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그 순간, 프시오가 엄지와 중지를 사용해서 딱 소리를 내었다. 땅에서 우지끈 소리가 나는 동시에 돌덩어리가 솟구쳐 올라왔다.
“으악!”
솟아난 돌덩이는 금세 의자의 형상을 갖추었다. 울퉁불퉁해진 지면에 서 있던 세실이 발을 헛디디면서 얼떨결에 의자에 앉았다.
프시오는 푸른 장미 한 송이를 꺾어서 세실에게 다가갔다. 꽃은 프시오의 손에서 순식간에 파탐으로 바뀌었고, 자연스럽게 세실의 입에 물렸다.
세실이 망했다는 얼굴로 한숨을 쉬며 욕을 씹었다.
그에 비해 프시오의 표정은 여전히 무감하기만 했다.
“세실. 예전에 네가 그랬었잖아. 정신계 치유 마법사가 필요하다고.”
“…….”
뒤이어 짧은 나뭇가지를 꺾어서 성냥으로 만들었다. 성냥 끄트머리에 희미한 빛이 반짝이다가 조그만 불이 타올랐다. 파탐에 불이 붙었다.
세실이 말없이 의자에 기대어 파탐을 흡입하는 동안, 프시오는 결박 마법진의 잔해를 하나씩 밟으며 사라지게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파탐을 피우던 세실이 말문을 열었다.
“제인은 안 돼.”
“왜 안 돼?”
“정신계 치유 마법사가 되려면 반드시 넘어야 할 관문이 있어. 가장 밑바닥에 있는 자기 내면과 마주해야 해. 그 녀석은 못 견딜 거야. 자칫하면 정신이 송두리째 박살 날지도 몰라.”
“그렇구나.”
어느새 널브러져 있던 잔해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프시오는 뒤를 돌아서 담백하게 물었다.
“그런데 그거, 우리가 단정 지을 건 아니지 않아?”
세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프시오는 개의치 않는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
“제인이 관문을 넘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본인이 해 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 아니야?”
어떤 삶이든 역경은 반드시 있다. 이겨낼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당사자마저도 겪어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다.
그걸 지금까지 줄곧 말해오던 사람이 다름 아닌 세실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제인이 네 제자가 돼서 정신계 치유 마법사가 된다면.”
프시오는 말을 끊고 자신의 두 손바닥을 펼쳐서 가만히 보았다.
짧고 몽땅한 어린아이의 손이었다.
“너 설마.”
“그 아이에게 진료받을게.”
“……!”
세실은 짧아진 파탐을 땅바닥에 패대기쳤다.
“지금까지 그 꼴로 지내면서 사람 피 말리게 할 때는 언제고 기껏 한다는 말이!”
프시오는 오도도 달려가서 작은 발로 파탐에 붙은 불을 끈 뒤 마법으로 흙이 되게 만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서 세실을 보았다.
무해 하기 짝이 없는 순박한 아이의 얼굴이었다.
“부탁해.”
“너……!”
세실은 프시오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프시오란 존재는 친구를 넘어서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세실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프시오를 향해서 삿대질했다.
“너! 못돼 먹은 게 호엘리반이랑 똑같아! 너희 둘은 절대로 헤어지지 마! 인류를 위해서 천년만년 둘이 살아! 개 같은 것들!”
* * *
제인은 저녁이 될 때까지 드호아망의 축제를 즐겼다.
해가 지자 기온이 내려가 쌀쌀해졌다. 그녀가 살짝 몸을 떨자 루는 노점상에 걸린 크림색 목도리 하나를 사서 목에 둘러주었다.
“의상실에 들어가는 건 그리 싫다고 하니.”
“……따뜻하다.”
제인은 보드라운 목도리를 잠시 만지작거렸다. 얼마나 따뜻한지 대충 둘렀는데도 체온이 금방 올라가서 기분이 묘했다.
밤의 축제는 낮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한참 돌아다니다가 루가 저녁으로 먹고 싶은 게 있냐고 물었다.
낮에 간식을 끊임없이 먹어서 그런지 제인은 크게 허기를 느끼지 않았다.
그러다 솜사탕 노점상 앞에 발걸음을 멈추고 오도카니 서 있었다. 루가 슬쩍 웃으며 솜사탕 하나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고 값을 치렀다.
제인은 마법으로 만든 솜사탕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뭉게구름처럼 몽글몽글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몽글몽글…….
천둥 번개가 치던 밤, 제 무릎에서 꼬물거리던 어느 드래곤과 닮아있었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루가 이어서 말했다.
“너는 위험에 빠지기 쉬운 인간이야.”
제인은 데시안의 의뭉스러운 말보다 손에 든 분홍색 솜사탕에 더 관심을 두며 성의 없이 대답했다.
“그건 그래. 내 곁에 네가 있는 것만 봐도 그렇잖아.”
미소를 물고 있던 루의 입술 사이로 마뜩잖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널 납치했던 자와 잘도 말을 섞던데.”
제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루를 올려다보았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잿빛에 푸름이 들어찼다.
그가 웃었다.
이 순간이 너무나 달아서.
그녀의 눈동자에 자신이 가득히 들어찰 때마다 알 수 없는 만족감이 차올랐다. 어느 순간부터는 미열 같은 갈증이 따라붙었으나 그것조차도 나쁘지 않았다.
더.
조금 더 깊게 파고들 수 있다면.
저로만 가득 찬 어여쁜 눈동자를 파고 아래로, 아래로, 더 깊게 들어가서 심장까지 모조리 먹어 치울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이 순간마저도 저를 잠식하는 공허가 조금은 채워지지 않을까.
루는 대답 대신 그녀의 얼굴을 잡고 눈꺼풀에 입을 맞추었다. 이어서 반사적으로 감겼던 잿빛 눈동자를 한 번 더 독식했다.
