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49)화 (49/168)

49.

만일 루가 인간이었다면 정상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구태여 인간의 시선으로 봐서 혼란하고 괴로운 것은 제인의 몫이었으므로 최대한 다른 시각으로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우습게도 노력하다 보면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한 가지 더 놀라운 점이 있었다.

그건 루가 나름대로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밤부터 새벽 사이에는 지하 작업실에서 일하거나 마석을 입고하기 위해 외출하곤 했다. 동이 틀 때쯤에 침실로 들어와서 잠을 청했고, 정오가 지나서 일어났다.

그리고 시를 읽었다.

시.

제인은 문학을 포함하여 예술과는 눈곱만큼도 관련 없던 인생이었기에 시를 읽는 데시안이 신기했다.

호기심에 그의 옆에서 시집을 뒤적거렸으나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서 곧바로 덮어 버린 적도 있었다.

그렇게 평화로운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똑똑.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창밖에서 핍이 유리를 쪼고 있는 게 보였다.

핍은 제인이 열어 준 창문 틈으로 푸드덕거리며 들어왔다.

발톱에는 프시오의 이름이 적힌 편지 한 통을 꽉 쥐고 있었다.

편지를 펼치자 뜻밖의 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서두는 밀리타와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었다.

[암살자이든 뭐든 그런 건 제게 큰 위험이 아닙니다. 당신을 골목길에서 구해주었던 자라고 하니, 저도 뵙고 인사하고 싶습니다.]

제인의 예상과는 다른 답변이었다.

재차 곱씹어 읽어 봤으나 문장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제인은 살짝 머리를 짚었다가 다음 내용으로 넘어갔다.

[로안나 씨와 엔니오 씨에게 그런 일이 있었군요. 되도록 빨리 네르기니로 가보겠습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더 늦게 알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소식 전해줘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연보라색 머리카락에 백금빛 눈동자를 가진 마법사는 본 적이 없습니다만,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인이 고민스러워하며 적었던 부분도 빠지지 않았다.

[세실은 당신이 치유 마법의 가르침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확인하는 중입니다. 일종의 시험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스스로 벽을 뛰어넘길 바랍니다.]

“스스로 뛰어넘어야 한다고…… 벽을?”

제인은 벽이 아니라 땅굴을 파고 들어가고 싶을 만큼 우울해졌다.

* * *

아삭.

라트올은 방금 산 과일 봉지에서 사과 한 알을 꺼내어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단단한 사과를 씹을 때마다 달콤한 과즙이 터져 나왔다.

만족스러운 구매를 하고서 기분 좋게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잘 좀 보게나. 내가 눈이 나빠진 건지, 원.”

“라라테도 위조품이 있나?”

“에이, 이 양반아. 등급이 좀 낮은 거겠지. 위조품일 리가 있나. 축제 때 상금으로 받은 거라던데?”

발걸음을 우뚝 멈춘 라트올은 소리가 난 쪽으로 몸을 돌렸다. 대장장이로 보이는 두 사람이 벨벳 주머니 속에 든 마석을 심각하게 보고 있었다.

라트올은 그들에게 자박자박 걸어갔다.

“그거, 제가 좀 봐도 될까요.”

* * *

“입맛에 안 맞는 건가.”

함께 저녁 식사 중이던 루가 물었다.

제인은 평소와 달랐다. 딱히 깨작거리며 먹는 것은 아니었으나 어딘가 침울해 보였다.

“아니. 엄청 맛있어서 황홀해.”

“말과 행동이 다른데.”

“그건 너한테 배웠고.”

“…….”

그녀가 기운 없이 말을 이었다.

“내 학습력에 놀랐구나? 앞으로도 노력할게.”

루는 말없이 핍을 슬쩍 보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또 세실을 찾아갔었나 보군.”

그의 말에 제인은 손에 쥔 포크와 나이프를 차분하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곧 괴롭다는 듯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미치겠어. 내가 받았던 연민이 유난스러운 게 아니라는 게 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 그걸 이해한다는 건 무슨 뜻일까.”

그때 루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민에 관해 묻는 건가.”

너희 인간들이 악마라 칭하는, 데시안인 내게?

그는 딱 그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제인의 온몸에 몹시도 불길한 예감이 휘감겼다.

그녀는 히, 웃으며 말했다.

“……혼잣말이 컸다, 그렇지?”

루는 대답 대신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며 작게 썬 고기를 우아하게 입 안에 넣었다.

평화로운 식사가 이어졌다.

기분이 가라앉아 보이긴 했으나 제인은 언제나처럼 한 그릇을 말끔히 비워냈다. 그에 비해서 루는 느긋하고 여유롭게 식사하는 편이었기에 아직 음식이 남아 있었다.

제인은 그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앉아서 기다려주었다.

오늘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같이 지내는 동안 식사 자리를 먼저 뜬 적이 없었다.

루는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몇 번은 먼저 일어나라고 했는데도 그저 모호한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매번 같은 말을 했다.

-그냥 먹어.

루는 더 이상 먼저 일어나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나 여전히 그녀의 태도는 알 수 없는 이상한 것이었다.

“제인.”

어느덧 식사를 마친 루가 문득 물었다.

“그날 얼마나 마셨지?”

“주량은 두 병 반이군.”

루는 남은 포도주병을 흔들며 나직하게 말했다. 맞은 편에는 제인이 정확히 두 병 반을 비워냈을 때부터 했던 말을 하고 또 하기 시작했다.

“누가 날 불쌍하게 보는 게 제일 싫어.”

“그 말, 백여섯 번째야.”

“차라리 미움받는 게 나아.”

“그 말은 백두 번째고.”

제인의 술버릇은 아주 독특했다.

