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엔니오가 로안나와 자신 사이의 내막을 알게 된 건 불과 얼마 전이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뒤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그는 잔 가문의 세 형제 중 둘째인 소스키엘과 우연히 마주쳤다.
소스키엘은 술에 잔뜩 취해서 인사불성인 상태였다. 자꾸만 엔니오에게 시비를 걸어대는 통에 적당히 타이르고 지나가려는데도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그러다 돌연, 악다구니를 쓰며 느닷없이 진실을 토해내었다.
-로안나가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아? 아니! 철저히 속은 거야! 로안나와 당신은 사실 악연이니까! 내 아버지의 계략에 넘어간 악연!
취할 대로 취한 소스키엘을 더 이상 타이를 수 없다고 생각한 엔니오가 거칠게 그의 몸을 떨어뜨리고 돌아서려 할 때였다.
-로안나의 사랑은 거짓이야.
엔니오의 시선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소스키엘이 이어서 말했다.
-가짜라고.
술기운에 풀려있던 그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랑의 묘약, 그 저주에 걸린 가짜.
* * *
네르기니에서 퇴원한 제인은 루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정확히는 그의 침대 위에서.
“……보통은 집부터 안내해 주지 않나.”
“한숨 자고 나서.”
네르기니의 베개와 침대도 상당히 고급이라고 생각했는데 루의 침구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눕는 순간 구름 위에 누운 것 같았다.
하지만 계속 누워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애초부터 누울 생각도 없었다.
루를 따라서 이동의 문을 나오니 그의 침실이었고, 얼결에 딸려 들듯이 눕혀졌을 뿐이었다.
제인은 얕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안 자고 싶어.”
“근래 잠을 통 못 잤거든.”
“그럼 혼자 자.”
몸을 살짝 떨어뜨린 루가 제인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다시 그녀를 품에 가두었다.
“그래.”
“…….”
“좋은 꿈 꾸고.”
“…….”
제인은 답답한 병실 생활에서 이제 막 벗어난 참이었다.
닷새 동안 축제를 보러 갔던 것 외에 그녀에게 주어진 유일한 일정은 누워있는 것이었다.
지겨웠다.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품에서 나오려 했으나 보기 좋게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다. 어찌나 힘이 센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수록 그녀를 더욱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가만히.”
낮은 목소리가 나른하게 퍼졌다.
“가만히 있었으면 해.”
제인은 전보다 더 깊은 한숨을 뱉었다.
풀어 줄 생각이 없구나.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는 걸 포기했지만 잠이 오지는 않았다.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제인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로안나.
사랑의 묘약이라는 저주에 걸린 그녀는 결국 미쳐버린 채 드호아망의 강물에 몸을 던졌다.
저주…….
-방금 이 성당에서 언약식 했던 연인 말이야.
-불행해질 거야.
-그들은 저주에 걸렸거든.
그 사내.
그는 무언가를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제인은 엔니오에게 그 사내에 관한 이야기를 차마 할 수 없었다.
연보라색 머리칼과 백금빛 눈동자.
그의 얼굴 생김새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걸 무턱대고 얘기하기에는 로안나의 상태가 가볍지 않았다.
강물에 몸을 던지면서 머리를 부딪친 그녀는 무사히 수술을 마치긴 했으나 경과는 지켜봐야 할 것 같다는 소견을 받았다.
엔니오의 손이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제인은 눈을 감았다.
슬픔에 무너진 이를 지켜보는 건 익숙해지지 않았다. 약제사였을 때도, 지금도.
그녀는 저도 모르게 루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온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아름다운 데시안의 품 안으로.
루는 느긋하게 웃었다.
목을 긁어대는 갈증을 삼키며, 아주 조용히.
* * *
“여기는 욕실.”
이른 저녁까지 진득하게 자고 일어난 루는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루는 집 곳곳을 안내해 주었다.
복도 끝에 있는 문을 제외하고.
제인이 그 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긴?”
“지하 작업실로 들어가는 문……이긴 한데.”
그가 말을 이었다.
“이 집과 분리되어 있어. 명계의 경계에 있는 곳이니, 들어가려고 하지 마.”
제인이 어째서? 라고 묻기도 전에 루가 먼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보호 마법이 걸려 있어도 수심이 깊은 바다에 들어간 것처럼 귀가 아프고 숨쉬기 불편할 테니.”
“네 조수도 저기 있어?”
“보통은. 이름은 라트올 메 데시안. 나와 비슷한 존재라고 보면 돼.”
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여유롭게 복도를 걷던 루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아담한 건물을 가리켰다.
“라트올은 저 별채에서 지내서 마주칠 일이 거의 없을 거야. 별채 아니면 작업실에 있으니까.”
“내가 여기에서 지낼 거라는 건 알고 있고?”
“물론.”
타박타박 걸으며 그를 따라가던 제인은 슬슬 허기가 몰려왔다. 식사를 건너뛰고 원치 않는 낮잠을 잤던 데다가 생각보다 넓은 그의 집을 내내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가 부엌.”
루는 식탁 의자를 당기며 제인에게 고갯짓했다.
“앉아 봐.”
