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루는 그때가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페브리아인들의 우레와 같은 함성까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제인의 자작극이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
그의 목소리에 즐거움이 잔뜩 실려있었다.
“그 땅의 결계와 내 혈액석이 동시에 폭발적으로 반응했어.”
실로 폭발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루의 혈액석은 부서질 것처럼 진동을 일으켰고, 결계는 살아있는 유기체라도 되는 듯이 꿈틀거리면서 두께가 두꺼워졌다.
“자작극이 끝난 후에 내 혈액석에 주입된 힘을 확인해보니 인간들의 믿음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더군. 정확하게는 그 나라의 종교인 샤와 아낙시오니아를 향한 신앙심.”
데시안은 의심하기를 좋아했으므로 그 모든 게 우연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는 시간을 두고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그러자 지금까지 가볍게 지나쳤던 ‘약간씩 진폭이 다를 때’가 같은 시간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페브리아인들이 샤의 주체인 아낙시오니아를 향해서 하루 두 번 기도 하는 순간이었다.
루는 확신했다.
페브리아의 결계를 구축하는 힘의 정체가 믿음이라는 걸.
“호엘리반, 이제 알겠나? 그 나라는 인간들의 순수한 신앙심을 마력으로 변환시켜서 결계를 생성하고 유지하고 있었던 거야.”
* * *
칼같이 진료를 끝낸 세실은 여느 때보다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 프시오 면회 시간에 맞춰서 호엘리반이 왔었, 아니 있었다고……?”
대화의 흐름은 대충 이러했다.
제인은 진료받는 내내 마법을 가르쳐 달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곱씹고 있던 참이었다.
말해야지 하면서도 도무지 손과 발이 오그라들어서 입을 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미루다 보니 어느덧 진료가 끝날 시간이 되어 있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된 제인이 겨우 말문을 열었다.
-호엘리반이 프시오의 스승이었다면서요?
그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가고자 한 말이었다.
세실이 묘하게 흔들리는 눈으로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고, 제인은 어제 프시오와 호엘리반을 같이 만났다는 말을 한 게 전부였다.
“네, 오긴 왔었…….”
“미친! 그 새끼 눈 돌았을 텐데!”
“세…….”
심지어 그가 몰래 부엉이로 변신해서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고 말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세실은 거칠게 욕을 내뱉더니 겉옷도 챙기지도 않고 병실에서 뛰쳐나가 버렸다.
병실에 덩그러니 혼자 남은 제인은 무언가를 붙잡으려던 것처럼 허공에 손을 올린 모습으로 굳어있었다.
“……실?”
우흥. 우흥.
핍의 울음소리만이 병실 안 가득히 울렸다.
* * *
“개새끼 안에 있죠?”
“개새…….”
호엘리반의 비서인 나벨은 세실의 물음에 말을 잇지 못했다.
세실은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가 내쉬길 반복했다. 그리고 씹어먹을 듯한 말투로 다시 물었다.
“흐을르븐(호엘리반), 안에 있죠?”
오늘은 막기가 꽤 어렵겠는데…….
나벨은 가능하면 마법을 쓰지 않고 세실을 막고 싶었다.
치유 마법사는 상처를 발견해서 치료할 수 있지만, 그 반대의 것도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모시는 분의 직계 가족을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안에 손님이 계셔요.”
“있다는 거네, 그 개새끼.”
“세, 세실!”
세실이 막무가내로 들어가려고 하자 나벨이 한껏 몸을 낮춰서 그녀의 허리춤을 끌어안았다.
세실은 나벨의 팔에서 벗어나려 바둥거렸다.
“이거 놔요!”
“안 돼요!”
“이 여자가! 뭘 먹고 힘이! 날이 갈수록!”
이런 일이 흔치는 않았으나 전혀 없지도 않았다.
나벨은 수년간의 경험 끝에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지금 같은 자세로 세실을 말리는 게 가장 안전하고도 현명하다는 것을 터득했다. 그녀 나름의 노하우였다.
그때 복도 문이 활짝 열렸다.
안쪽에서 소란을 들었는지 느긋하게 걸어 나오던 루가 세실의 한쪽 어깨를 잡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잔뜩 흥분한 세실은 오랜만이군. 놓치기 아까운 구경거리야.”
세실이 비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손님 나온 것 같은데 그만 놔요, 이 사람아.”
나벨은 곧바로 세실의 허리에 두른 팔을 풀고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서랍에서 거울을 꺼내어 얼굴을 보며 콧잔등에 맺힌 땀을 손수건으로 톡톡 닦아 내었다.
루도 세실의 어깨에 올렸던 손을 거두었다.
세실은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제인에게나 가보세요.”
“그렇지 않아도 그 녀석을 데리고 외출했으면 하는데.”
세실은 루를 잠시 바라보다가 “그러세요.” 하고는 그대로 지나쳐갔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를 걸어가더니 별안간 무엇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우뚝 섰다. 그리고 막 이동의 문을 열려고 하는 루를 불렀다.
“루! 제인의 병실에 제 겉옷이 있을 거예요. 안 주머니를 보세요.”
“파탐이 든 주머니?”
“아뇨, 그 반대편. 펜던트 목걸이가 있으니 제인이 외출할 때 걸게 해주세요. 아직 마나를 조절할 수 없어서 금방 탈진할지도 모르니까 우선 그것으로 대신할 수 있게요.”
“그래.”
“이 말도 전해주세요. 겨우 낫게 만들었는데 빌빌거리면서 돌아오면 사지를 잘라 놓을 거라고요.”
