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42)화 (42/168)

42.

두 사람은 적잖이 놀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그때 멧돼지처럼 생긴 우락부락한 남자가 원형 안으로 들어왔다.

“이봐, 예쁜이! 이번엔 내가 도전하지!”

밀리타는 제인을 향해 방긋 웃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도전장을 내민 남자에게 돈이 수북이 쌓인 나무 상자를 가리켰다.

바지춤을 뒤적거리던 남자가 은화 몇 잎을 그 안에 던져 넣고 밀리타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밀리타는 단검을 들지 않은 맨몸으로도 멧돼지 같은 남자에게 밀리지 않았다.

아니, 우세했다.

그날 골목길에서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던 움직임이 제인의 눈에 들어왔다.

밀리타는 무척 날렵했다. 단순히 재빠르다고 하기보다는 부드럽고 유연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바람이 부는 대로 몸이 기우는 갈대 같았다.

남자의 우악스러운 공격이 계속 이어졌으나 밀리타는 모두 여유롭게 피했다.

이내 거침없이 공격을 퍼붓던 남자가 발을 헛디뎠다.

밀리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남자의 머리를 돌려찼다.

마치 힘있게 쏜 화살 같았다.

머리에 강한 타격을 입은 남자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그러다 상체를 숙이고는 짐승처럼 우는 소리를 내며 밀리타에게 달려들었다.

밀리타는 이번에도 가볍게 피했다. 그러다 눈 깜짝할 새에 허공으로 뛰어올라서 한 발로 남자의 등 뒤에 올라서더니 커다란 머리통을 찍어 눌렀다.

“……크흑!”

남자가 머리를 맞고 느릿하게 나자빠지는 동안 그녀는 몸의 중심을 뒤로하며 바닥에 착지했다.

이내 손을 툭툭 털며 일어섰다.

“당신은 주먹도 다리도 무겁고 시야까지 좁네.”

순식간에 환호성이 터졌다.

휘파람 소리와 박수갈채가 쏟아졌고, 은화가 우박처럼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렇게 드호아망 축제 한복판에서 제인의 황당함과 경외감이 밀리타를 향하고 있었다.

벌 만큼 벌었으니 이만 갑니다.

밀리타는 그런 뉘앙스로 상자에 쌓인 돈과 바닥에 떨어진 돈을 가방에 쓸어 담았다.

모여있던 사람들이 아쉬운 듯 웅성거리다가 뿔뿔이 흩어졌다.

드호아망의 축제에서 구경거리는 몸을 부딪치는 격투가 아니더라도 차고 넘쳤다.

바닥에 쓰러져있던 장정의 무리가 그의 다리를 질질 끌고 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주변이 정리되었다.

“또 뵙네요.”

“……그러게.”

제인은 어쩐지 머쓱해서 목덜미를 만졌다.

교황청에 납치되었을 때 밀리타가 자기 손에 너무나 가볍게 쓰러지던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당해줬던 거구나.

제인은 멋쩍음이 가라앉지 않는지 괜히 주변에 시선을 두었다.

밀리타가 물었다.

“술 한잔할까요?”

“……술?”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던 터였다. 그런데도 제인은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고 고민했다.

술자리라. 마지막으로 가져본 게 언제였지.

페브리아에서 유일하게 살갑게 지냈던 하임은 술을 한 입도 못 마셨던 터라 제인도 자연스럽게 술과 친하지 않았다.

종종 궁정에 연회가 있을 때도 모두가 어울리는 와중에 비상사태를 대비하는 자리를 자처했다.

독립된 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는 더욱 고립된 생활을 했으므로 그런 자리가 점점 더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제인은 사실 밀리타에게 의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페브리아 밖에서의 첫 번째 만남은 우연을 가장한 밀리타의 계획적인 접근이었다.

그에 비해 지금 두 번째 만남은 그녀의 표정으로 보아 정말로 예상치 못한 일임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제인은 밀리타를 경계했다.

만약 그녀가 자신을 한 번 더 순순히 보내준다면 교황의 끄나풀이라는 명목으로 제게 접근한 게 아닐 확률이 높았다.

고작 저 하나 잡기 위해 이렇게까지 시간을 끌 필요가 없으므로.

제인은 결국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낮이고, 게다가 일행이 있어서. 어……?”

루가 보이지 않자 제인은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를 잠시 지켜보던 밀리타가 손을 뻗으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분요?”

루는 레스토랑 건물 꼭대기에 앉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긴 언제 올라간 거야?

제인이 다소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밀리타는 쉽게 포기했다.

“어쩔 수 없죠. 보아하니 일행분께서 합석하는 걸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으니까요.”

……여기서 저 표정이 보인다고?

제인은 이렇게나 먼 거리에서 표정까지 읽어낸 밀리타에게 탄복의 눈빛을 보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코앞의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앞에 보이는 벽돌 건물이에요.”

제인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상냥한 목소리가 덧붙여졌다.

“제가 묵고 있는 숙소요. 내일 저녁 8시쯤 1층에 있는 맥줏집에 있을 거니까 오세요.”

“……갈 수 있으면 갈게. 기다리지는 말고.”

“싫어요.”

밀리타가 활짝 웃으며 마저 대답했다.