앵무새처럼 했던 말을 반복하지 않는다면 취했는지 모를 정도로 또박또박 정확하게 발음했다.

“지금 기분은?”

“좋아. 몸이 붕붕.”

심지어 뭘 물으면 대답도 곧잘 했다.

나사가 좀 빠졌긴 했지만.

“좋다니 다행이군.”

루는 오늘따라 제인의 기분이 울적해 보이기도 하고, 주량도 확인할 겸 도수가 같은 포도주를 종류별로 가져다가 마시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있잖아.”

제인은 헤, 하고 웃으며 말했다.

“누가 날 불쌍하게 보는 게 제일 싫어.”

참으로 신비로운 술주정이 아닌가.

루는 턱을 괴고 제인을 지그시 보았다. 취하고부터는 무슨 얘기를 하다가도 도돌이표처럼 돌아와서 같은 말을 백 번 넘게 했다. 그런데도 지겹지 않았다.

그가 물었다.

“누가 널 불쌍하게 봤지?”

헤헤.

제인은 아까보다 더 소리 내어 웃었다. 재미있는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보육원 마을 사람들.”

어린 것들이 안쓰러워서 어떡하냐고, 가여워 죽겠다고 하면서도 자녀들에게는 같이 어울리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던 아주머니들.

볼 때마다 거지한테 동냥하듯이 동전을 쥐여주던 몇몇 아저씨들.

그뿐일까.

“매달 오던 봉사자들.”

제인은 그들이 오는 날이 너무 끔찍해서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원치 않는 관심을 가지며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제발 좀 꺼지라고.

하지만 연민의 그림자는 보육원 바깥에도 드리워져 있었다.

“궁정 머저리들.”

햇살은 사치스러운 궁정 벽부터 바닥까지 골고루 퍼져 있으면서도, 그림자는 오로지 제인의 바짓가랑이만 붙잡고 늘어졌다.

지독하게.

“그리고…… 나.”

제인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내가.”

“…….”

“내가 나를 불쌍하게 봐. 세상에서 제일.”

그러면서 ‘이마아아아안큼’이라고 표현이라도 하듯이 두 팔을 벌리고 휙휙 휘저었다. 그녀는 뭐가 우스운지 깔깔대다가 양손으로 턱을 괴고서 픽 웃었다.

“너는?”

루가 아무 말이 없자, 그녀가 다시 물었다.

“너도 내가 불쌍해?”

그녀는 턱을 괴고 있던 한 손을 빼더니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말을 이어갔다.

“불쌍해서…… 입원도 시켜주고, 맛있는 요리도 해주고, 또 뭐더라…… 아. 집까지 데려와서 재워 주고. 심지어 악몽까지……. 아무튼, 그래?”

루의 눈이 기분 좋게 휘었다.

“나는 널 불쌍하게 보는 쪽이 아니야.”

그녀의 이마에 삐져나온 잔머리를 정리해 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가엽게 만드는 쪽이라면 모를까.”

“…….”

눈을 도로록 굴리던 제인이 되물었다.

“안 불쌍하다는 거지?”

루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인은 두 팔을 식탁에 포개고 엎드렸다. 그리고 기분 좋은 얼굴로 소로로 잠에 빠져들었다.

“누가 날 불쌍하게 보는 게 제일 싫어.”

백여덟 번째 말과 함께.

* * *

“재미있군. 위조품이라.”

제인을 침실에 재우고 온 뒤, 지하 작업실에 왔을 때까지만 해도 루의 기분은 좋은 편이었다.

라트올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수여식에서는 진품이 전달된 게 맞아요.”

“진품이 전달되었는데 마도구로 제작하려고 보니까 위조품이더라?”

“네. 중간에서 놈팡이 같은 놈들이 되게 귀여운 장난을 쳤더라고요.”

루가 작게 웃었다.

“얼마나 귀여운지 들어볼까.”

“뭐, 그런 놈들의 정석이죠. 수여자들 근처를 맴돌다가 자기들끼리 대화하듯이 슬쩍 말을 흘렸대요.”

라트올은 목소리를 걸쭉하게 바꿔서 흉내 내듯 말했다.

“축제 때 수여한 라라테 등급이 조금씩 다르다며?”

그리고 다시 아무렇지 않게 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귀가 솔깃해진 수여자들이 관심을 가지니까 자기들을 마석사라고 소개했었대요. 라라테를 보여주면 등급을 확인시켜 주겠다고요.”

“그때 바꿔치기했군.”

“네. 위조품을 워낙 정교하게 만들어서 경력만 수십 년인 마도구 대장장이들도 헷갈려 하더라고요.”

늙어서 눈이 침침해지는 것도 한몫했지만.

라트올은 이러나저러나 상관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루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귀엽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피해자는?”

“총 네 명이에요. 세공한 업체라고 말하고 진품으로 교환해 줬어요. 호엘리반이 반품했던 게 이렇게 쓰일 줄은……. 알면 지랄하겠죠?”

“지랄은 무슨.”

루는 품위 있게 검지를 들고 나긋한 목소리를 내었다.

“지랄 아니고, 개지랄.”

라트올이 질색하며 손을 내저었다.

“전 할 만큼 했어요. 반품된 라라테 보여주면서 당장 받을 건지 한 달 뒤에 새로 세공된 걸로 받을 건지 물어보고 교환해 줬다고요.”

“잘했어. 위조품은 모두 회수했나?”

“네. 여기.”

라트올이 벨벳 주머니에서 체스 말 정도 되는 크기의 라라테 위조품을 와르르 쏟아냈다.

루는 그중 하나를 들어서 불빛에 비추어 보며 산뜻한 목소리를 내었다.

“내 미학에 손을 대었다라.”

루를 등지고 있던 라트올은 조용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절대로 기분 좋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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