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그렇다더군.”
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눌러 쓴 잉크 펜조차 자국을 내기 마련이건만 제인의 경우에는 독의 고통과 해독 직후의 후유증 외에는 흔적조차 남지 않고 말끔했던 게 이상하다고 생각될 때가 있었다.
“입원할게.”
그녀의 말에 루가 의외라는 듯이 대답했다.
“통원 치료를 원할 줄 알았는데.”
“빨리 회복하고 싶어. 하고 싶은 게 생겼거든.”
“그게 뭐지?”
“……되게 유치한 거야.”
제인이 샐러드를 뒤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들으면 아마 코웃음 칠걸.”
턱을 괴고 있던 루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린 제인과 눈을 맞추고자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괜찮으니 말해 봐.”
다정한 목소리에 슬쩍 고개를 든 제인은 데시안의 낯짝을 보자마자 곧바로 정색했다. 그가 즐겁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꺼이 코웃음 쳐 줄 테니, 어서, 라는 얼굴로.
루의 웃음에 상응하듯 제인도 쌕 웃었다. 이내 감바스 안의 새우와 페페론치노를 같이 건져서 그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가 코웃음 칠 때 사례라도 들길 바라며.
“강해지고 싶어.”
제인의 말에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던 루는 짐작과는 다르게 비소를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느긋하게 물을 마시더니, 묘한 얼굴로 두 가지 선택지를 주었다.
“하나는 차용. 나와 계약했으니 넌 내가 가진 힘을 그대로 쓸 수 있어.”
제인이 신기한 듯 물었다.
“정말?”
“하지만 그건 네 힘이 아니라, 말 그대로 빌려 쓰는 거지.”
“그럼 다른 하나는?”
“네가 가진 마나의 힘을 키우는 것.”
어떤 걸 고를지 잠시 고민했던 제인이 물었다.
“두 가지 다 선택하는 건?”
“불가능해. 데시안의 마력과 인간의 마나는 상성이 안 맞거든.”
루가 강제성이 있는 프시오의 마법에 일부러 걸렸던 것은 그러한 이유였다.
호엘리반의 의뢰를 받은 그가 페브리아 안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그의 마력을 축소해야 했다.
프시오가 여러 차례나 마력을 축소하는 변신 마법진을 알려 주었지만, 그는 좀처럼 인간의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제인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마나라는 재료만 갖춘 상태였으므로 계약한 데시안의 마력과 인간의 마나 중에서 선택이 가능한 시점이었다.
제인이 고민하는 얼굴을 하자 루가 지나가는 말투로 조언을 덧붙였다.
“천천히 고민해 보도록 해. 인간의 마법에 대해서는 프시오나 세실에게 물어보는 게 좋을 거고.”
제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후.
척 보기에도 값비싸 보이는 화려한 의상실 앞에서 제인은 루의 로브 끝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가 의상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끔 말리는 중이었다.
“차라리 퇴원하고 나서 사주지 그래.”
제인은 화려한 옷가지가 넘쳐나는 곳에서 옷을 고르고, 갈아입고, 어울리는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까지 모든 일련의 행동 중 어느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옷이 필요 없는 이유에 대해 서른아홉 가지나 설명했으나 꼭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기분이 들 만큼 들어먹지를 않았다.
차라리, 라고 덧붙인 것은 그러한 이유였다.
“퇴원하고 나서?”
제인은 타이르듯이 말했다.
“네르기니에 입원할 예정 아니야? 환자복부터 웬만한 건 거의 갖춰져 있을 건데 뭐 하러 지금 사. 퇴원하는 날 네가 골라서 사 줘.”
분명히 들었다. 세실이 연구실로 들어오면서 ‘네르기니’라고 했던 것을.
그곳은 드호아망에 있는 의료기관 중에서도 최상급 기관으로, 맨몸으로 들어가도 호화롭게 진료받을 수 있는 시설이었다.
구태여 당장 입지도 않을 옷을 사서 짐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루가 제인의 뺨을 어루만졌다.
닿을 때마다 적응되지 않는 온도였다.
손길이 점점 아래로 이어져 턱과 목덜미에 닿았다. 좋은 건지 싫은 건지 알 수 없는 소름이 돋아났다.
“예쁘게 입기로 약속한다면 그때 사다 주도록 하지.”
“……그럴게.”
차디찬 손가락이 그녀의 따뜻한 손을 되잡았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제인이 네르기니에 입원한 지도 벌써 나흘째.
그녀는 고급스러운 일인 병실에서 간호 시종들의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루가 얼마나 많은 돈을 쏟아부었을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진료 또한 순조로웠다.
담당 의사가 세실이었는데, 그녀는 마치 자로 잰 듯이 진료 시간을 칼같이 지켰다.
간호 시종이 귀띔해주길 그녀는 오전에는 네르기니에서 진료를 보고 오후에는 마탑에서 마법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며 ‘바쁘고 귀하신 몸’으로 통한다고 했다.
세실의 진료는 무척이나 편안했다.
반듯하게 누워서 청량한 빛이 감도는 세실의 손길을 받아내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통증 때문에 입원했던 게 아니었던 터라 상태가 호전되고 있는지 아닌지는 알기 어려웠다.
