족해요?”
그건 아닌데.
제인이 고개를 젓기도 전에 그가 말을 이었다.
“메 데시안. 루의 조수. 그리고 식자재 담당.”
“아……. 루에게서 들었어요. 반가워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제인은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누구를 만나도 반갑지 않을 만큼 제인의 머릿속에는 끔찍한 말이 계속 맴돌았다.
-누가 날.
제발.
-불쌍하게 보는 게.
그만.
-제일 싫어.
“으, 미친!”
쿵.
제인이 한 번 더 머리를 박았다.
라트올은 제인이 그러거나 말거나 하부장에서 식칼과 도마를 꺼내어 호박을 큼지막하게 퉁퉁 잘랐다.
그리고 찜기에 물을 받으며 물었다.
“미친 건 미친 거고 꿀 넣고 호박 찔 건데, 먹을래요?”
“맛있어요.”
꿀이 녹진하게 흐르는 호박이 입 안에서 뭉그러졌다.
“수치스러울 때 먹기 좋은 달콤함이랄까.”
제인이 초점을 잃은 얼굴로 앞뒤 안 맞는 말을 중얼거리자 라트올은 냠, 하고 호박을 떠먹으며 무신경한 투로 말했다.
“그럼 수치스러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해 먹어요. 잘라서 꿀 넣고 적당히 찌면 되니까 닭대가리가 아닌 이상 할 수 있어요.”
닭대가리…….
“묘하게 위로가 안 되네요.”
“괜찮아요. 위로한 거 아니니까.”
메 데시안이라고 했던가.
‘저건 인간이 아니다.’라는 문장을 되뇌어야 할 또 다른 존재의 만남에 조용히 통탄했다.
“필요한 식자재 있으면 지금 말하세요.”
라트올은 라라테 위조품 사건 때문에 어제 장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잔뜩 구매했던 사과조차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느라 한 알씩 야금야금 먹고 없어서 다시 사야 했다.
제인이 물었다.
“장 보러 가는 거면 같이 가도 돼요? 바람 좀 쐬고 싶어서요.”
라트올이 목을 긁적거렸다.
딱히 유쾌한 제안은 아닌 듯했다.
“불편하면 말고요.”
“뭐 불편할 건 없어요. 이거 먹고 잠깐 눈 좀 붙이다가 나갈 거예요. 현관문 두드리면 나오세요.”
되게 불편해 보이는데.
그럼에도 제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라트올을 따라 시장에 가게 되면 혼자서도 다녀올 수 있도록 주변을 꼼꼼히 살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라트올이 물었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아요?”
“뭐가요.”
“손잡고, 안고, 함께 자고.”
그가 호박을 떠먹으며 말을 이었다.
“인간들은 그런 거 사랑하는 사이에서나 할 법한 것들이잖아요.”
……사랑?
그의 말에 웃음이 터진 제인은 입에 물고 있던 숟가락을 테이블 위에 두었다. 그리고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한바탕 깔깔거렸다.
한참을 웃던 그녀는 맺힌 눈물을 쓱 닦아냈다.
“너무 웃기다. 사랑?”
라트올은 무표정한 얼굴로 보다가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실소를 터트렸다.
“당신은 루가 사랑이 뭔지 안다고 생각해요?”
제인이 두 손을 들며 능청스레 말했다.
“그런 건, 나도 모르는데.”
“…….”
“루는요, 나를 브로디 쯤으로 생각한다고요.”
“……브로디가 뭔데요.”
“개요, 개. 개새끼 할 때, 그 개요.”
“…….”
“그리고 루는 현혹의 데시안이잖아요. 작정하고 홀리는데 어떻게 안 넘어가요? 인간은 그런 걸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아요.”
이어지는 그녀의 야무진 말에 라트올은 기가 찼다.
“나도 그 정도는 안다고요.”
바로 그게 인간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에 빠진 모습이라는 걸 루와 당신 빼고는 다 알 텐데.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나도 알 만큼.
그리고 생각했다.
내 주인님이 참 힘든 길을 걷겠다고.
그리고 제인이라는 이 인간도.
* * *
배를 채운 제인은 안뜰로 걸음을 옮겼다.
공복이었을 때보다 차분해진 그녀는 나무 의자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집 안뜰에는 아침 햇살과 찬 바람, 그리고 낙엽이 진 앙상한 나무들이 즐비했다.
제인은 앙상한 나무를 좋아했다.
정확하게는 아무것도 없는 가지에서 작고 여린 새 잎사귀가 돋아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그 순간을 좋아했다.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봤을 때 행복과는 거리가 먼 그녀의 삶이었다 할지라도, 그저 다른 이들보다 겨울이 조금 더 길고 더디게 지나갈 뿐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그렇게 하염없이 청명한 하늘과 하늘 높이 쭉쭉 자라난 마른 나뭇가지를 올려다보는데 뒤에서 창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인.”