“먹을 게 있어?”
“기다려.”
그녀가 고분고분하게 의자에 앉자, 루는 면포에 가려졌던 고깃덩어리를 꺼내서 밑간하고 양송이버섯을 썰었다.
제인은 일말의 기대도 하지 않고 조리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탁에는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와 양송이버섯 수프, 그리고 손바닥 크기로 잘린 담백한 빵이 올라왔다.
요리라고는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제인은 힘들이지 않고 근사하게 조리를 마친 그를 경외심 가득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대단해.”
루는 산뜻하게 칭찬을 받아냈다.
“비아냥이 아닌, 대단해 라는 말은 처음이군.”
“요리, 배운 거야?”
“탐미적인 것에는 타고난 편이라.”
식탁 위를 손으로 짚은 그가 제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피부에 닿을 듯 말 듯 제인의 잔머리를 살짝 정리해 주며 미소 지었다.
“보는 것부터 듣는 것, 먹는 것까지 모두 다.”
“……그렇구나. 잘 먹을게.”
우선 양송이버섯 수프를 떠서 호호 불어먹었다. 특유의 버섯 향이 짭조름한 수프와 함께 감칠맛 나게 어우러졌다.
제인은 헛웃음이 나왔다.
이어서 스테이크를 한입 크기로 썰어서 입에 넣었다.
이번에는 웃음조차 나지 않았다.
웃음은 무슨.
화가 날 정도로 말도 안 되게 부드러우면서 맛있었다.
“미쳤나 봐…….”
루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우아한 자태로 스테이크를 한 입 먹었다.
“나는 보통 정오가 지나서 일어나. 그러니 아침이나 점심은 부엌에 있는 걸로 알아서 챙겨 먹도록 해. 대신 저녁은 지금처럼 해줄 테니 맛있게 먹고.”
“응, 그럼 설거지는 내가…….”
“그럴 필요 없어.”
루가 여유롭게 주변을 흘깃거렸다.
“이 집의 갖가지 청소는 데코토라는 유령들이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몰래 하거든. 그들의 역할을 함부로 빼앗으면 안 돼. 역할이 없어진 유령들은 사라져 버려.”
“유령이라는 게 존재해?”
루는 바보천치를 보는 눈을 하고서 물었다.
“네 앞에 데시안을 뻔히 두고서 묻는 건가.”
“아.”
“지내면서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식자재는 라트올이 관리하고 있으니 부엌에 쪽지로 남겨두면 알아서 챙겨 줄 거야.”
제인은 큼지막하게 썬 스테이크를 씹느라 고개만 끄덕거렸다. 스테이크도, 수프도, 빵도 모두 다 입에 넣을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식사가 마무리될 때쯤, 루가 물었다.
“생각해 보라던 것은 어떻게 되었지?”
그녀는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씩 웃었다.
“세실의 제자가 될 생각이야.”
그녀는 이내 세실이 내어준 수수께끼가 떠오른 듯, 입꼬리에 걸려 있던 미소가 곧바로 처연하게 사그라들었다.
“……될 수 있다면 말이야.”
돌연 삭막해진 그녀의 태도에 루가 킥킥 웃었다.
“주눅 든 얼굴도 볼 만하긴 한데, 내가 사 온 옷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군.”
“옷?”
“약속하지 않았나?”
이윽고 즐거움이 듬뿍 절어진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쁘게 입기로.”
* * *
제인은 이게 뭔가 싶었다.
손에 든 의복은 그녀가 지금껏 입어본 적이 없는 옷이었다.
“뭐가 이렇게 요란하고.”
복잡해?
무릎까지 오는 실크 튜닉은 원단 재질에 맞게 차르르 떨어졌다.
목둘레선 부분은 넓게 각져있었고, 어깨 아래쪽부터 시작되는 소매 부분은 얇은 망사가 겹겹이 덧대어져 있어서 어디로 팔을 넣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낯설었지만 가장 난감했던 것은 튜닉 위에 걸치는 벨벳으로 만든 상아색 블리오였다.
매듭짓기에 유난히 소질이 없는 제인은 가슴팍부터 배꼽 위까지 끈으로 조이게 되어 있는 여밈 부분에 오만상을 구겼다.
그녀가 궁정에서 근무할 때는 제복을 입었다. 일상복으로는 헐렁한 셔츠에 통이 넉넉한 바지를 입어왔던 터라 눈앞의 옷을 착용하려니 막막했다.
똑똑.
노크를 한 루가 문을 열었다.
그는 아직도 옷을 갈아입지 않은 그녀를 보고는 한 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이내 팔짱을 끼고 문에 등을 기대며 ‘아직도 안 입어 보고 뭐 하고 있지?’라는 얼굴로 보았다.
그러다 곧 의아해하며 물었다.
“입을 줄 모르는 건가?”
“안 입어 봐도 딱히 내 취향이 아닌…….”
제인은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희고 긴 손가락에 톡 풀어진 자신의 상의 단추를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뭐해?”
루는 담담한 목소리를 내었다.
이를테면 당연한 걸 묻는다는 목소리였다.
“갈아입혀 주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