한 번은 제인이 의뭉스럽게 묻자 자신의 치유 마법을 의심하는 거냐며 귀에서 피가 날 정도로 상스러운 욕을 했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세실은 파탐을 입에 물고서 툭하면 제인에게 욕을 해 댔다.
신기한 건 그녀에게 욕을 들어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것이었다.
“뭘 봐, 꼴통 새끼야.”
지금처럼.
제인은 킬킬거렸다.
이제 자신에게 하는 가벼운 욕 정도에는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세실이 물고 있던 파탐의 타버린 재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투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엎드려.”
세실의 말에 제인은 몸을 뒤집고 베개에 한쪽 얼굴을 파묻었다.
타박상을 입었던 어깨는 일찌감치 그녀의 치유 마법으로 나은 상태였기에 편안하게 엎드릴 수 있었다.
잠시 후, 진료가 끝났는지 세실이 얇은 장갑을 벗어서 가볍게 집어 던졌다.
“이틀 뒤엔 퇴원할 수 있을 거다.”
제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무심한 표정의 제인과는 달리, 세실의 심경은 적잖이 복잡했다.
제인의 체내 상태는 입원해도 최소한 보름은 걸릴 정도였다. 게다가 회복력은 겨우 1할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회복되는 속도가 징그럽게 빨랐다.
마치 온몸이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런데 어째서 자기를 학대하며 살아왔다는 말인가?
고아라고 한들, 겨우 스무 살을 몇 해 넘긴 이 계집애의 주변 어른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망할 새끼들.
누군지는 몰라도 오장육부가 다 튀어나오도록 들고 차주고 싶었다. 세실은 차츰 가라앉으려는 표정을 갈무리하고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지 말자.
그러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이었다.
루는 유일하게 친밀한 인간인 호엘리반과도 계약하지 않은 데시안이었다.
그런 그가 마치 제 것이라는 듯 영역 표시하듯 계약한 인간을 신경 써봤자 골치만 아파질 게 분명했다.
세실은 옷을 추슬러 입는 제인을 힐끗 보다가 입원실 문을 나섰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뒤돌아서서 말했다.
“참. 오후에 프시오가 면회하러 올 거다.”
* * *
“네가 면회하러 올 거라고 그 꼴통한테 말했는데.”
“꼴통?”
네르기니에서 오전 진료를 마친 세실이 마탑 연구실로 출근하자마자 제집처럼 편안하게 차를 우려내는 프시오에게 물었다.
“왜 여기 있지? 여기가 병실인가?”
프시오가 온화하게 말했다.
“병실은 모르겠고, 네가 병신인 건 아는데.”
“……내가 누누이 말했지 않니?”
커피를 내리던 세실이 질린 얼굴로 프시오를 돌아보았다.
“농담 수준이 비루한 건 죄라고. 그것도 큰 죄. 어디 가서 그딴 거 하지 마라. 진짜 걱정돼서 그러니까 새겨들어.”
“염려 마. 수준에 맞는 병신한테만 하니까.”
세실은 입에 물고 있던 파탐을 거칠게 빼 들고 프시오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내가 네 돈을 떼먹길 했어, 뭘 했어? 다섯 살짜리 애한테도 그랬어요? 하면서 소름 끼치게 꼬박꼬박 존대하는 새끼가 왜 나한테만 성격 바꾸고 지랄이야, 지랄이?”
“몰랐어? 내가 너 좋아하잖아.”
“하지 마. 좋아하지 마.”
“그거 어떻게 하…….”
“너 그냥 입 다물어. 아무 말도 하지 마.”
세실은 작은 잔에 내린 커피에 설탕을 네 번 넣고 휘휘 저으며 프시오가 앉은 소파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어서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꾸었다.
“그래서, 어쩐 일이야? 드호아망에는 죽어도 안 들어올 것처럼 나가버리더니. 호엘리반이 너 여기 있는 거 알면 당장이라도.”
“지금 회의 중일 거야. 일정 알아보고 왔어.”
짧게 혀를 찬 세실은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희뿌연 연기가 천장 쪽으로 올라탔다.
프시오는 따듯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안부를 물었다.
“올해 겨울부터 안식년이지? 계획은?”
“계획이 없는 게 계획이지.”
여전히 등받이에 기댄 세실이 흩어지는 연기를 보며 기분 좋게 씩 웃었다.
“뒹굴뒹굴하는 게 뭔지 나도 해보게. 신체계로 전환하기로 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쉬어 본 적이 없어. 너무 열심히 살았어.”
“할 거 없으면 각성제부터 줄여 봐. 파탐도, 커피도.”
“프시오. 잔소리할 거면 돈 내고 해라.”
세실의 말에 프시오는 가볍게 웃으며 본론을 꺼냈다.
“제인의 상태는 어때? 면회는 한 시간 뒤라서 그전에 들른 거야.”
소파에 기대어 있던 몸을 엉거주춤 일으키던 세실이 의아하다는 말투로 물었다.
“뭐야, 꼴통 때문에 온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