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루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애당초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그녀가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려는 목걸이였다.
그는 재차 깊게 숨을 들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
“제인, 잘 들어. 술을 마시는 도중에 뭘 쏟거나, 떨어뜨리거나, 깨트리거나 셋 중 하나라도 하게 되면 그만 마시고 바로 귀가해.”
제인이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자 루가 허공에서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었다.
순식간에 핍이 날아와서 그대로 제인의 어깨 위에 앉았다.
“이 녀석도 데려가.”
“감시꾼까지 붙이시겠다?”
제인이 핍을 흘겨보든 말든 루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포박하듯 잡고 있던 그녀의 손목을 풀어주며.
“자정까진 들어와.”
* * *
지하 작업실 안.
라트올은 근래 들어 폭풍 같은 시간을 보냈다.
연옥에 녹니스도 납품했고, 드호아망 마탑에 라라테도 다시 제조해서 납품했으며, 죽을 동, 살 동 루가 그려온 도안대로 팔찌와 목걸이까지 제작했다.
그리고 오늘.
라트올은 팔찌와 목걸이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그는 세공하던 마석을 조용히 내려놓고 루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아예 루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당신이 그랬죠. 마석에는 우리들의 감정이나 사념이 불순물처럼 섞여 들어가면 안 된다고요.”
“그래.”
“그거 좀 보세요.”
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공 중인 마석의 밑 부분에 불필요한 감정과 사념이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라트올은 그의 손에 든 마석을 가져와서 불빛에 비추어 보며 구경했다.
“종말이라도 오려나 봐요. 당신이 이런 실수를 다 하고.”
루가 가공에 있어서 실수하는 것은 별똥별이 떨어지는 순간에 소원 세 개를 완벽하게 비는 것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라트올이 집요한 완벽주의라면, 루는 게으른 실력주의였다.
‘귀찮고 번거로운 일은 두 번 하지 않는다’가 바로 그의 작업 신념이었다.
“초조한 감정의 불순물이 대부분이네요. 뭐예요? 주근깨도 아니고 점처럼 촘촘하게 붙어있는 이 사념은? 작아서 보이지도 않네. 대체 뭐라고 적힌 거……. 자정?”
“…….”
“좀 전에 제인이라는 인간한테 안달복달하고 계시던데, 그래서 그래요?”
루가 황망하게 웃었다.
“안달복달…….”
“그것밖에는 표현할 수 있는 게 없던데요. 일부러 보려고 본 건 아니에요. 부엌에 가는 길에 우연히 봤어요.”
라트올은 별채에서 생활했으나 부엌은 본채를 이용했다.
그러나 루와 함께 식사하는 건 아니었다.
라트올은 채소나 과일 위주로 생식을 하는 편이었고, 날씨가 추워질 때쯤에는 감자나 고구마처럼 간단하게 쪄먹는 걸 좋아했기에 입이 심심할 때마다 챙기러 가는 게 전부였다.
한 여자가 부엌에서 이동의 문을 열었을 때도 당근이나 사과같이 달짝지근하고 아삭한 게 당겨서 부엌에 발을 들인 참이었다.
제인.
그 여자의 목과 팔에 라트올이 과로사 직전까지 가면서 만든 장신구가 걸려 있는 걸 본 순간, 확신했다. 루가 목숨을 탐내는 인간이라는 것을.
라트올은 진심으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그 인간을 대하는 루의 모습은 마치…….
“사랑이라도 하세요?”
라트올이 사념이 잔뜩 묻은 마석을 내려놓고 물어보자 루의 입매가 묘하게 올라갔다.
“사랑.”
그는 라트올이 내려놓은 마석을 재차 들었다.
그의 말대로 초조한 감정, 그리고 자정이라는 시간에 대한 사념이 덕지덕지 들러붙어 있었다.
“나는 그 사랑이라는 게 뭔지, 아직도 모르겠단 말이지. 그게 그레데엘므와 지독하게 얽혀버린 이 이야기의 시작인데.”
라트올은 너무 놀라서 눈알이 빠질 뻔했다.
그레데엘므!
라트올은 눈앞에서 듣고도 지금 그의 이름이 루의 입에서 나온 게 맞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루는 다른 이에게 불편한 존재였지, 그가 불편하게 생각하는 이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직 한 명.
그레데엘므를 제외하고는.
노골적으로 그를 달가워하지 않았기에 자연히 이름을 거론하는 것 또한 기피 하던 게 루였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온 것이었다.
라트올은 등줄기가 서늘했다.
“……오, 오늘은 일찍 올라가서 쉬세요.”
“그럴 생각이야.”
마석의 불순물을 제거하던 루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자정 이후로는 집중하기 어려울 것 같거든.”
* * *
딸랑.
술집 안으로 들어간 제인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두컴컴한 가운데 테이블마다 노랗게 일렁이는 따뜻한 불빛 덕분에 분위기가 있는 술집이었다.
핍은 후두둑 날더니 천장 지지대를 하나 골라서 앉았다.
그때, 누군가가 제인의 손목을 잡았다.
루의 온도와는 확연히 다른 인간의 것이었다.
“여기에요.”
문 쪽에 자리 잡고 있던 밀리타가 반가운 듯이 방긋 웃었다. 같은 테이블엔 구릿빛 피부에 체격 좋은 남자도 동석해 있었다.
