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46)화 (46/168)

46.

제인은 그의 손을 다급하게 잡았다.

“그만둬.”

동시에 더 다가오지 못하게 눈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건 실수였다.

경계 어린 눈빛. 앙칼진 눈매. 여과 없이 드러나는 그녀의 긴장감은 루를 흡족하게 만들어 줄 뿐이었다.

잔뜩 노려보고 있는 눈이 풀어지는 건 훨씬 더 마음에 들리라.

루는 발걸음을 느리게 떼며 제인을 벽으로 몰았다. 그녀의 날 선 시선이, 울림이, 태도가 빠짐없이 사랑스러웠다.

그는 야트막한 미소를 짓고는 한 줌의 여린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갔다.

이어서 그의 차가운 숨이 맞닿은 순간 제인은 소름이 훅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가 점점 파고들었다. 목덜미 뒤편을 이빨로 긁듯이 깨물었다.

차가운 감각과 뜨거운 열기가 묘하게 뒤섞였다. 점차 저항감을 희석하는 흥분이 아래에서부터 찬찬히 그녀를 삼켜갔다.

막아내지 못한 얕은 신음이 터져 나오는 순간, 루는 느릿하게 몸을 떼었다.

“예쁘네.”

슬며시 젖은 제인의 눈가와 상기된 얼굴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보듬었다.

“하지만 이렇게 예쁜 얼굴을 해도.”

가라앉지 않은 흥분이 제인을 괴롭혔다.

그는 달아빠진 그녀의 모습을 핥듯이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네 입으로 직접 나를 원한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나 또한 너를 취할 생각은 없어. 그러니, 제인.”

루의 손길이 다시 덜 풀어낸 단추로 돌아갔다.

“힘 풀어.”

제인은 아랫입술을 씹듯이 깨물었다.

불분명한 감정들이 엉망진창으로 구겨진 채 땅바닥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하나하나 펼쳐서 확인하기 전에는 무엇이 싫은지, 또 무엇이 좋은지 헤아리기 어려웠다.

명확한 것은 그의 손길을 거부하기 힘들다는 것 하나.

루는 혼란스러워하는 제인을 느긋하게 내려다보았다.

싫지 않은 거 알아.

지독히도 아름다운 시선이었다.

주변 공기가 후덥지근했다.

루의 낮은 체온은 변함이 없었기에 열기는 오로지 제인의 것이었다.

이완되지 않은 팽팽한 긴장감과 진주 가루처럼 반짝이는 식은땀이 제인의 목선을 따라서 배어 나왔다.

무엇보다 곤욕스러운 건 호흡이었다. 자꾸만 빨라지는 호흡을 부러 느리게 뱉어내느라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몸의 힘을 푸는 것도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이윽고, 걸치고 있던 옷을 탈의한 제인은 튜닉을 입은 후에야 바짝 들려있던 어깨를 내릴 수 있었다.

이제 다 되었다 싶었다.

그러나 블리오.

겹쳐 입은 블리오의 매듭이 하나씩 여며지면서 재차 몸이 굳어졌다.

“숨.”

“……?”

“편하게 쉬어야지.”

제인은 사근하게 달래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편하게 숨을 쉬어?”

“그래도 노력해야지. 예쁘게 입기로 약속했으니.”

“여기서 뭘 더 어떻게…….”

이윽고 얼굴을 찌푸린 그녀가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붉은 뺨과 상기된 표정.

감각을 시인하는 곤욕스러움.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

루의 목덜미 뒤편에 기분 좋은 오싹거림이 스쳤다. 그는 홀린 듯 제인의 손등을 잡아 내리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두 입술 사이에 손톱 하나 겨우 들어갈 거리가 되었을 때.

“기다려야지.”

제인의 눈동자가 또렷하게 그를 주시했다.

“네 말대로, 내가 널 원할 때까지.”

일순, 그는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잊은 것처럼 우뚝 멈추었다. 아름다운 그의 얼굴에 몹시도 기쁜 미소가 그득히 실렸다.

“아. 그렇지.”

루는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고압적인 미소를 지은 채 순종하듯, 이 세상 모든 푸름이 깃든 눈동자를 반듯하게 접으며.

“기다려야지. 언제나처럼.”

* * *

“예상대로군.”

루는 환의를 마친 제인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 어울릴 줄 알았지.”

그와 달리 제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거울을 물끄러미 보던 그녀가 결국 보란 듯이 루의 심기를 작게 건드렸다.

“흉해.”

“……내 안목은 틀린 적이 없어. 대체 어디가 흉하다는 거지?”

“너무 잘 보이잖아.”

거울에 비친 그녀의 눈길을 유독 사로잡은 건 목덜미에 난 두 개의 자상이었다. 제 손으로 그은 것들이라도 흉터가 예뻐 보일 리 없었다.

루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 뒤에 서서 함께 거울을 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긴 은색 머리를 높이 올려 묶어 주었다.

그러자 자연스레 상흔이 더 눈에 띄었다.

“많이 신경 쓰이나?”

제인이 감탄했다.

적절한 욕을 고르기 어렵다는 얼굴로 그를 보자, 킬킬 웃던 루가 방 안 서랍에서 꺼낸 보석함을 제인에게 건네주었다.

“열어 봐.”

함 안에는 화려한 장신구가 들어있었다.

각각 줄 너비가 한 마디쯤 되는 초커 목걸이 하나와 세 마디쯤 되는 팔찌였다. 보석에 대해 무지몽매한 제인이 넋을 잃고 볼 만큼 황홀한 형상이었다.

