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34)화 (34/168)

34.

솔레리안의 목소리로 채워졌던 공간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녀의 보좌관인 헤밀은 머리가 아픈 듯 미간을 문질렀다.

침묵이 길어졌다.

라트올이 얕게 한숨을 쉬었다. 침묵은 설교가 끝났다는 걸 의미했다. 그의 예상대로 솔레리안이 천천히 납품확인서에 인장을 찍어주었다.

“이만 일어날게요.”

인고의 시간 끝에 서류를 받아든 라트올이 휘적휘적 걸어가다가 별안간 몸을 돌렸다.

“녹니스가 영 못마땅하시면, 제 주인님 만나서 얘기해 보실래요?”

“아니요! 절대로!”

솔레리안이 거의 질겁하듯 대답하자 라트올의 눈빛에 일말의 한심함이 스쳐 갔다.

“그럼 다음 납품일에 봬요.”

“…….”

라트올이 나간 후, 솔레리안은 괴로운 표정으로 남겨진 녹니스를 보다가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까마득한 어둠 사이로 빌어먹을 낯짝 하나가 떠올랐다.

루.

내 인생의 파탄자.

내 인생의 재앙.

내 인생의 고리대금업자!

당장이라도 그를 찾아가 멱살을 잡고 죽어라 흔들어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주 먼 옛날, 그에게 빚을 졌던 과거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르젤이 데시안에게 빚을 진다는 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든 갚아야 했다.

그로 인해 르젤들은 데시안에게 빚을 지는 걸 무엇보다 두려워했다.

그것은 언제든지 악에 불복해야 하는 운명을 마주해야 한다는 뜻이자, 타락한 르젤이 될 예정이라는 낙인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여기, 현혹의 데시안에게 빚을 지고 자진해서 연옥에 내려온 르젤인 솔레리안처럼.

옆에 묵묵히 서 있던 보좌관 해밀이 다소 염려스러운 시선으로 솔레리안을 보다가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최대한 피하셔야 합니다. 지금처럼요. 그자가 빚을 갚으라는 명목을 들이민다면 솔레리안 님은 그의 어떤 요구도 거절하실 수 없을 테니까요.”

“알아. 하지만 저건…….”

고개를 든 솔레리안은 한가득 쌓여있는 녹니스를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절망스러운 얼굴을 다시 손바닥에 묻었다.

“솔레리안 님. 차라리 한 번 더 천계를 찾아가 보시는 건 어떨까요.”

천계.

해밀의 제안이 솔레리안의 입속을 텁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루와 대화는커녕 그를 피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솔레리안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로 다음 세기 인간 세상은 지옥이 될 터였다.

“……천계에 전령을 보내.”

얼굴을 든 솔레리안이 불구덩이에라도 들어가는 듯한 낯빛으로 명령했다.

“조만간 찾아가겠다고.”

* * *

제인은 아침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세실에게 들리세요.”

제인을 데리고 드호아망에 가겠다는 루의 말에 프시오가 세실이라는 이름을 거론했다.

루도 세실이 누군지 아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군. 세실은 치유 마법사였지.”

“이쯤이면 마나가 회복되고도 남아야 하는데…….”

프시오는 아무런 근심 없이 계란프라이를 한입에 넣는 제인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제인은 일정량을 기점으로 회복이 멈춰 있어요. 마법진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듯합니다.”

“그래. 이 상태면 내 집에는 백 년이 지나도 못 데려갈 판이니.”

“왜 못 가?”

계란프라이를 삼킨 제인이 가볍게 묻자 루가 그녀의 턱에 묻은 빵부스러기를 떼어주었다.

그리고 산뜻하게 웃었다.

“가자마자 호흡 곤란으로 죽어버릴걸.”

“와.”

제인이 방긋 웃었다.

“웃으면서 말하기엔 처참한 내용으로 들리는데, 이것도 기분 탓일까?”

“맞아, 기분 탓.”

“어디까지가 기분 탓일지 기대가 돼?”

“실망시키지 않도록 유념하지.”

여전히 웃으며 제인은 식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곧장 정색하며 햄이 든 빵을 크게 베어먹었다.

루는 그녀의 태도가 무척 즐겁다는 듯 킬킬거렸다.

둘의 모습을 마주 보고 있던 프시오와 솜브는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식사를 이어갔다.

그렇게 평화로운 아침 식사가 끝난 후.

제인이 외출을 준비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을 때였다.

루가 말끔히 정리된 식탁에 턱을 괸 채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인이 널 좋아하더군.”

“그런가요.”

“덕분에 더 빨리 데려가고 싶어졌어.”

프시오는 쟁반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쟁반에 담겨 있던 찻잔 속이 일렁였다.

“마나를 회복하는 게 우선입니다. 그래야 보호 마법을 걸 수 있으니까요. 당신이 종종 조절하지 못하는 마력은 제인에게 굉장히 위험합니다.”

“알아.”

“지금은 마력이 넘실거리는 당신 집에 데려다 놓기만 해도 호흡 곤란이 아니라 폐가 터져서!”

“그래, 죽으면 안 되지.”

루는 찻잔을 들고 여유로운 자태로 향기를 맡았다. 그러다 일순, 프시오를 보며 눈을 가늘게 휜 채 차를 마셨다.

“재미없잖아?”

프시오는 정말이지 루를 좋아할 수 없었다.

거북했다.

호엘리반의 곁에 있다는 것 외에도 그가 불쾌한 이유는 차고 넘쳤다.

그중에서도 가장 음험하다고 생각되는 건 인간에게 현혹의 힘을 부러 쓰지 않는 것이었다.

왜?

재미없으니까.

시시하니까.

