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반가워요, 제인. 루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요.”
호엘리반 뒤에 서 있는 프시오의 얼굴에 얼핏 근심이 서려 있었다.
그가 악수를 청하며 자신을 소개하려고 입술을 떼려던 찰나였다.
제인은 그의 손을 잡지 않고 빤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 당신 알아요.”
“어떻게요?”
“유명하잖아요.”
악수를 요청한 호엘리반의 손이 여전히 허공에 있었다.
“마법 도시 드호아망의 최연소 집권자이자 마탑주, 호엘리반.”
제인이 고개를 들어서 호엘리반을 응시했다.
마법이 금지된 페브리아에서조차 호엘리반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의 명성이 자자했다.
호엘리반은 제인이 악수를 받아 줄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았는지 손을 거두고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알아봐 줘서 기쁘네요.”
“사소한 일에 기뻐하는 편인가 봐요? 위치에 안 맞게.”
퉁명스러운 그녀의 태도에 호엘리반이 멋쩍게 웃었다.
제인은 여태 쥐고 있던 초콜릿을 뒤늦게 입에 넣고 손가락에 묻은 초콜릿을 티슈에 닦아냈다.
“다 기뻐했어요?”
그러다 문득 호엘리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얼추 다 기뻐했으면 나가 줄래요?”
“……푸흡.”
뒤에서 참지 못한 프시오의 웃음소리가 딸려 나왔다. 서둘러 입을 틀어막은 그녀가 힘겹게 말했다.
“미안합…… 큽. 계속하세요, 제인.”
“……혹시 불쾌했다면.”
조금 난처한 듯이 그가 입을 열자 제인은 단박에 말을 가로챘다.
“불쾌해요.”
“…….”
“언제부터 부엉이로 있었는지도 모르겠고. 무단침입에 염탐이나 하시는 분을 유명세 하나로 기꺼이 반가워 해드리기에는 제가 막.”
제인은 그를 향해 속삭이듯 말했다.
“착하지가 않아서.”
호엘리반의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
얼마 전.
프시오가 네르기니에 면회를 신청한 기록을 확인했던 그는 제인의 병실에 잠시 들어갈 수 있도록 보호자로 등록된 루에게 양해를 구했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프시오와 만나고 싶다는 건가.
-잠시면 돼요.
-이로써 프시오가 나를 싫어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났군. 그나저나 호엘리반, 마지막으로 눈앞에서 멸시나 조롱을 받은 게 언제였지?
맥락 없는 물음이었다.
호엘리반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루는 입매를 끌어 올렸다.
-뭐, 상관없으려나. 언제였든 간에 그날로 경신될 테니까.
생각만 해도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재미있는 첫 만남이 되겠어.
호엘리반은 그제야 루의 말뜻을 이해하고 작게 실소했다.
제인의 비아냥이 계속되었다.
그녀의 왼손이 공손하게 출입문을 가리켰다.
“문은 아시다시피 저쪽.”
“…….”
그가 움직이려는 낌새를 보이지 않자 이번에는 오른손으로 창문을 가리켰다.
“아니면 이쪽으로 날아가시던가요. 훨훨, 자유롭게. 예쁘게.”
역시나 공손한 손짓이었다.
제인의 능청스러운 조롱과 멸시에 프시오는 아예 등을 굽히고 부르르 떨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아내는 게 고역인 듯 괴로워 보였다.
호엘리반은 미소를 잃지 않고 정중하게 예의를 갖췄다.
“결례를 범했네요. 미안합니다.”
제인은 제 어깨 위에 앉아서 평온하게 날개를 골라내고 있는 부엉이를 다시 흘겨보았다.
“이건 부엉이 맞아요? 데시안이든 인간이든 또 다른 걸로 변하는 녀석이라면 미리 말해줘요. 둘 다 같이 내쫓아버리려니까.”
푸드덕!
순간적으로 위협을 직감한 페피가 선반 위로 도망치듯 날아갔다.
호엘리반이 마법을 써서 견과류 한 알을 톡 던지자 놓치지 않고 빠르게 날아서 받아먹었다.
“똑똑한 친구예요. 잘 부탁해요.”
아무렴, 그러시겠지.
“네, 잘 가세요.”
제인이 프시오가 준 상자 꾸러미를 원래대로 닫기 위해 이리저리 살펴볼 때였다.
병실에서 나서려던 호엘리반이 프시오를 지나치며 귓가에 속삭였다.
“마비력 9할. 도움이 될 재목이야.”
“……호엘리반.”
“더 자세한 얘기는 저녁 식사나 하면서 나누는 게 좋지 않겠어?”
* * *
“저거 아주, 옛 주인에게나 똑똑하지.”
호엘리반이 병실에서 나간 후, 제인은 못마땅한 눈으로 선반 위의 페피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평소보다 말수가 더 줄어든 프시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표정이 왜 그렇게 어두워요.”
“네?”
“아까 그 염탐꾼이 나가면서 뭐라고 귓속말하던데, 그래서 그래요?”
염탐꾼.
호엘리반을 이렇게 부르는 자가 또 있을까.
프시오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가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하고 병실을 나선 게 통쾌해서 쿡쿡 웃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당신은 만나기 싫은데 호엘리반, 그 사람이 억지로 찾아온 거죠?”