“기다리는 건 제 마음이죠.”

제인이 무어라 대답하기 전이었다.

어느새 그녀의 뒤에 선 루가 제인의 가슴 위로 두 팔을 감으며 밀리타를 보았다. 나른하게 웃는 미소에 음험한 적대감이 흘러넘쳤다.

밀리타가 사붓이 웃다가 제인에게 “갈게요.” 하고 인사했다. 이어서 자신을 쫓아내는 루에게도 가볍게 목례하고 돌아섰다.

* * *

세실은 기가 막혔다.

호엘리반의 개인 정원 안에서, 겹겹이 찢긴 채 엉망이 된 결박 마법진의 잔해와 그 가운데 멀쩡하게 앉아 있는 프시오를 보곤 이마를 문질렀다.

“환장한다…….”

“……세실.”

“다친 데는.”

“전혀.”

세실이 다가와서 상태를 확인하자 프시오가 말을 덧붙였다.

“호엘리반이 수면제를 먹였나 봐. 멍하긴 해.”

“……미친 새끼.”

프시오 말대로 수면제 성분이 읽히긴 했으나 체내에서 거의 희석이 된 상태였고 그 외에는 어디 하나 다친 곳이 없었다.

괜찮을 거라 예상은 했다.

그러나 직접 눈으로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몸에서 힘이 풀렸는지 털썩 쪼그려 앉은 세실이 고개를 떨구었다.

프시오는 바닥에 떨어진 마법진의 잔해를 만지작거렸다.

“내가 호엘리반에게 배우지 못한 마법 같은 건 없어. 결박 마법을 배울 땐 결박을 푸는 마법을 함께 배웠지. 그의 어떤 마법도 나를 가두지 못해.”

“……그래.”

“호엘리반은 그걸 누구보다 잘 알아. 알면서도 이런 거야.”

세실도 알고 있었다.

호엘리반이 프시오에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기까지 왔을 뿐이었다.

“지금은 그냥.”

프시오는 뜸을 들였다.

그러다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호엘리반을 혼자 두지 못하겠어서, 그래서 안 나가고 있었어.”

“징글징글한 것들.”

“그래도 네가 달려와 주니까 좋네. 너도 나 되게 좋아하나 봐.”

“개소리 작작 해라, 진짜.”

버릇처럼 파탐을 찾던 세실은 제인의 병실에 겉옷을 두고 온 것을 다시 깨닫고 작게 욕을 뱉었다.

그녀의 곁에 있던 프시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부탁이 있어.”

세실이 질색했다.

“양심 좀 있어라. 찾으러 왔으면 됐지, 부탁까지 들어줘야 하니?”

“솜브 좀 데려와 줘.”

“……솜브라면 뭐.”

세실은 프시오의 집에 혼자 있을 분홍 드래곤을 떠올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서, 호엘리반 곁에 있어 주려고?”

“한동안은 그래야 할 것 같아.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마냥 호엘리반을 탓할 게 아니었어. 전쟁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앙디스가 독립할 수 있게 도와주면 되는 거더라.”

세실이 씁쓸하게 웃었다.

앙디스의 독립을 도와준다…….

호엘리반이 진심으로 그걸 바랄 리 없었다.

사실은 앙디스인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싶은 게 그의 본심일 테니.

그 본심을 애써 억누르는 이유는 하나였다.

프시오가 원치 않으니까.

그러니 죽여도 시원찮을 것들이 주제도 모르고 전쟁을 종용해도 참고 있다는 걸 자신이나, 프시오까지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세실은 재차 곱씹었다.

앙디스의 독립.

생각만 해도 가슴이 갑갑해졌다.

앙디스를 향한 호엘리반의 증오와 적개심을 떠나서 상황 자체만 봐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게 가능한 일이긴 하니?”

프시오는 잠시 침묵했다.

일평생 원하는 것들을 쉽게 가져본 적이 없던 프시오였다. 하지만 결국에는 늘 가지고야 말았다.

언제나 힘들고, 어렵게.

혼자서.

그러나 이제는 외톨이가 아니다.

“쉽진 않겠지.”

세실은 그녀의 말이 ‘쉽진 않겠으나 해내고야 말겠다’라는 뜻임을 알았다.

프시오가 그렇게 결심했다면 세상이 두 쪽 나도 해내리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세실의 얼굴에 착잡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려 할 때였다.

“부탁이 하나 더 있는데.”

세실이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 너 혹시 쓰레기니? 바쁜 일 다 내팽개치고 구하러 온 사람한테 고맙다는 말은 둘째치고 무슨 부탁이 이렇게 많…….”

“제인의 스승이 되어줘.”

벌떡 일어선 세실이 온몸으로 저항하듯이 뒷걸음질 쳤다.

“뭐야, 이 맥락 따위 똥통에 처박은 부탁은!”

프시오가 재차 입을 떼려 하자 세실은 손을 내저으며 듣기를 거부했다.

“야, 너 그냥 입 다물어!”

“세실…….”

“내 이름 부르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마! 입 닥치라고!”

세실이 펄펄 뛰며 학을 떼었다.

“네가 내 안식년 계획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것 같은 더러운 예감이 강하게 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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