루는 페브리아의 교황이 기특했다.
처음부터 가상히 여겼던 건 아니었다.
제인을 탐내는 다른 존재가 기꺼울 리 만무했으니. 하지만 단박에 죽이지 않은 건 다시 생각해봐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교황이 제인을 끝까지 몰아붙인다면.
어쩌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품 안에 안겨들지 않을까.
그렇게 마드리안이 제인에게 했던 모든 짓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감시했다. 오프리제를 가지고 했던 사기극부터 교황청 소속 권유, 납치, 회유, 겁박까지 낱낱이, 전부 다.
그는 생각했다.
일단은 죽이지 않는 게 좋겠군.
그의 판단은 명백히 옳았다.
마드리안 교황에게서 도망친 제인이 지금 그의 곁에 있지 않은가.
그러니 지금도 죽일 이유가 없었다.
마드리안이 페브리아에 있는 한 제인은 섣불리 그 땅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을 테니까. 이렇게 제 곁에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인간의 수족.
방금까지 제인에게 살갑게 굴던 여자는 탐탁지 않았다.
제인이 제9 탑에서 떨어지던 날.
루는 제인의 가짜 시체가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걸 보았던 이들을 전부 현혹하면서 죽음을 완벽하게 가장했다.
적어도 그 자리에서만큼은 제인의 사망을 의심할 인간은 없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드호아망이다.
페브리아에 마법을 원천 봉쇄하는 교황이 제인 하나 잡아들이기 위해 마법의 중심인 이곳까지 손을 뻗칠 리가.
그러므로 그녀의 수족이 제인에게 호의를 보이는 건 하나로밖에 설명되지 않았다.
명백한 호감.
루는 그게 탐탁지 않은 것이었다.
“묻잖아.”
그때 제인이 미간을 좁히고 거듭 물었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말했지 않나?”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찌푸려진 제인의 미간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웃었다.
“내 부엉이가 널 봤었다고.”
부엉이…….
제인은 그의 대답에 무언가 떠오른 듯 인상을 더욱 팍 찌푸렸다. 곧바로 손에 든 달아빠진 솜사탕을 한 움큼을 뜯어서 루의 입에 가득 밀어 넣어주었다.
“부엉이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호엘리반이 핍인 척하고 병실에 있었던 것도 다 알고 있었지?”
솜사탕은 루의 입에서 금세 사르르 녹아 없어졌다.
“핍?”
“부엉이. 페피.”
“아.”
이름을 새로 지어줬나 보군.
그가 부정하지 않고 능청스레 수긍했다.
“아무렴.”
“무례하다고 생각했어.”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
“그럴 거라고 생각했으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루가 눈꼬리를 접으며 몹시도 아름다운 낯으로 말했다.
“어째서? 이렇게 재미있는걸.”
제인도 방긋 웃었다.
그렇게 대화가 종결되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데시안인 루에게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를 때마다 머릿속으로 되뇌는 문장이 있었다.
이건 인간이 아니다.
이건 사람 새끼가 아니다.
악마다, 악마.
마냥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치솟는 분노나 짜증이 가라앉곤 했다.
아무 대꾸 없이 길을 거닐고 있는데 루가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그를 올려다보자 예쁘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제인은 멀뚱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뭐 어쩌라고?
하지만 루는 개의치 않고 애살스럽게 아, 하고 입을 벌렸다.
“…….”
뒤늦게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그녀는 눈살을 구기면서도 남은 솜사탕을 조금씩 뜯어서 그의 입에 넣어주었다.
루는 즐거운 듯이 솜사탕을 받아먹었다. 어쩐지 낮보다 밤에 기운이 나아 보였다.
“넌 밤을 좋아하나 봐.”
제인은 당혹스러웠다.
생각지도 못한 채 내뱉은 말에 다정함이 묻어있어서.
그때 루가 입꼬리를 반듯하게 올리며 제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데시안들은 대부분 그래. 낮보다는 밤을 좋아하지.”
제인은 근처에 있는 쓰레기통에 앙상하게 남은 솜사탕 막대기를 버렸다. 몽글몽글한 솜사탕은 신기하게도 끈적하게 손에 달라붙지도 않았다.
“제인, 넌 낮을 좋아한다고 했지. 특히 낮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그 경계의 시간.”
“응.”
“나는 여전히 낮을 좋아하지 않지만, 하나는 마음에 들어.”
둘은 어느새 드호아망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서 있었다.
“네가 더 잘 보인다는 거.”
제인의 시선이 다시 푸름을 향했다.
어두운 것 중에서 가장 찬란한 존재가 눈앞에 존재한다. 시간과 공간이 먼 감각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아름다운 푸름에 옭아매 버린다.
“……나.”
바로 그때였다.
푸른 눈동자 속, 아득한 공허가 물밀듯이 덮쳐 왔다.
제인은 문득 입술을 가렸다.
“……나 뭐 잘못 먹은 것, 같은데.”
“……?”
“속이.”
그녀가 얕게 헛구역질했다.
“속이 울렁…….”
그때, 밤하늘 가득히 불꽃이 터졌다.
팡!
잎사귀가 촘촘한 꽃망울이 터지는 것처럼 아름답게 하늘을 수 놓았다.
제인은 한 번 더 허리를 숙이며 헛구역질했다.
루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멈췄다.
이내 도무지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등이라도…… 두드려 줄까.”
“……그럴래?”
“…….”
제인은 거절하지 않고 나무 밑동에 쪼그려 앉아서 거듭 헛구역질했다. 이상했다. 배를 탄 것처럼 울렁거리는데 토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팡!
파파팡!
폭죽이 연달아 터졌다.
루는 무척 복잡한 표정으로 제인의 등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