“영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평소처럼 고저 없는 목소리를 내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원수처럼 보여도 제 스승이자 친구입니다. 살다 보면 소중한 사람과도 사이가 틀어질 때가 있는 거니까요.”
그녀에게 소중한 사람이구나. 그럼 조금만 덜 비꼴 걸 그랬나.
제인이 빈정거림의 유무가 아닌 정도의 차이를 고민하던 차였다.
프시오가 대화의 화제를 바꾸었다.
“회복 속도가 빠르다고 세실에게 들었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처음부터 통증이 있었던 게 아니어서 체감상 호전되는 건 별로…….”
제인은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방금 이건 세실에게 말하지 마세요. 저번에 비슷한 걸 물어봤다가 진짜 어마어마하게 욕먹었거든요.”
프시오는 세실이 제인에게 어떻게 굴었을지 눈에 빤히 보이는 듯했다.
세실은 가엽고 안타까운 것들을 보면 오히려 성질을 부리곤 했다. 속상해서, 마음이 아파서, 분통이 터져서 등 이유는 비슷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세실은 당신을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애정 표현에 가깝죠. 그 녀석은 정말 싫으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않아요.”
“그건 그것대로 고약하네요.”
“맞습니다. 고약하죠.”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킬킬거렸다.
그로부터 얼마간은 시시콜콜한 대화가 계속되었다.
솜브가 제인을 보고 싶어 하면서 아닌 척한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로안나와 엔니오가 편지를 보내주었다, 집에 메로코라는 마법 진액을 발라놨었는데 루가 엉망으로 만들어 놨더라 등 모두 일상적인 이야기였다.
어느덧 창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하늘에 호박빛이 퍼져나가는 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저기, 프시오.”
“네.”
“…….”
프시오가 제인의 침묵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시선을 돌리자, 제인은 제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며 그녀답지 않게 꾸물거렸다.
“제인?”
“제가…….”
다시 말끝에 여백이 더해졌다.
그러다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콧바람을 훅, 쉬고는 입술을 떼었다.
“제가 가지고 있는 힘으로 강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기에 프시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프시오가 여백을 더했다.
제인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루의 힘을 빌리는 것과 자신의 힘을 키우는 것 중 제인은 후자를 선택했다.
아직도 귓가에 생생한 밀리타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안락하게 강해지는 법은 절대 존재하지 않아요.
프시오가 물었다.
“강해지고 싶은 이유가 뭐죠?”
“……지겨워서요.”
그녀의 입가에 조소가 맞물렸다.
“도망치는 게 너무 지겨워서.”
제인은 지금까지 언제나 도망쳤다.
다이애나의 죽음을 뒤로한 채 달음박질했고, 악몽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맹독의 통증에 숨었다.
이번에는 마드리안 교황의 손아귀 대신 데시안인 루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그렇게 늘 더 끔찍한 것에서 덜 끔찍한 것으로 매번 달아났다.
정말이지, 매번.
한 번도 강해지고 싶다고,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누구보다 자신의 나약함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런 자신에게 처음으로 누군가가 말해 준 것이다.
강해질 수 있다고.
당신이 나약해 빠진 모습은 꼴 보기 싫으니 어서 강해지라고.
제인을 보살피는 동안 페브리아를 떠나온 연유를 대강이나마 들어서 알고 있던 프시오는 가볍지 않은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당신의 마나를 이끌어 줄 사람이 필요하겠군요.”
제인이 눈을 반짝였다.
‘당신이라면.’
그녀의 눈빛을 읽은 프시오가 고개를 내저었다.
“제 마법은 연금술입니다. 그밖에 그림자 마법도 쓸 줄 알긴 하지만 당신이 가진 치유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 줄 역할로서는 부족합니다.”
그리고 청천벽력 같은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세실은 다릅니다.”
“에?”
대화의 흐름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치유계에서는 세실을 따라올 자가 없습니다. 적어도 드호아망 안에서는 말이죠. 당신에게 많은 가르침을 줄 거라고 장담합니다.”
아니요. 하지 마세요, 그 장담.
같은 욕이라도 환자와 제자의 입장은 다를 것이다. 소소하게 난무했던 세실의 욕설을 그럭저럭 웃으면서 들을 수 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갈 곳을 잃은 듯한 제인의 두 손이 그건 아니라는 듯 팔랑거렸다.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치면 세실도, 세실도 정신계가 아니라 신체계잖아요?”
프시오는 단호했다.
“그래서 따라올 자가 없다고 하는 겁니다.”
대체 누가……! 누가 자꾸 쓸데없이 따라가려고 했던 거야! 피리 부는 사나이야, 뭐야!
분통이 터진 제인은 욱하고 튀어나오려는 빈정거림을 어렵사리 목구멍으로 삼켜냈다. 그리고 자식 자랑이라도 하는 팔불출 부모 같은 프시오를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세실은 본래 정신계 마나 소유자였으니까요. 현재 신체적 계열 마나는 각고의 노력으로 얻은 겁니다.”
“……그런 게 가능한가요?”
“아뇨.”
프시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제인. 산하 능력이 아닌 선천적 계열 자체를 넘나드는 건 다시 태어나야만 가능할 만큼 미친 짓입니다. 그리고 그 짓을, 세실이 해낸 겁니다.”
해낸 겁니다.
프시오의 말투에 이유 모를 자랑스러움과 뿌듯함이 실려 있었다. 제인은 어쩐지 무언가 크게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