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제인은 잠시 고민했다.
자신을 구해준 게 악마였다고 말하자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 마법을 쓸 줄 아는 이가 구해줬거든.”
밀리타는 레스토랑 건물 위에 앉아 있던 흑발의 사내를 떠올렸다.
그자인가.
그림자에서 위화감이 느껴지던 남자.
“……그랬군요.”
“뭐, 이제 상관없으려나. 교황은 내가 죽은 줄 아니까.”
제인을 찾아오겠다는 거짓 명분으로 페브리아 밖으로 나온 밀리타는 조용히 맥주를 마셨다. 때마침 카이와 밀리타의 잔이 비워져서 종업원에게 두 잔을 부탁하고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드호아망에서 다시 만날 줄은 몰랐어요.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네르기니에 잠깐 입원해 있었어.”
밀리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제인은 맥주잔을 찰랑찰랑 들어 보였다.
“보다시피 지금은 멀쩡해. 넌 무슨 일로 왔는데?”
“저는 예전부터 드호아망에 와보고 싶었어요. 오랫동안 동경해오던 사람이 있거든요.”
제인은 아이처럼 웃는 밀리타를 보고는 내심 놀라웠다. 그녀는 속을 알 수 없이 웃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누구길래.”
“유명한 연금술 마법사이신 분이에요.”
“마법사?”
“맞아요. 프시오라고…….”
촤악-!
제인의 헛손질에 맥주잔이 엎어졌다.
곁에 있던 밀리타와 카이는 어찌나 날렵한지 맥주가 쏟아지는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방울도 젖지 않았다.
술집 안의 모든 시선이 제인에게로 향했다.
맥주잔이 제자리에서 앞뒤로 왔다 갔다 굴러갔다.
도르륵, 도르륵…….
“괜찮아요?”
“괜찮으세요?”
밀리타와 지나가던 종업원이 동시에 물었다.
그녀의 귓가에 루의 말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술을 마시는 도중에 뭘 쏟거나 떨어뜨리거나 깨트리거나 셋 중 하나라도 하게 되면 그만 마시고 바로 귀가해.
* * *
“이상하군.”
루가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트올은 대단히 피곤했다.
“어째서 아직 열 시도 안 된 거지?”
“…….”
“고장 난 건가.”
루가 시계를 건드리려고 하자 라트올이 조용히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소맷자락을 잡아서 끌어앉혔다.
“여기에서 멀쩡하지 않은 건 당신뿐이에요.”
* * *
제인은 무척 난감했다.
제게 우호적으로 대한다고 해도 밀리타는 암살자였다.
암살자가 프시오를 찾는다.
그것도 해맑은 얼굴로.
의뢰받은 암살자가 연기하는 건지 아니면 순수하게 프시오를 만나고 싶어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순수?
과연 골목길에서 리졸브를 바른 단검으로 사람을 찍어 누르던 그녀에게 어울리는 표현이란 말인가.
그 사이, 종업원이 테이블을 말끔하게 닦아주고 맥주도 새로 가져다주었다.
테이블에서 술 냄새가 확 풍겨 올라왔다.
밀리타가 아쉬운 듯이 말했다.
“드호아망에서 손에 꼽히는 연금술 마법사라, 당연히 이곳에 오면 만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말이죠. 사막으로 떠난 지 좀 됐다고 하더라고요.”
제인은 모른 척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구나.”
“하지만 여기에서 당신을 만난 건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밀리타가 제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기쁜 듯이 웃었다.
“당신은 프시오를 아는 것 같으니까요.”
“…….”
제인은 데자뷔 같은 물음이 떠올랐다.
‘그게 티가 나……?’
얼마 후.
연거푸 술을 마신 제인은 골이 지끈거렸다.
인제 와서 아니라고 하기에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난처함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아무리 고민해 봐도 술기운이 오르면서 머릿속은 더욱 아둔해져 갔다.
밀리타가 물었다.
“제 정체 때문에 그러는 건가요?”
밀리타는 암살자라는 명칭 대신에 정체라는 표현으로 에둘러 물었다.
제인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이었다.
“나라도 말 안 해.”
카이였다.
그는 단호한 어조로 밀리타에게 말했다.
“네가 이 사람한테 한 짓을 생각해봐.”
제인은 눈을 크게 뜨고 카이를 보았다. 말을 하긴 하는구나 싶어서.
밀리타는 카이의 말에 어깨를 늘어트리고 얕은 미소를 지었다. 실망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런 거니?”
“그런 거야.”
밀리타는 제인의 손을 놓고 맥주를 단숨에 들이켜더니 한 잔을 더 시켰다. 그리고 혼잣말로 ‘그런 거구나.’ 하고 말았다.
뭐야? 인정한 거야? 이렇게 쉽게?
새 맥주잔이 나왔다.
밀리타는 맥주 몇 모금을 더 넘기고 결의에 찬 눈으로 말했다.
“당신이 알려주지 않아도 저는 계속 프시오를 찾을 거예요.”
환장하겠네.
제인은 당장이라도 핍을 불러서 ‘페브리아의 암살자가 당신을 찾는다.’라고 프시오에게 전할까 싶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모른다고 딱 잡아뗀다고 해도 그녀가 프시오를 찾을 수 없다는 보장이 없었다.
못 찾는다? 과연.
밀리타는 마드리안 교황이 곁에 두었던 인물이다. 암살자로서의 역량은 최상급일 터였다.
