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드호아망의 마탑 연구실 안.
세실은 잠이든 채 간이침대에 누워있는 제인의 상태를 살펴보다가 얼굴을 잔뜩 구겼다.
“뭐야, 이 엉망진창은?”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분간되지 않는 세실의 목소리에서 짜증이 잔뜩 묻어났다.
그녀는 서랍에서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꺼내더니 불을 붙였다. 투박하게 생긴 철제 그릇에 담뱃재가 툭툭 떨어졌다.
“……어깨는 또 왜 이래? 겉가죽만 멀쩡하지, 완전 거적때기 같은 넝마인데 대체 어디서 이런 걸 주워 왔어요?”
연구실 구석에 있는 전신 해골 모형을 만지작거리던 루는 그녀가 묻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되물었다.
“체내 상태는?”
“온갖 독성의 잔해가 남아 있어요.”
뚜둑.
해골 모형의 한쪽 팔이 빠져서 덜렁거렸다.
“설명, 자세히.”
“그거 갖고 장난치지 마세요.”
“설명.”
세실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거칠게 담배를 껐다.
“루, 독이란 건 아무리 해독해도 잔해가 남기 마련이에요. 피부에 상처가 나면 희미하든 선명하든 흉터가 남는 것처럼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서랍에서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 불을 붙였다.
“그런데 이 몸에는 독성의 잔해들이 엉망으로 얽혀 있어요. 하루 이틀에 걸쳐진 게 아니라…… 수년 동안 이어진 흔적이에요. 보통의 인간이라면 약물 중독으로 진작에…….”
“죽어버렸을까.”
루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을 가로챘다.
세실은 말을 잇지 못하고 깊이 빨아들인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제인의 손목을 가리켰다.
“계약했어요, 루?”
루의 목소리가 한층 더 무거워졌다.
“세실. 난 너와 사사로운 대화나 나누려고 온 게 아니야.”
루의 반응에 세실은 골이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윽고 설명을 이어갔다.
“이런 엉망진창인 몸으로 지금까지 숨이 붙어있는 건 마나가 약물 중독을 둔감하게 만들어서예요. 주입된 독의 후유증 같은 게 있었어도 금방 마비되었을 가능성이 커요.”
철제 그릇에 다시금 담뱃재가 떨어졌다.
“아마 그사이에 상당한 독의 내성이 생겼을 거예요.”
“가지고 있는 회복력도 같은 맥락이겠군.”
세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단순히 회복이 덜 된 게 아니에요. 몸 안의 모든 마나가 약물 중독을 마비시키는 데 집중하고 있는 거예요.”
“……본래의 마나 수치는?”
“왜 이래요? 상당할 거란 거, 이미 눈치챘잖아요?”
“…….”
“당신 말대로라면, 그 땅에서는 웬만한 마법사들도 마법을 쓸 수 없는데 체내에서 마나가 계속 활성화되고 있었던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세실이 짧아진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짓누르며 말을 이었다.
“완치까지 입원은 보름, 통원은 한 달 이상은 걸릴 거예요. 입원하는 쪽을 추천해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요. 고려해 보세요.”
“그러지.”
세실이 창문 쪽으로 몸을 틀었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녀의 인상이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루, 저 상태가 되려면 실험실 쥐처럼 맹독과 해독제를 수년간 복용해야 해요. 이제 스물한 두 살 정도로 보이는데, 어릴 때부터 학대당했던 건가요?”
“당했다라……. 그런 표현은 어울리지 않아.”
“……?”
“자학이었으니까.”
“……이런, 미친!”
그의 말에 세실은 루를 돌아보며 학을 떼었다.
“혼자서 저 지경이 됐단 말이에요?”
* * *
언제 잠이 들었던 거지?
제인은 간이침대에 앉아서 몽롱한 상태로 두 눈을 껌뻑거렸다.
“여기, 물.”
그렇지 않아도 목이 타던 참이었다. 제인은 루가 건네주는 물잔을 받아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갈증이 가시자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있는 곳은 페브리아 궁정의 연구실과 비슷한 구조였다.
루는 이곳이 드호아망 마탑에 있는 세실의 연구실이라고 말해주었다.
제인에게 물잔을 다시 받은 그는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커피를 마셨다.
제인은 잠들기 전 상황을 복기했다.
리톨을 보았고, 자신의 마나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이후 루가 뒤에서 끌어안으며 세실에게 가자고 했던 것 같다.
거기서부터다.
그리고 기억이 없었다.
“루. 갑자기 왜 재웠어?”
그녀의 물음에 루가 멈칫거렸다.
제인으로서는 물어 마땅한 질문이었다. 세실에게 가는 건 미리 알고 있었으니 어째서 잠든 채로 와야 했는지 의문이 들 법했다.
그런데도 루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프시오와 마찬가지로 그는 제인의 마력이 치유계열 중 신체계의 회복력 혹은 재생력으로 짐작했었다.
하지만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신체계가 아니라 정신계일 줄은, 게다가 그녀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현상이 마비일 줄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강도 높은 유리에 실금이 가는 기분이었다.
그는 여유를 잃었다.
“루?”
“그야…….”
루는 사붓이 웃으며 제인을 돌아보았다.
“데려오기 편하니까.”
데시안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수많은 사실 중 단 하나의 진실을 말할 뿐.
제인이 빙그레 웃었다.
“짐짝 같고 좋았겠네.”