특히 목걸이는 은빛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줄에 파도 같은 무늬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는 푸른색 마석이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루는 친히 팔찌와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손목의 각인과 목덜미의 상흔이 완벽하게 가려졌다.

제인은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건 너무…… 화려하잖아.

차라리 루가 하는 게 훨씬 더 잘 어울릴지도.

“기쁘게 웃어주면 좋을 텐데.”

제인의 머릿속에 조금 전의 곤욕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얼굴로 루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러거나 말거나 나른한 미소를 걸치며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이 목걸이는 이동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야.”

“열쇠?”

“네가 가보았던 장소를 머릿속으로 정확하게 복기하면 목걸이가 그곳에 갈 수 있는 문을 열어줄 거야. 이 집을 포함해서 말이지.”

제인은 프시오의 회중시계가 떠올랐다. 비슷한 이동 마도구를 사용해 본 적이 있었으므로 사용법이 크게 막막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항상 착용하도록 해. 풀 생각하지 말고.”

풀 수도 없겠지만.

그의 나지막한 뒷말에 제인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거, 안 풀려?”

포옹을 푼 루가 침대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이내 여유가 낙낙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풀리면 안 되지. 네가 지옥에 떨어져도 알 수 있도록 만들었는데.”

제인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예쁘게 생긴 개 목걸이였네.

“진짜 개를 데려오면 너도 알 텐데. 내가 개가 아니라는 걸 말이야.”

루는 말없이 제인을 눈에 담았다.

앞에 서 있는 나약한 인간은 눈을 깜빡이는 순간조차 아까울 만큼 저를 즐겁게 하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가 말했다.

“꼬리나 살랑거리는 다른 개는 필요하지 않아.”

그의 시선이 그녀를 옭아매듯 바라보며 고개와 함께 기울어졌다.

“이성과 본능의 경계에서 모멸감과 흥분을 동시에 느끼는 내 강아지를 보는 게, 수천 배는 더 즐겁거든.”

징그럽게 솔직한 대답은 희롱을 넘어서 능욕이었다.

제인은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씹었다.

“제인,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봐.”

돌연 그의 낯빛에 처연함이 깃들었다.

“네 앞의 존재는 데시안이야.”

나도 알아.

네가 사람 새끼가 아니라는 것쯤은.

“인간의 시선과 기준으로 날 보면 곤란해. 내가 네게 주는 모든 걸 저항하지 말고 받아들이도록 해. 나와 계약한 이상은 그래야 할 거야.”

“…….”

“이를테면 안락한 낮잠부터 따뜻하고 맛있는 저녁 식사, 화려한 사치품, 다정한 내 손길과 눈길까지 모두 다.”

방금까지의 처연함은 온데간데없이 그는 다시 방긋 웃으며 제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절망에 다다를 테니까. 네가 선택한 절망에.”

제인은 한숨을 쉬면서 얼굴을 쓸다가 그의 손을 께름칙하게 잡았다.

업보다.

스스로 선택한 절망이지 않던가.

하지만, 아무래도.

“계약을 잘 못 한 것 같아.”

루가 그녀의 손을 더 꽉 잡으며 미소 지었다.

“돌이킬 수 없어.”

* * *

“그래서, 지금…… 어디를 가겠다고?”

제인이 대답했다.

루에게 손목이 붙잡힌 채, 태연자약하게.

“말했잖아. 벽돌 건물 1층 술집.”

루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못마땅함이 묻어나 있었다.

제인은 붙잡힌 손목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오 분 전.

그녀는 데시안인 루와 계약을 무를 수 없음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보란 듯이 이동의 문을 열었다. 밀리타가 말한 술집에 가기 위해서.

그에게 손목이 붙잡히지 않았더라면 이미 도착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제인이 웃는 얼굴로 물었다.

“외출도 허락받아야 해?”

“…….”

“아니면 놔. 가게.”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 있던 루는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졌다.

“주량은.”

잠시 눈을 도로록 굴리던 제인이 제법 당차게 말했다.

“다섯 병.”

“거짓말이 서툴러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티 나……?”

“말이라고.”

제인은 조금 상심한 듯한 얼굴을 했다.

“티가 나는구나…….”

“그런데도 나가겠다는 건가? 주량도 모르면서 이렇게 예쁘게 하고.”

제인은 루를 빤히 보았다.

“예뻐?”

그러고는 루가 대답도 하기 전에 더 해맑게 웃었다.

“그럼 더 나가야겠는데? 이렇게 예쁜 모습을 너한테만 보여줄 수는 없지.”

“제인.”

어딘가 조급함이 묻어나는 그의 부름에 제인이 목을 비스듬하게 뒤로 젖혔다. 그러자 목선과 함께 목걸이가 도드라져 보였다.

“목줄 채웠잖아.”

“…….”

젖힌 고개를 당긴 제인은 다시 붙잡힌 손목에 시선을 두었다. 제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견고함이 느껴졌으나 통증은 없었다. 무신경함에서는 나올 수 없는 강도였다.

“뭘 그리 유난스럽게 굴어?”

제인이 턱을 살짝 들었다.

“이 목줄, 내가 지옥에 떨어져도 알 수 있도록 만들었다면서.”

그의 시선이 기다렸다는 듯이 잿빛 눈동자 속으로 들어왔다. 루의 손에 들어갔던 힘이 조금 풀어졌다.

그녀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아니면 손이고 발이고 다 묶어서 말라 죽을 때까지 가둬두기라도 할래? 그럼 몹시 불행할 것 같은데. 네가 바란 내 절망이 그런 거라면 뭐.”

제인은 뻔뻔한 얼굴로 루에게 잡힌 손과 다른 한쪽 손을 다소곳하게 모았다.

“묶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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