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40)화 (40/168)

40.

“저 꼴통 왜 저러고 엎어져 있는 거죠?”

루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재차 어깨를 으쓱거렸고, 그사이 제인은 붉은 기가 남아 있는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침대에 앉았다.

장갑을 낀 세실이 진료를 준비하며 루에게 말했다.

“진료 끝나면 그때 다시 오세요.”

“그러지.”

루는 세실을 지나쳐서 제인에게 다가갔다.

금방 열기가 가라앉은 그녀의 얼굴이 아쉬웠는지 약간의 홍조가 남은 뺨을 가볍게 만졌다.

“금방 올 테니 기다려.”

그러고는 곧바로 이동의 문을 만들어서 병실에서 나갔다. 소란스러운 존재가 아니었음에도 그가 사라지자 병실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지극정성이네.”

준비를 끝낸 세실은 기본적인 제인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뭐가 예쁘다고 하루도 안 빠지고 오는지.”

제인은 세실이 무언가 착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저 입원하고 처음으로 찾아온 거예요. 자기 입으로 닷새만이라고 한걸요.”

자리에 누우려던 제인은 이어지는 세실의 말에 어정쩡한 자세로 굳은 채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 뜬 모습을 본 게 닷새만이라는 거겠지.”

“……?”

“네가 잠든 밤마다 왔었으니까. 저자는 널 여기에 두고 단 하루도 오지 않았던 날이 없어. 간호 시종들이 기록한 일지라도 보고 싶으면 말하던가.”

내가 잠든 밤마다.

하루도 오지 않았던 날이…….

“없다고…….”

제인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손등으로 입술을 가렸다. 가슴 안에 아주 작은 무언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감각이 간지러웠다.

그녀는 지금 느끼는 이 어색한 감정의 이름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 이름은 기쁨이었다.

마음 깊은 속에서 차오르는 희미한 기쁨.

* * *

호엘리반의 집무실에 온 루는 뻑뻑해진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제인과 있을 때는 사뭇 다른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때 호엘리반이 직접 내린 커피를 그 앞에 놓으며 흡족하게 웃었다.

“다시 세공한 라라테는 라트올에게 받아서 확인했어요. 완벽하던데요.”

“완벽…….”

루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으나 그건 호의적인 미소가 아니었다.

그를 증명하듯 루의 마력이 집무실 안 공기를 비틀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숨이 막혀서 기절하고도 남았을 텐데 호엘리반은 강한 보호 마법으로 그럭저럭 숨을 쉬었다.

루가 커피에 손을 뻗으며 물었다.

“그따위 라라테가, 네겐 완벽인가?”

루는 요 며칠 드호아망의 축제 때 쓰일 라라테 때문에 무척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세실이 왜 그리 파탐이나 커피를 달고 사는지 조금은 이해되었다.

호엘리반은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루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이어서 말했다.

“처음 세공했던 라라테도 아무 문제 없었어. 더 훌륭했으면 훌륭했지.”

루의 말은 사실이었다.

오히려 안에 든 내포물조차 처음 세공했던 라라테가 더 적었고, 세공 각도와 연마 상태도 훨씬 더 훌륭했다.

호엘리반의 까다로움을 알고 있던 라트올이었기에 가지고 있던 라라테 중에서도 고르고 골라 심혈을 기울인 결과물이었다.

그렇지만 호엘리반은 그 섬세한 결과물을 보자마자 단 한마디로 혹평했다.

-당신, 색맹이라도 되었나요?

그 자리에서 누구보다도 머리가 지끈거렸던 건 루였다.

라트올이 세공을 끝낸 뒤, 마석의 마력을 가공하는 것은 루의 몫이었다. 즉, 세공을 새로 해야 한다는 건 마력의 가공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는 최근 들어 그토록 끔찍한 나날을 보낸 적이 없었다.

맞은 편에 앉은 호엘리반이 침착하게 말했다.

“라라테는 연마되는 각도에 따라서 굴절이 달리 일어나죠. 그럼 표면에 분산되는 색상도 묘하게 다른 빛을 띠고요.”

연금술 마법사는 물질에 대해 완벽히 이해해야 비로소 원하는 것을 구현할 수 있다.

화폐를 비롯한 환금성 품목이 연금술로 금지되지만 않았더라도 호엘리반은 자신이 알아서 라라테를 만들고도 남았을 지독한 인간이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처음 가져오신 라라테는 아름답긴 했지만…… 제가 원했던 색이 아니었어요. 루, 그건 제게 문제예요.”

그 지독한 인간에겐 자신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연마 각도와 빛의 색상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게 아무리 하찮은 오기 일지라도.

하지만 그것이 라트올에게 무례를 범해도 된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래. 네 요구는 이해했어. 하지만 다음부터 라트올에게 또 그런 식으로 대한다면.”

루의 푸른 눈빛에 날 선 살기가 가득 찼다.

“그땐 웃으면서 넘어가지 않아.”

공기가 더욱 무거워졌다.

호엘리반은 점점 더 숨이 막혀오는 상황 속에서도 나긋하게 웃었다.

“많이 시달리셨나 봐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색맹이냐는 호엘리반의 혹평을 듣고 라트올의 눈이 뒤집혀버렸다.

덕분에 일을 과중하게 떠안게 된 건 루였다.

그렇지 않아도 시간이 빠듯하거늘, 잡다하고도 폭발적인 라트올의 감정들이 마석에 들러붙어서 마력을 가공하는데 몹시도 애를 먹였다.

-라트올, 일단 진정하고.

이렇게 한마디 했을 뿐인데 전혀 본 적 없었던 희번덕이는 눈빛이 루에게 향했었다.