밀리타가 혼자 다니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짐작했던 터라, 제인은 그러려니 하며 남자를 향해 고갯짓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밀리타는 그녀가 앉을 수 있도록 제 옆의 의자를 빼주었다.
“못 알아볼 뻔했어요.”
제인은 자신의 차림이 어색했다.
“이상해?”
“예뻐요.”
밀리타는 상냥하게 웃고는 지나가던 술집 종업원에게 맥주 한 잔을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곁에 있던 남자를 소개해 주었다.
이름은 카이.
네 살 터울인 그들은 밀리타가 여섯 살, 카이가 열 살이었을 때부터 어울려 지내는 사이라고 했다.
밀리타가 두 사람을 서로에게 소개해 주는 동안 카이는 말없이 맥주만 마셨다. 그는 자리가 없어서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밀리타는 제인에게 원래 무뚝뚝한 성격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슬쩍 말해 주었다.
그사이 시원한 맥주 한 잔이 나왔다.
“정말로 나오실 줄은 몰랐어요.”
“궁금한 게 있어서.”
페브리아 밖에서의 세 번째 만남이었다.
적어도 밀리타가 저를 목적으로 드호아망에 온 것은 아닐 것으로 판단했다.
제인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나한테 마나가 있다는 거, 어떻게 알았어?”
앉자마자 용건을 묻는 제인에게 밀리타가 살짝 웃으며 음, 하고 대답했다.
“교황님을 통해서 알게 되었어요.”
“……교황이라니.”
제인의 인상이 노골적으로 구겨졌다.
밀리타가 이어서 말했다.
“네. 저는 당신을 납치하는 임무를 맡았었고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위험 요소를 모두 알고 있어야 하니까요.”
제인은 앞에 놓인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고 쾅, 내려놓았다.
“교황은 또 어떻게 알았지?”
“글쎄요. 그건 저도 정확히 전달받지 못한 부분이라. 하지만 교황님께서 당신의 마나를 확인했던 계기는 알고 있어요.”
“계기?”
“네. 당신이 교황님의 환심을 샀던 게 언제부터였죠?”
“……옴푸푸스.”
“맞아요. 당시 마드리안 교황은 앙디스 섬의 옴푸푸스 풍토병을 주시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단번에 종식해버렸으니까요.”
밀리타가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저 인간이 무슨 술수를 부린 건 아닌가, 하고 궁금하지 않겠어요?”
얕은 미소를 입에 문 제인의 시선이 사선으로 떨어졌다.
‘궁금하다’라…….
그래서 뒤를 캤던 건가.
만약 그전부터 계속 사람을 붙여왔다면 교황이 루의 존재를 알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교황은 하임만큼이나 좋은 패로 쓸 수 있었을 터.
하지만 그 패를 쓰지 않았다.
뱀 같은 여자가.
그 좋은 패를 쓰지 않았다는 건…….
제인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교황이 사람까지 붙인 건 직접 적으로 협박한 뒤가 확실했다.
만약 사람을 붙였다 하더라도 루와 만나기 전일 것이다. 알았다면 분명 요긴하게 써먹을 계획을 하고도 남았을 테니.
이제 남은 의문점은 하나였다.
사람을 붙이지 않고 마나의 유무를 확인하는 방법.
만약 그런 방법이 존재한다면.
그 순간 제인은 자신이 마나를 확인했을 때를 떠올렸다.
만약 리톨 같은 물건이 페브리아에도 있다면?
혹은…….
아래를 향해 있던 제인의 시선이 다시 올라갔다.
“밀리타.”
제인이 조그맣게 웃었다.
“마법이 금지된 페브리아에 마나를 확인할 수 있는 인력이라도 있나 봐?”
밀리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예상보다 제인이 페브리아의 비밀을 더 깊이 파고들고 있었다.
“거기까지만 하세요. 더 알면.”
그녀가 조금은 다급하게 말을 덧붙이려 할 때였다.
“위험해지나 보네.”
“…….”
제인의 말이 옳았다.
만일 지금 이 대화가 밖으로 새어 나간다면, 그래서 마드리안의 귀에 들어간다면 필시 추적당하고도 남을 내용이었다.
아무리 여기가 드호아망이라 할지라도.
그렇다면 저와 카이는 물론 제인이 붙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 이후는 불 보듯 뻔했다.
이단이라는 오명과 사형.
밀리타의 불안과는 달리, 제인은 태연히 맥주를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다행히 그녀가 더는 캐물을 생각이 없다는 듯이 안주를 집어 먹었다.
그러다 곧 얼굴을 팍 구겼다.
“억울해서 그래. 나만 몰랐으니까.”
“몰랐다뇨?”
밀리타는 제인을 볼 때마다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뜻 보면 무엇에도 관심 없는 듯 무심해 보이는데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때마다 표정이 풍부하다는 생각이 들곤했다.
“나한테 마나가 있다는 거, 얼마 전에 알았거든.”
“네……?”
그리고 그녀와의 대화는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틀어졌다.
제인의 말에 지금까지 무표정이었던 카이의 얼굴에도 당혹스러움이 묻어났다.
밀리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제9 탑에서는 어떻게 도망친 거죠? 거기서 뛰어내리면 즉사한다고 봐야 해요. 마법이 아니고서야 설명이 안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