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37)화 (37/168)

37.

프시오가 말했다.

“꼴통? 그게 제인을 지칭하는 거였구나. 한결같네. 애정 표현이 난폭한 건.”

“나 걔 싫어해.”

“너는 꼭 그렇게 말하면서 예뻐하더라.”

꽁초가 쌓인 재떨이에 한 개비가 더 뭉개졌다.

“헛소리.”

“왜? 아니야? 길 가다가 들고양이 다친 것만 봐도 개 같은 새끼가 왜 여기서 뒹굴고 지랄이야, 하면서 온종일 돌보잖아.”

커피를 음미하던 세실의 말끝에 짜증이 묻어났다.

“그게 언제 적 얘기야.”

“넌 아마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걸.”

쿡쿡거리던 프시오는 찻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잔 밑에 가라앉은 설탕 범벅을 작은 숟가락으로 떠먹던 세실이 프시오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눈썹을 찡그렸다.

“언제까지 어린애 꼴로 다닐래.”

프시오는 세실의 물음을 못 들은 척했다.

이어서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녀를 찾아온 연유를 재차 물었다.

“제인의 상태, 말해줘.”

잔을 내려놓은 세실이 마뜩잖은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회복이 빨라. 징그러울 만큼.”

“어느 정도길래.”

“진단상으로 보름 정도 걸릴 만한 상태였는데 나흘 만에 정상 범주로 돌아왔어. 내일이면 거의 완치될 거라, 이틀 뒤엔 퇴원시킬 생각이야.”

“회복력이 그렇다면 마비력은 상상 이상이라는 소리네.”

“그렇지.”

“마비력이 그렇게 강한 경우는 드물지 않나. 심지어 근 몇 년 동안 그 정도 비율은 본 적이 없는데.”

“희귀하지. 게다가 대부분의 치유 마나는 신체 계열의 회복력이나 재생력인 경우가 많았으니까.”

짧지 않은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다 세실의 한숨 소리와 함께 주변 공기가 살아났다.

“호엘리반이 탐낼 거다.”

호엘리반은 드호아망의 모든 서류를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제인은 프시오와도 제법 가까워진 사이였다. 호엘리반이 제인의 존재와 능력을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프시오가 말했다.

“그러기엔 루가 그 아이를 아껴서 크게 걱정은 안 되네.”

세실은 황당한 눈으로 프시오를 훑었다.

이윽고 누구보다 루의 존재를 불쾌하게 생각하면서도 그가 제인을 호엘리반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라 말하는 친구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때? 그렇게나 싫어하는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는 기분.”

프시오는 무감한 얼굴로 스스로를 비웃었다.

신뢰? 신용?

제인에게 했던 그런 말장난은 세실 앞에서 통하지 않는다.

이미 벌써 들키지 않았는가.

프시오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더러워.”

파탐의 끝이 짧아지고 있었다.

밖으로 퍼져나가는 한숨이 연기와 함께 뭉뚱그려졌다.

세실의 기준에서 루는 딱히 해로운 존재는 아니었다. 가끔 그의 언행이 성가시게 느껴질 때가 있었으나, 그마저도 그러려니 하는 편이었다.

세상에는 그보다 악독한 언행을 서슴없이 행사하는 인간이 넘쳐났으므로.

세실이 물었다.

“루가 제인과 계약한 건 알고 있니?”

“……응.”

“그건 어때? 기쁘니?”

프시오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눈엣가시처럼 거슬리던 데시안이 호엘리반이 아니라 다른 인간과 계약했다. 그러니 세실이 묻는 것이다.

이제 좀 속이 후련하냐고.

그래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왜인지 제인을 떠올리자 또 다른 추가 매달린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이상한 일이지.”

프시오의 목소리가 한층 탁해졌다.

“마음을 준다고들 하잖아. 그런데 어째서…… 주고 나면 더 무거워지는 걸까.”

“준 것보다 더 받았겠지.”

“…….”

“너도 모르는 새에.”

프시오를 물끄러미 보던 세실의 눈살이 조용히 찌푸려졌다.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세실이 말문을 열었다.

“프시오. 이유가 뭐든 제인은 루와 계약했어. 그러니까 이 이상의 오지랖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녀가 파탐을 재떨이에 짓뭉개며 마침표를 찍어내듯 말했다.

“어쭙잖게 설치지 말라고.”

“……넌?”

“알면서 뭘 물어.”

세실이 소파에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나는 루를 호엘리반처럼 좋아하지도, 너처럼 싫어하지도 않아. 그러니 루가 누구와 계약하든 관심 없어.”

“…….”

“루가 호엘리반과 계약하려 했다면 벌써 하고도 남았을 테니까.”

정적이 이어졌다.

세실은 얼마 전에 호엘리반에게 했던 질문을 떠올렸다.

-그를 믿니?

-아니.

호엘리반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존경하지. 그것도 무척, 마음 깊이.

프시오는 루를 기피 하면서도 신뢰하고, 호엘리반은 그를 존경하면서도 믿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렇게 간단치가 않다.

“언젠가, 네가 그랬지. 루가 음험해서 싫다고.”

허리를 일으켜 세우고 앉은 세실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음험함을 가지고 있어. 네 음험함이 그의 것을 조금 더 기민하게 알아봤을 뿐이야. 보이니까 싫은 거지.”

프시오는 세실의 말이 듣기 불편했다.

보통 그럴 땐 아주 옳은 말이거나 아주 틀린 말일 때가 많았다.