제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뭐지? 아직 일어날 시간이 아닌데.
“부르면 봐야지.”
“어…… 일어났어?”
왜?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제인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물음을 애써 떨치며 어색하게 돌아보자, 루가 창문틀에 팔을 얹고 방긋방긋 웃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었지?”
뭐 하고 있긴.
지난밤의 과오를 반성하고 정신도 좀 차릴 겸 바람 쐬고 있었지.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제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배시시 웃었다.
“응, 광합성.”
“그렇군. 나는 좀 더 자고 싶은데.”
“너무 좋은 생각이다. 창문 닫아줄까?”
물어보는 말과 달리, 제인의 손은 이미 창문으로 뻗고 있었다.
루는 창문틀에서 몸을 떼어내고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닫고 와.”
닫히는 문틈 사이로 들린 그의 말에, 제인은 그대로 멈추어 섰다.
“응?”
“와. 침실로.”
“……응?”
잠시 후.
제인은 무척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랄까. 넌 심보가 틀려먹었어.”
결국 루의 손에 이끌려 온 제인은 그의 품에 안긴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
“드문드문 기억한다고.”
“그렇겠지.”
그녀는 보지 않고도 그의 표정을 확신했다.
산뜻하게 웃고 있으리라.
제인이 가장 기함을 토했던 건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 속 대사가 모두 한결같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전날 밤의 술주정이 재차 떠올라 괴로운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잖아.”
“보기 좋아.”
“…….”
“몹시.”
깊은 한숨을 내쉬던 제인은 라트올의 말을 떠올렸다.
-손잡고 안고 함께 자고. 인간들은 그런 거 사랑하는 사이에서나 할 법한 것들이잖아요.
그녀는 루의 품 안에서 사랑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신을 현혹의 데시안이라 일러 주었다. 현혹하는 것이 존재 이유라는 말을 덧붙이며.
단지 그의 품도, 손길도 싫지 않았다.
언제나 싫었던 건 싫지 않다는 걸 들키는 거였다.
그때 루가 제인을 더 당겨 안고 뒷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온기가 도는 두피 사이로 차가운 손끝과 손톱이 맞닿을 때마다 오싹거리면서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네 주량은 두 병 반이더군. 다음부터 밖에 나가서는 한 병 정도만 마시도록 해.”
“다시는 안 마셔.”
루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건 인간의 특기인가? 취미? 그게 아니면 재능?”
“또 마시면 그거 사람 아니야. 개지.”
“아, 기쁘군.”
그의 여유로운 웃음이 제인의 귓가에 가벼운 꽃잎처럼 떨어졌다.
“평생 내 강아지로 살고 싶어서 안달인 모양이라.”
지난밤의 비루한 술주정뱅이는 데시안의 재수 옴 붙은 빈정거림을 이길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말릴 뿐이었다.
“실컷 놀려 먹었으면 이제 좀 풀어줄래.”
루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싫은데.”
“이만하면 됐잖아.”
“불편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서 이렇게 품에 안겨 있는 것 자체가 무척 즐겁거든.”
“네 즐거움은 도대체가…….”
제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난밤의 술주정이 다시 귓가를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한참을 그의 품에서 끙끙거리며 괴로워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해가 중천이 뜬 시간에 잠드는 것.
잠들기 전에 독과 해독제를 준비하지 않는 것.
루와 계약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에게는 꿈만 같은 일이었다.
그렇게 목을 조르는 악몽이 서서히 잊히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꿈을 꾸지 않았던 것처럼.
* * *
제인이 다시 일어났을 때는 한낮이었다.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부스스하게 눈을 뜨고 창문을 열자, 루가 안뜰에 한가운데에서 한쪽 무릎을 굽힌 자세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언제 일어났어?”
루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조금 전에.”
뭘 보고 있는 거야?
제인은 눈을 비비며 안뜰로 나갔다.
햇살은 아침보다 더 따스했다. 루의 곁에 같이 쪼그려 앉아서 그가 보고 있던 것을 확인했다.
참새였다.
다리가 꺾인 새끼 참새.
“어디서 떨어진 거지?”
제인이 두리번거리며 보았으나 새집으로 유추되는 게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침에 어떤 나뭇가지에서도 새집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었다.
루가 말했다.
“고양이가 가지고 놀다가 버렸을지도 모르지.”
제인은 날지도 못하면서 파닥거리는 참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곁에 앉아 있던 루가 느릿하게 일어섰다.
“더 구경하다 와.”
“어디가?”
“일이 있어서 나가봐야 해.”
“이건 어떡하고.”
루는 참새를 가리키는 제인을 물끄러미 보다가 느긋하고도 의뭉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말했지 않나, 구경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