“아무렴.”
“넌 진짜…….”
그때, 연구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네르기니에 연락했으니 바로 입원 수속 밟…….”
거침없이 연구실로 들어오던 세실이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그러다 겉옷 주머니에 양손을 쿡 찔러 넣고 제인의 코앞에 바짝 다가왔다.
“야.”
제인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세실은 불쾌한 듯 눈썹을 찌푸리는 제인에게 다가가 욕지거리부터 뱉었다.
“그따위로 살지 마, 이 새끼야.”
“지금 무슨…….”
제인은 황당해서 말문이 턱 막혔다. 궁정에서 자라온 그녀 인생에서 적어도 자신보다 입이 거칠고 사나운 여자는 없었다.
“네 목숨이 무슨 두세 개쯤 되는 줄 아니?”
베이지색 커트 머리.
밤색 눈동자.
담배의 잔향과 소독약 냄새.
제인이 그녀의 모습과 냄새를 천천히 파악할 때였다.
등을 진 채 앉아 있던 루가 커피를 마시며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듯이 말했다.
“세실, 너무 가까이 다가가진 말고.”
세실은 대답 대신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안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시선은 제인에게서 떨어뜨리지 않은 채.
세실이 제인을 진료하며 엉망진창이라고 했던 이유는 체내에 얼기설기 남은 독성의 잔해와 부어오른 어깨, 제 손으로 그은 것으로 보이는 목덜미의 자상 때문만이 아니었다.
본래 정신계 치유 마법사였던 그녀는 봐버린 것이다.
기껏해야 스물에서 스물하나 남짓한 이 어린 여자아이의 내면에 있는 너절하고 황폐한 마음의 문을.
그때 제인이 그녀를 지그시 보며 대답했다.
“이제 안 해요.”
“뭘?”
“당신이 생각하는, 그거.”
잿빛 눈동자를 가만히 보던 세실은 아주 잠깐 헛웃음을 짓다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잘 들어. 난 앞으로 최선을 다해서 네 몸을 낫게 할 거다. 그러니까 나한테서 치료받고 가서 또 몸에 헛짓거리하고 오면…….”
세실의 담배 끝이 짧아져 갔다.
두 사람 사이에 매캐한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대가리 박살 낼 테니까 그렇게 알아.”
제인은 무언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조용히 웃으며 일어나더니 세실이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빼서 가져왔다. 그것을 가로로 쓱 긋자 연기가 피어오르다가 사라졌다.
“이거, 담배가 아니었네?”
제인이 짤막하게 말을 이었다.
“파탐.”
제인은 파탐을 가볍게 흡입하면서 그대로 세실을 지나쳐갔다.
이어서 책상 위의 철제 그릇에 재를 털었다.
파탐은 각성 물질이 다량으로 함유된 식물이었다.
소량만으로도 효과가 컸으나 떫은맛이 강해서 기호에 따라 즐길 수 있는 차가 아닌 약재로 쓰였다.
“신기하네요. 생김새부터 냄새까지 전부 담배인데.”
“어떻게 알았니?”
“연기가 날아가는 순간 찰나의 향이 파탐이라. 그런데 또 잔향은 담배라서 설마 했어요. 재미있는 걸 만들어서 피우시네요.”
팔짱을 낀 세실이 뒤돌아서 그녀와 마주 보았다.
“너 뭘까?”
키득거리던 제인이 책상에 기대어 서서 시선을 아래로 뒀다. 그리고 짧아진 파탐을 한 번 더 느리게 흡입하고 철제 그릇에 짓뭉갰다.
“약속할게요. 제가 대가리 박살 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고개를 든 제인이 아이처럼 웃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자해는 관두기로 약속했거든요.”
세실은 너절한 그녀의 몸 상태와 대비되는 맑은 웃음에 할 말을 잃은 얼굴을 했다.
마침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울렸다.
“인사는 그 정도면 됐으니.”
소파에서 일어난 루가 반쯤 닫혔던 문을 열었다. 이어서 뒤를 돌아보며 제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신사처럼.
“슬슬, 내 단골 식당으로 가지.”
* * *
루는 마력으로 이동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제인의 손을 잡고 성을 나와서 거리를 걸었다. 한 폭의 그림 같던 곳으로 발을 들이자, 거리마다 활력이 가득했다.
축제 준비가 한창인 듯한 거리에는 마법 도시답게 사람들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신기한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음식점 안으로 들어갔다.
점원이 나와서 형식적으로 주문을 받고 그대로 돌아갔다. 단골이라고 하기에는 영 뜨뜻미지근한 반응이었다.
“단골이라며?”
루가 턱을 괴고 미소를 지었다.
“내 나름대로는 단골이지만 저들은 아닐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는 가을 축제 때마다 이곳에 와서 식사했었다고 말했다.
정기적으로 찾는 곳이니 루가 생각하기에는 단골이지만 일 년 단위의 공백에 식당에서는 루를 모르는 게 당연했다.
곧이어 식탁에는 연어구이와 감바스, 아스파라거스 샐러드, 렌즈콩 볶음으로 가득 채워졌다.
제인이 맛있게 먹는 동안 루는 그녀의 몸 상태에 대해 알려주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그녀가 입에 한가득 들어있던 고소한 렌즈콩을 삼키고 물었다.
“그러니까, 마나라는 게 내 몸의 약물 중독을 막고 있었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