차라리 그 힘을 사용하는 게 순수해 보이겠다고 여길 정도로 그는 가진 힘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이물스럽고도 교묘하게 원하는 방향대로 인간을 움직이기를 좋아했다.

“호엘리반은 당신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나요?”

“어디까지라고 할 것도 없어.”

루는 여전히 무의미하게 창밖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내 이야기가 지루하고 따분한 한 권의 책이라면 호엘리반은 너나 세실이 알고 있는 부분에서 겨우 한 단락 정도 더 알고 있을 뿐이야.”

“제인은요?”

그가 대답 대신 나른하게 웃었다.

문득 바다 한가운데에서 제인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알려주지. 내가 원하는 절망이 무엇인지.

데시안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그러니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인간에게 속삭였던 건 진실이었다.

-사랑.

-…….

-목숨을 바칠 정도로 지독하고 맹목적인 사랑.

겨우 진실 하나.

제인이 알고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이어지는 정적 속에서 프시오는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 쥐었다. 잔 속의 열기가 손바닥으로 퍼져나갔다. 그가 건드린 불쾌한 감정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듯했다.

“당신의 이야기에서 제인은 불행해지나요?”

욕실 안의 물소리가 멈췄다. 이제 곧 제인이 나올 것이다.

“프시오, 인간은 누구나 불행해.”

루는 마시지도 않은 찻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웃었다.

“그러니 행복하고 싶은 거야.”

그가 흘리는 웃음에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불행한 채로 행복이라 부르는 걸 좇고, 찰나와 같이 행복하다고 착각하다가 또다시 불행해지는 게 인간이지. 밤의 조명에 달려드는 나방 떼처럼. 그러니 차라리 지옥으로 떨어지는 게 편할지도 몰라.”

“그럴 수도 있겠군요.”

자리에서 일어난 프시오는 아직도 온기가 남은 루의 찻잔을 치우다가 그와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불행에만 초점을 맞춘, 불행한 인생이라면 말입니다.”

“……프시오.”

프시오는 돌연 가라앉은 루의 부름에 소름이 쫙 끼쳤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 데시안이 존재한다면 부디 내 눈앞에 데려와 주겠어?”

그때 열린 욕실 문틈으로 자욱한 습기와 함께 개운해 보이는 제인이 나왔다.

루는 그녀를 슬쩍 보다가 다시 프시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 행복이라는 게, 나도 무척 궁금하니까.”

* * *

제인은 눈 깜짝할 새 리톨이 있는 드호아망의 마탑에 도착했다. 루가 마력으로 이동의 문을 열어 준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쩐지 서운한 표정이었다.

드호아망.

태어나 처음 와보는 마법 도시를 구경도 못 하고 마탑까지 단숨에 오다니.

창문이라도 열어서 바깥을 구경하고 싶건만, 창에 쳐놓은 검은 암막 커튼이 대리석처럼 단단하게 굳어서 밖을 내다볼 수가 없었다.

기둥마다 자리한 미색의 불빛만이 겨우 어둠을 밝혀내고 있는 대기실은 한 줌의 빛도 용납하지 않았다.

루는 제인의 부루퉁한 표정을 유심히 보다가 이유를 눈치채고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 사이 관리인이 안쪽에서 문을 열어주었다.

“준비되었으니 들어오시면 됩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두 팔을 벌리고도 남을 정도로 큰 책이 벽에 걸려있었다.

리톨이었다.

루는 팔짱을 낀 채 문에 기대어 서서 제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제인이 리톨 앞으로 다가가자 몇 발짝 떨어져 있던 관리인이 안내를 시작했다.

“표지에 손을 얹으세요.”

제인이 안내자의 말을 따르자 책 주변으로 희미한 빛이 번졌다.

곧 사그라지는 듯싶더니 다시 강렬한 빛을 내뿜으며 빠르게 차르륵 펼쳐졌다. 백지였던 여백에 글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신은 치유 마나 소유자입니다.]

프시오와 루의 예상대로였다.

그들의 짐작이 어긋나길 바랐던 제인은 얕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이어서 나타나는 문구에 제인의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당신의 치유 마나 계열은 정신계입니다.]

정신계?

이런저런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음 글자가 나타났다.

[정신계의 경우 산하 능력이 마비와 회복으로 세분화합니다.]

[당신의 산하 능력은…… 마비와 회복 두 가지 능력을 모두 겸비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산하 능력인 마비와 회복의 비율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마비와 회복.

상반된 개념처럼 보이는 두 영역이 종이 한 끗 차이라는 걸 제인이 모를 리 없었다.

식물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독성을 지니고 있다.

다만 약초로 분류될 때는 그 독성이 다른 풀벌레나 동물에겐 맹독으로 작용하지만, 인간에겐 식물이 자라난 시기와 제조 비율에 따라 약효로 나타나는 경우였다.

치유계의 마비와 회복도 그런 맥락일지도.

제인이 빠르게 자신이 가진 마력에 대해 이해하는 사이 리톨에 또렷한 글자가 나타났다.

[당신의 산하 능력 비율은 9할의 마비력과 1할의 회복력으로 확인됩니다.]

[결론적으로 당신의 근간을 이루는 마나는…….]

[정신계 ‘마비’입니다.]

스스스.

마지막 문장을 끝으로 리톨에 나타났던 글자와 빛이 사그라들었다.

“제인, 아주 허기진 상태가 아니라면.”

그때 루가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세실에게 먼저 들리지.”

그의 목소리에서 조급함이 희미하게 묻어났다.

의아함을 느낀 제인이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곧바로 졸음이 몰아쳤다.

그녀의 눈꺼풀이 속절없이 무겁게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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