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다음 날.
제인은 아침부터 식중독 검사를 받고 아무 이상이 없다는 소견을 들었다.
페브리아에서 손꼽히는 약제사였던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정말로 속이 안 좋았었는데. 꼭 뱃멀미하는 것처럼.”
“입 다물어. 보호 마법 거는 중이니까.”
“…….”
오늘로 제인의 마지막 진료를 본 세실은 루의 집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보호 마법을 걸어주었다.
이후에는 마나를 조절하는 방법도 알려주었다. 제인의 경우처럼 강한 마나가 순환되지 못하고 막혀있던 사람은 작위적으로 익혀야 했다.
세실이 말했다.
“한 번만 할 줄 알면 돼. 딱 한 번. 다음부터는 자연스럽게 될 거다.”
세실은 이론을 간단하게 설명하고 병실 안에 걸어둔 마법진을 소멸시켰다.
그러자 회복된 제인의 마나가 제멋대로 넘치듯 흘러나왔다.
“으…….”
일순간 생소한 감각이 몸을 휘감았다. 제인은 괴로운 듯 상체를 엎드리고 팔꿈치로 기어가듯이 침대 바닥을 짚었다.
피가 빠르게 돌아가면서 동공이 확장되고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숨이 가빴다.
전혀 유쾌한 느낌이 아니었다. 살갗이 조금이라도 찢어지면 피가 폭발하듯 튀어 오를 것만 같았다.
제인은 괴로운 와중에도 설명대로 힘겹게 숨을 내쉬면서 집중했다.
“몸 안에 있는 마나의 중심부를 찾아라. 감각적으로 찾아야 해.”
쉽지 않았다.
힘이 달리기 시작했다.
“집중해.”
장작더미 속 불길이 사그라들 듯이 체력이 뚝뚝 떨어져 갔다. 그러다 갑자기 물에 젖은 솜처럼 확 무거워지더니 속이 텅 빈, 살가죽만 남은 느낌이 들었다.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려왔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정신 똑바로 차려, 새끼야. 감각이 읽히지 않으면 머릿속으로 연상하려고 해봐. 호흡 유지하고.”
연상.
세실은 마력이 흘러나오는 중심부를 찾기 어려울 땐 이미지를 상상하라고 일러주었다.
예를 들어 자물쇠를 풀고 잠근다거나, 반지를 끼우고 뺀다거나, 창문을 여닫는다거나 하는 ‘통제와 자유에 대한 구체화’를 떠올리고 몰입하라고 했다.
제인은 눈을 감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머릿속으로 무엇이라도 그려보고자 안간힘을 썼다.
일순, 까마득한 어둠 속 바다가 떠올랐다.
밑으로 하염없이 가라앉던 순간이, 숨을 불어 넣어주던 루의 입맞춤이, 물속의 첫 호흡이, 그리고 바닷속을 자유롭게 헤엄치던 그때가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본능적으로 바다를 연상하자 팽팽하게 치솟던 피의 순환이 차츰 정상으로 돌아왔다.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던 심장도 본래의 속도를 찾았다.
“……하아, 하.”
다만 원기 자체는 모두 소진되어서 몸은 여전히 덜덜 떨렸다. 제인은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옆으로 툭 쓰러졌다. 목덜미, 가슴팍, 등까지 땀이 배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윽고 몸의 열기가 가라앉으면서 한기가 들기 시작했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정말로 바닷속을 헤엄치다가 올라온 기분이었다.
“엄살은.”
제인은 말대꾸할 힘도 나지 않았다.
그저 불규칙한 숨을 쉬며 까무룩 감기려는 눈을 껌뻑거리고 있을 때였다. 커튼이 펄럭거리는 창가에 시선을 두다가 조그맣게 픽 웃었다.
세실은 얕게 한숨을 쉬다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똑바로 엎드려. 회복 마법 쓸 거야.”
제인이 몸을 어기적거리며 반듯하게 누웠다.
이내 세실의 손에서 햇빛과 닮은 연한 노란빛이 흘러나왔다. 이어서 몸 곳곳을 느리게 훑으며 체력을 회복시켜 주었다.
얼마 후 떨림이 멈추었다.
살 것 같았다.
“와. 죽는 줄…….”
“너같이 지독한 새끼는 이런 걸로 안 죽어.”
제인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거짓말처럼 원래의 몸 상태로 돌아왔다.
아니, 심지어 훨씬 가뿐해진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방금까지 휘몰아치던 감각들이 모두 꿈 같았다.
-세실은 독보적입니다.
프시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대다수의 많은 치유 마법사가 그녀만큼 완성도 높게 신체를 회복시키지 못합니다. 그녀의 치유 과정은 인체를 탐구하고 세밀하게 복원하는 예술 그 자체입니다.
흐린 눈으로 하품이 나오는 것을 참아가며 들었던 말들이 비로소 이해되었다.
마법에 대해서 무지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세실의 능력만큼은 경이롭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인은 주변을 정리하기 위해 돌아서는 세실의 옷깃을 붙잡았다.
“……가르쳐줘요.”
이어지는 말에 세실이 뒤를 돌았다.
“마법.”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욕이라도 할 줄 알았더니.