그러자 루가 웃음을 흘렸다.
“팔 정도는 나쁘지 않지.”
그는 이윽고 몸을 빙글 돌려 이동의 문을 열었다.
“하지만 다리는 안 돼.”
그는 문 안으로 들어가며 한층 더 즐거운 목소리를 내었다.
“그 녀석이 나한테 걸어오는 모습을 보는 게 내 낙이거든.”
문이 닫히자, 사위가 조용해졌다.
우아하게 땀을 닦던 나벨도, 세실도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곧이어 세실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루가 제인을 다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다는 말이란 걸 알고 있었다.
“…….”
다만 그 말이 평범하지 않아서 할 말을 잃은 것이었다.
신경 쓰지 말자.
지금 세실은 또 다른 미친놈에게 볼일이 더 급했다. 그대로 몸을 돌린 그녀는 호엘리반의 집무실 문을 거칠게 열었다.
서류를 보고 있던 호엘리반은 약속도 없이 찾아온 세실을 보고 놀라기는커녕 그러려니 하며 일에 집중했다.
세실이 물었다.
“프시오 만났다면서. 잘 보내줬니?”
“응.”
“정말 잘 보내줬다고?”
“응.”
“어머니가 그러셨거든. 너 거짓말할 때 속눈썹 내리깐다고.”
이번에는 응, 이라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닮은 구석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남매에게도 공통점이라는 게 있었다.
가족을 사랑한다는 것.
그것 하나.
세실은 그의 시선이 머문 서류를 지그시 누르며 말을 이었다.
“놀랍다.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새끼라서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진짜였네.”
“…….”
“프시오 어딨어?”
호엘리반이 대답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세실은 그가 보던 서류들을 빼앗아서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 두 손을 책상 위에 짚으며 입술을 짓씹듯이 물었다.
“어딨어.”
“보내줄 생각이야.”
느릿하게 고개를 든 호엘리반이 고개를 슬쩍 저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냐.”
조소를 띄운 세실이 그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야. 우리 서로 잘 알잖아. 너도 바쁜 놈이고 나도 바쁜 년인 거. 그러니까 시간 잡아먹는 짓 하지 말자.”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프시오 어디로 데려갔어? 말해. 직접 내 눈으로 괜찮은지 봐야겠으니까.”
호엘리반이 세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 괜찮을 건 뭐야? 내가 프시오한테 함부로 할 것 같아?”
“이 머저리 새끼 좀 보게.”
세실은 잡았던 그의 멱살을 거칠게 놓았다.
“지금 네가 하는 짓이 함부로야!”
이어서 뒤돌아 머리를 짚으며 분을 삭이는가 싶더니 다시 호엘리반을 보며 이를 으드득거렸다.
“피 한 방울 안 섞였어도 너랑 나는 가족인데, 앞으로 내 얼굴 어떻게 보려고 이러니? 창피하지 않아?”
호엘리반이 조용히 웃었다. 웃는 게 습관이 된 것처럼.
세실은 그가 이러는 이유를 아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프시오가 필요했다. 하지만 방식이 잘못되었지 않은가.
분통이 터지려는 걸 겨우 참는 얼굴로 또박또박 힘을 주며 말했다.
“똑바로 말해. 프시오 어딨어.”
* * *
드호아망의 축제 한가운데.
제인은 황당함과 경외감이 뒤섞인 눈으로 서 있었다.
물론, 십 분 전까지만 해도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그녀를 축제에 데리고 온 루는 노점상을 지나가다가 튀김과자의 한 종류인 크리피스부터 와플, 타르트 등 갖가지 길거리 음식을 제인에게 사주었다.
그녀는 그가 사주는 족족 미간을 좁히며 맛있게 먹었다.
그들은 드호아망 축제의 꽃인 마법 경연 대회도 보러 갔다. 저마다 갈고 닦은 마법을 펼치던 참가자들은 긴장감 속에서 구경꾼들의 투표를 받았다.
대회 상품은 라라테라는 마석이었다.
상품을 수여 받은 사람들마다 황홀하다는 얼굴로 ‘와’하고 입을 벌리며 탄성을 질렀다. 그럴 때마다 루는 왠지 모르게 ‘쯧’ 하고 못마땅해했다.
이후에는 마도구가 늘어진 노점 골목으로 가서 생전 처음 보는 물건들을 구경했다.
루는 제인에게 제대로 만들어진 물건과 사람 등 처먹는 물건을 어떻게 구별하는지 상점 주인 앞에서 낱낱이 설명해 주었다.
제인은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희게 질려서 그의 팔을 잡고 서둘러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러다 사람들의 함성이 터져 나온 곳으로 발길을 돌린 것은 불과 십 분 전이었다.
“와아아아!”
사람들이 원형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한창 격투 내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정식으로 축제에 등록한 행사 같진 않아 보였다. 그냥 어물쩍 판이 열린 듯했다.
호기심에 기웃거리던 제인이 구경꾼들과 섞여 빈틈으로 쏙쏙 들어갔다.
루는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는 걸 싫어했기에 주변 건물 중에서 제일 높은 곳을 찾아 올라가 앉아서 제인을 지켜보고 있었다.
“컥!”
제인이 원형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장정 하나가 바닥을 구르면서 그녀의 발에 치였다.
“주먹은 꽤 쓸만한데, 다리가 무거…….”
제인은 익숙한 목소리에 시선을 들어 올렸다.
장정을 가볍게 바닥으로 내리꽂은 사람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밀리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