“당연히 시달렸지. 새벽에 문득, 둘 다 죽일까 고민했을 만큼.”

농담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호엘리반은 움츠러들지 않았다.

평소에 루를 존경하고 잘 따르는 그였으나 고객으로서는 원하는 부분에서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집요한 완벽주의자들에게는 자신만의 정답이 있죠.”

루는 소파에 기댄 채 손사래를 쳤다.

“그 정답에서 나는 좀 빼주지 않겠어? 상당히 피곤하거든. 너희와 다르게 타고나길 나태하고 권태로운 존재라는 걸 잊지 마.”

호엘리반은 예의 바른 태도로 “네.” 하고 대답했다.

어느덧 창밖에는 구름에 가려져 있던 태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집무실 안으로 햇살이 퍼져나갔다.

“루,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하는데요. 오늘 뵙는 건 라라테 때문이 아니잖아요.”

호엘리반은 양 무릎에 팔꿈치를 얹고 상체를 앞으로 당겨 앉으며 방긋 웃었다.

“그 의뢰를 한 지도 벌써 일 년이 넘었군요, 루.”

“덕분에 재미있었어.”

“기대되네요. 그럼, 이제 들어볼까요?”

호엘리반의 눈이 곱게 접혔다.

“페브리아의 결계를 유지하고 있는 마력의 근원이 무엇인지 말이죠.”

작년 이맘때쯤, 그가 루에게 요청했던 의뢰는 마석을 통해서 페브리아를 둘러싼 결계의 정체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처음에 루는 그 의뢰를 거절했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귀찮아서.

그는 마석을 납품하는 것 외에는 어떤 의뢰도 받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 게으른 성정이 만들어 낸 한 줄짜리 거래처 계약서 때문에 루가 거절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루는 드호아망에 필요한 모든 마석 의뢰를 전담한다.]

당시 호엘리반은 그 계약서 내용을 교묘하게 바꿔서 이렇게 말했었다.

-페브리아의 결계의 근원을 밝혀야 해요. 그 나라의 마석을 관찰해 주세요. 그리고 당신의 피도 응고시키면 마석이 되잖아요. 혈액석을 이용해서 페브리아 결계의 근원을 찾아 주세요.

계약과 약속은 데시안에게 족쇄와 같았다.

루는 호엘리반의 약아빠진 의뢰를 받아 주는 대신 한 줄짜리 계약서에 기재되어 있던 단어 하나를 수정했다.

[루는 드호아망에 필요한 모든 마석 ‘납품’을 전담한다.]

그렇게 프시오의 마법에 걸린 몸으로 페브리아에 간 루는 그 나라의 결계를 파악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무척 설렁설렁.

하지만 곧 흥미가 생겼다.

그 땅에 삼 페렐츠도 안 할 것 같은 싸구려 모조품을 삼백 온트나 주고 산 인간이 있었다. 그걸로 쿠트칸의 목숨을 살리려고 했던, 우스운 인간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페브리아라는 곳, 꽤 재미있더군.

호엘리반은 따분해 마지않던 그의 태도가 어째서 단숨에 변했는지 알 수 없었으나 결계에 흥미를 보이는 것만으로 마음이 놓였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한 달, 두 달, 최대 석 달째면 들을 수 있겠지 싶었던 결과는 일 년 가까이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인고의 시간 끝에 결과를 듣게 된 참이었다.

호엘리반의 기대에 부응하듯 루가 커피잔을 내려놓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군더더기 없이 산뜻하게 말했다.

“믿음.”

……째깍째깍…….

시계 초침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호엘리반은 이어질 말을 기다렸으나 나태하고 권태로운 데시안은 어떤 부연 설명도 하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커피를 마셨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그는 ‘설마, 끝인가요?’라고 섣부르게 말하지 않기 위해서 무던히 애를 썼다.

그럴 것이, 고작 ‘믿음’이라는 두 음절을 듣자고 이토록 긴 시간을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더 상세한 정보가 필요했다.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루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하나하나 일일이 설명해줘야 하나, 고민하다가 빈 잔을 내려놓으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처음 한 달은 페브리아 안에서 채굴하지 않은 마석을 관찰했어. 예상대로 발산하지 못한 마력이 마석 가운데에 집약되어 있더군.”

호엘리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미 존재하는 외부 마력을 끌어당겨서 결계를 유지한 게 아니었네요.”

“그래. 그다음에는 내 혈액석을 페브리아의 곳곳에 심어두었지. 일 년 가까이 관찰했지만, 주기적으로 진폭이 다를 때 외에는 눈에 띄는 큰 반응은 없었어.”

루가 갑자기 키득거렸다.

“그러다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지. 페브리아의 교황이 자국민들 앞에서 제인을 데리고 우스꽝스러운 자작극을 했거든.”

“자작극이라면……?”

루는 지체하지 않고 답했다.

“기적의 신의 사자.”

그 사건이라면, 호엘리반도 자작극이리라 짐작했었다.

그와 마주 앉은 루가 비웃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단언하지. 네가 무엇을 짐작하든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예상을 빗나갈 거라고. 왜냐하면 넌 그 사건이 교묘한 마법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마법이 아니었다는 말씀인가요?”

어리둥절.

호엘리반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수식이 표정에 드러났다.

루는 그에게서 좀처럼 보기 힘든 얼떨떨한 모습을 조금 더 관망하다가 가볍게 말했다.

“마법이 아니라 제인이 맹독 현상으로 보여준 자작극일 뿐이었어. 그 녀석, 약제 연구원이거든.”

“……하하.”

“아직 웃긴 일러. 재미있는 건 지금부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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