예상과 다른 침묵에 제인은 사뭇 당혹스럽기만 했다.
한참 만에 세실이 입을 열었다.
“누구든 가여운 구석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
“…….”
“네가 받은 연민이 유난스러운 게 아니라는 거다.”
가여운 구석.
그 한마디에 메스꺼움이 일면서 옷깃을 잡고 있던 손이 스르륵 풀어졌다.
“내 말 이해할 수 있을 때 다시 찾아와.”
제인으로서는 풀고 싶지 않은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곧 있으면 루가 데리러 올 거다.”
그 이름에 제인이 또 한 번 웃었다.
“와있어요. 이미.”
곧바로 눈짓으로 창가를 가리켰다.
루는 유유자적한 자태로 창가에 앉아 얇은 시집을 읽다가 제인을 보며 살짝 웃었다.
기척도 없이 온 그를 본 세실이 고개를 가로젓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온 건지, 부른 건지.”
* * *
세실이 병실을 나간 후, 샤워를 마친 제인은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루와 함께 퇴원 수속을 마치고 병원을 나서려 할 때였다.
제인이 고개를 기울이며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엔니오 씨?”
“…….”
“엔니오 씨!”
제인이 소리 높여 부르자 그제야 엔니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접수대와 가까운 수술실 앞에 앉은 사람이 어쩐지 익숙하다 싶었는데, 엔니오가 맞았다.
하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초췌한 몰골은 둘째치고, 제인을 보자마자 눈물을 뚝뚝 떨구었기 때문이다.
“로안나가…….”
그는 세상이 무너지는 얼굴을 하고서 믿기 힘든 말을 했다.
“로안나가 죽으려고 했어요.”
제인은 귀를 의심했다.
내가 뭘 들은 거지?
그녀는 못 박힌 듯이 서서 그에게 들은 말을 이해하려 애썼다.
루는 그런 제인을 조용히 살폈다.
바짝 굳어버린 그녀를 순순히 데려가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는지 뒤로 물러나 주었다. 루는 그대로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서서 제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사이 엔니오는 엉엉 울었다.
울음소리가 잦아질 때쯤, 제인은 접수대에서 받아 온 손수건을 건넸다.
그가 손수건을 응시하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로안나 씨는 지금…… 수술받고 있는 건가요?”
그는 미처 대답 못 하고 고개만 주억거렸다. 또다시 눈물이 터질 듯했다.
제인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눈물짓는 이를 다독이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게다가 좀처럼 납득하기가 어려웠기도 했고.
딱 한 번 만났던 게 전부였어도 로안나가 가진 다정함이 진실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제인은 몹시 어렵게, 무거운 마음으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한참을 입술만 깨물던 엔니오가 젖은 얼굴을 쓸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로안나와 전 바르베라는 작은 영지에서 나고 자란 귀족입니다.”
바르베의 권력은 세 가문으로 비등하게 나누어져 있었다.
예술에 가치를 둔 엔니오의 칼다프 가문.
부를 중시하는 로안나의 일리치 가문.
그리고 기사도의 신념을 지키는 잔 가문.
세 가문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영주권을 가지고 있던 가문은 일리치였다.
대외적으로 보면 세 가문이 균형 있게 권력을 맞추어 가는 것 같았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칼다프 가문과 일리치 가문은 몇 대를 걸쳐서 원수처럼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도 균형을 맞춘 것처럼 보이는 건 잔 가문이 오랫동안 중재를 도맡아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리치 백작이 병중에 상을 치르게 되었다.
새 영주를 선출하기 위한 회의를 진행하려 했으나 칼다프와 일리치 가문은 평소보다 훨씬 더 맹렬하게 날을 세웠다.
잔 가문에서는 특단의 조치로 두 가문 사람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두 가문의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져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잔 백작의 주도 아래 영주권에 대한 의논을 명분으로 어렵사리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바로 그날이었다.
엔니오와 로안나가 서로 첫눈에 반하게 된 날이.
엔니오는 신을 위해서 조각하는 조각가였고, 로안나는 명석한 머리로 의학을 공부하면서도 신을 위해 노래하는 삶을 꿈꾸는 여자였다.
마법처럼 사랑에 빠진 그들의 사랑은 예상대로 녹록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사이를 알게 된 칼다프와 일리치 가문에서는 그들의 사랑을 극구 반대했다.
-절대로 안 돼!
귀족이라는 말이 무색하리만치 굶주린 사냥개처럼 서로의 가문에게 모욕과 수치가 될 만한 일을 찾아다니면서 물고 늘어졌다.
애먼 곳으로 시선이 돌아간 두 가문은 영주권 싸움에서 당연히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잔 가문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이후, 영주권 싸움이 끝난 뒤에도 엔니오와 로안나는 서로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각자의 가문과 싸웠다.
로안나의 어머니가 끝내 몸져눕자 일리치 가문 사람들은 로안나를 거세게 비난했다.
결국에는 두 사람 모두 가족과 등졌고, 많은 것을 잃었다.
시련과 고통을 지나오면서 지킨 사랑이었다. 목숨도 바칠 수 있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운명과도 같은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 운명이 사실은…….”
엔니오의 손에 든 손수건이 짓뭉개졌다.
“계략이었던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