고민하던 제인은 차라리 밀리타의 동선과 프시오 안위를 확인할 수 있는 접점에 서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가 물었다.
“너 말이야, 밤에 잘 자?”
“네?”
“잘 자냐고.”
밀리타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다짜고짜 묻는 물음의 의도를 알아채기 어려울뿐더러, 사실 그녀의 밤은 그다지 편안하지 않았다.
제인은 미약하게 한숨 쉬며 말했다.
“약속해.”
“……?”
“약속하면 네가 만나고 싶어 한다고 전해줄 순 있어. 딱 거기까지야.”
밀리타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떤 약속이든 할게요. 뭐든 다.”
제인은 밀리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윽고 낮은 목소리로 느리게 말했다. 그러나 카이에게도 들릴 법한 크기와 속도였다.
“사람 죽이는 짓, 그만둬.”
제인의 상체가 본래 자리로 돌아왔다.
“……그건.”
밀리타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사람은 잘 자야 해.”
밀리타는 실로 의아했다.
“네가 잘 잤으면 해.”
“…….”
“내가 그 밤을 알아.”
무심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목소리가, 그리고 자기의 밤을 안다는 말이 어째서 이토록 가슴에 사무치는 걸까.
이토록 울렁거리게 하는 걸까.
난색과는 거리가 먼 잿빛 눈이 이토록 따뜻하게 느껴질 수 있는 걸까.
그때 제인이 겹겹이 덧대어진 긴 소매 끝을 잡았다. 이어서 방울져 떨어지는 밀리타의 눈물을 성의 없이 꾹꾹 눌러서 훔쳐 주었다.
밀리타는 그제야 제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짐짓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그건 카이도 마찬가지였다.
“약속한 거야. 네 입으로 ‘뭐든 다’라고 했으니까.”
“……저 굶어 죽으면 책임지실 거예요?”
밀리타가 코를 훌쩍거리며 묻자 제인이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었다.
“농담이 지나치네. 너처럼 수완 좋은 녀석은 적어도 굶어 죽진 않아. 어제 격투기 내기로 대체 얼마를 벌었던 거야?”
아. 돈…….
제인은 뒤늦게 땡전 한 푼 들고 오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여기 술도 네가 사.”
밀리타가 분홍빛으로 물든 눈을 휘었다.
제인은 조금은 안심했다.
프시오를 죽이려고 찾는 건 아닌 듯싶어서.
“참고로 프시오는 도덕적인 걸 좋아해. 그러니 약속을 지키는 편이 좋아.”
그때였다.
“너도 약속을 지키는 편이 좋았을 텐데.”
제인은 뒤에서 들리는 음침한 목소리에 소름이 훅 끼쳤다.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리자 지금껏 본 적 없을 정도로 저기압 상태인 데시안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자정까지 들어오라고 하지 않았나?”
* * *
루는 제인을 데리고 곧장 침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뒤늦게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따뜻하고 포근한 침대에 눕자마자 졸음이 쏟아지는 얼굴을 했다. 그러다 몇 번 눈을 껌뻑거리더니 이내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눕자마자 어찌 이리 평온하게 잠이 드나.
옷 좀 갈아입힌다고 예쁘게 노려보며 경계할 땐 언제고.
잠든 제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잠결에 이불을 끌어 내렸다.
그는 차가운 손이 닿을까, 조심스레 이불을 당겨주었다.
늦가을, 자정의 시간.
느리게만 가던 루의 시간이 다시 제 속도대로 흐르기 시작했다.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제인은 네르기니에 있는 세실에게 세 번을 찾아갔고, 세 번 다 보기 좋게 퇴짜 맞았다.
제인은 답답했다.
힌트라도 달라고 했지만 가르침 받을 준비가 안 되었으니 돌아가라는 말만 되돌아왔다. 물론 엄청난 욕지거리를 포함해서.
그렇게 세실에게 문전박대를 당하고 나면 곧장 로안나의 병실에 들렀다.
로안나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호흡도, 맥박도 정상이었으나 깨어날 기색이 없어 보였다. 그건 약제사인 제인에게도 익숙지 않은 증상이었다.
네르기니 측의 답변은 한결같았다.
우선은 지켜봅시다.
엔니오는 그동안 몰라보게 수척해져 갔고, 제인은 두 사람 곁에 말없이 앉아 있다가 돌아오는 게 전부였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다정한 위로였다.
그러는 동안 루의 거처에서도 무리 없이 적응해갔다.
함께 밤을 보내는 것.
늘 같은 침대를 쓰면서 열흘에 한 번이란 말이 무색해져 있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불편한 점은 없었다. 그와 수면 시간이 반대인 덕분이었다.
어쨌거나 악몽을 꾸지 않으려면 잠시라도 그가 곁에 있는 게 안심되었고, 놀랍게도 그가 희롱하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루에 대해서도 가랑비 옷 젖듯이 알아가고 있었다.
루는 딱히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 색정적으로 굴지 않았다.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것.
그게 중요했다.
그가 원하는 걸 그대로 따라주면 되었다. 어쭙잖게 저항하면 그는 돌연 거부할 수 없을 만큼 고혹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다가 종국에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움직이게끔 했다.
그의 심기만 거스르지만 않으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밀리타를 만나고 술에 취해 잠들었던 그 밤에도 루는 단정하게 잠옷으로 갈아입혀 주고는 함부로 손대지 않았다.
-내가 너에게 주는 모든 걸 저항하지 말고 받아들이도록 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제인은 그에게 익숙해져 가는 사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