그리고 인정하기는 싫지만, 대개는 전자였다.

세실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나도, 너도, 호엘리반도 그에게서 보는 게 다 다를 거다. 꼴통 역시 마찬가지일 거고.”

“……제인은 루에게서 뭘 봤을까.”

창문 너머로 다음 날부터 시작될 축제 준비가 막바지에 이른 것이 보였다.

사람들은 슬픔과 고통 따위는 모르는 존재처럼 웃고 있었다. 설령 그것이 가면이라 할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빛나고 있었다.

“아마도…….”

세실이 전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쓸쓸함이지 않을까.”

* * *

프시오가 제인을 면회하러 온 건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서였다. 그녀는 제인이 좋아하는 쓴 초콜릿과 갖가지 쿠키를 상자에 담아 왔다.

“모레가 퇴원이라고 들었습니다. 조금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시간이 나지 않았어요.”

제인은 그냥 둘러대는 말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집에서 나오기 전에 1개월 치 의뢰가 잡힌 일정표를 직접 눈으로 확인했었으니까.

“알아요. 잘 먹을게요.”

프시오의 상자를 덥석 받아든 제인은 쓴 초콜릿에 먼저 손을 가져갔다.

“계속 혼자 있었나요?”

“아뇨.”

제인은 창가의 부엉이를 가리켰다.

“루가 남겨두고 가서 같이 있었어요.”

프시오는 “그렇군요.” 하며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황급히 다시 부엉이를 바라보았다.

이내 인상을 확 찌푸리며 벌떡 일어나더니 부엉이를 몰아세웠다.

“프시오?”

제인은 프시오가 돈 문제 말고는 노골적으로 짜증 내는 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얼떨떨한 얼굴로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사이 프시오가 부엉이를 구석으로 몰아세웠다.

그녀는 허리를 숙이고 부엉이와 눈을 맞추었다.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호엘리반.”

호엘리반?

낯익은 이름에 제인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제인은 방금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들을 빠르게 파악하기 어려웠다.

멍하니 바닥에 떨어진 부엉이 깃털들을 훑다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려서 수려한 사내를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까지 루가 검은 새로 변하는 모습을 수도 없이 보았다고는 해도, 평범한 부엉이가 사람의 형상으로 변하는 건 정말 기겁할 일이었다.

게다가 저 사람은 마법 잡지에서나 보던 사람이 아니던가.

제인은 욕이 절로 나왔다.

이 미친 데시안이 도대체 나한테 뭘 주고 간 거야?

그때였다.

호엘리반이 프시오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무릎과 허리를 숙였다. 어쩐지 몸에 익은 듯한 동작이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나의 애제자는 항상 실망하게 하는 법이 없지.”

꼭 단번에 자신을 눈치챈 것을 칭찬하는 듯한 뉘앙스였다.

프시오는 애써 담담한 얼굴로 그에게서 한 걸음 떨어졌다.

“……일정상 회의 중이신 걸로 압니다만.”

“그거? 미뤘어.”

호엘리반은 프시오의 옷에 붙은 부엉이 깃털을 떼어주었다.

“그렇게 눈에 띄게 내 일정을 캐고 다니면서 면회를 신청하면 어떡해. 꼭 여기로 만나러 오라는 것 같잖아. 안 그래?”

“…….”

“앞으로 정보를 캐낼 땐 더 영악하게 굴어. 그래야 내가 속수무책으로 당해주지.”

그의 뻔뻔한 언행에 프시오는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흐트러짐 없이 미소를 짓던 호엘리반이 창문을 활짝 열었다. 이어서 휘- 하고 휘파람 소리를 내자 부엉이 한 마리가 날아와서 그의 팔에 앉았다.

호엘리반이 변하기 전의 모습과 똑같이 생긴 부엉이였다.

호엘리반이 제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여기, 당신 부엉이.”

제인은 얼결에 팔을 뻗고 부엉이가 올라올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곧바로 어깨에 자리한 부엉이를 향해 눈을 흘기며 의심했다.

이것도 변신하는 거 아니야?

달갑지 않은 눈빛에 부엉이가 흠칫거리며 그녀의 어깨 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곁에 있던 호엘리반이 부엉이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으며 달래 주었다. 부엉이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눈을 감고 그의 손아귀에 고개를 파고들었다.

“제가 보살피던 친구인데 훈련이 잘되어 있어요. 이름은 페피. 새로 지어줘도 좋지만, 페피랑 비슷한 발음이면 더 빨리 알아들을 거예요.”

제인은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황금빛 홍채 안으로 짙게 그려진 고동색 동공. 바람에 부드럽게 일렁이는 회갈색 머리. 그린 듯한 상냥한 미소까지.

모든 게 근사한 남자가 제인에게 부엉이 부르는 법을 하나하나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팔에 앉혀서 바깥으로 휙 뻗어내면 날아요. 방금 휘파람 소리 들었죠? 그렇게 불면 돌아와요. 당신 소리에 익숙해지게 많이 불러주세요.”

그가 살갑게 말을 덧붙였다.

“루에게 설명해 주라고 했었는데, 그의 성격상 하지 않았을 것 같아서.”

호엘리반이 루를 알고 있다.

그것도 단순히 알고만 있는 게 아니라 친밀한 사이로 보였다.

제인은 잠깐이나마 루가 낯설게 느껴졌다.

꼭 그가 자신이 모르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같아서.

어쩐지 유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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