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33)화 (33/168)

33.

루가 그릇에 가득 담긴 초콜릿을 보며 물었다.

“뭐지?”

“제인이 좋아하는 간식입니다.”

말없이 쟁반을 받은 루는 프시오 뒤에 서 있던 제인을 보다가 고개를 까딱거리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참.”

프시오 역시 그대로 자기 방으로 들어가다가 제인을 돌아보았다.

“당신 어깨 처치는 루가 해줄 겁니다. 자기가 하겠다고 어찌나…….”

말끝을 흐리며 그녀는 질색하는 표정으로 방문을 닫았다.

잠든 솜브의 고롱고롱하는 숨소리만이 울리는 거실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제인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루는 책상에 걸터앉아 쓴 초콜릿을 집어 먹고 있었다.

“늦어.”

“어?”

“나한테 오는 게.”

제인은 머리를 싸맸던 수건을 풀고 머리끝을 톡톡 두드렸다.

샤워하는 내내 몸에서 피 냄새가 계속 나는 기분이었던데다가 한 손으로만 씻으려니 생각보다 더 오래 걸렸다.

제인이 머쓱한 투로 말했다.

“많이 기다렸어?”

“앉아 봐.”

붕대를 쥔 손이 앞의 의자를 가리켰다.

제인이 의자에 앉자 그가 왼쪽 어깨 끝부분을 톡톡 두드렸다. 제인은 눈치껏 단추를 몇 개 풀었다. 팔뚝에 옷이 걸쳐지면서 멍든 어깨가 드러났다.

얕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붕대가 팽팽하게 감기기 시작했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어깨에서부터 목까지 타고 올라왔다. 제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곧이어 마무리되었는지 뒤에서 옷을 올려주는 차가운 손길이 그녀의 피부를 스쳤다.

제인은 풀어놓았던 단추를 아래에서부터 채워나갔다. 그녀가 마지막 하나 남은 단추를 채우려던 순간이었다.

정적을 이어가던 루가 조용히 말했다.

“기다리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아.”

루는 그녀가 앉은 의자를 자신 쪽으로 돌렸다.

마지막 남은 단추를 채워주며 말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만 아니면 돼.”

생각해 보면 둘 사이에서 상대를 부르고 기다렸던 건 항상 루였다.

제인은 루를 먼저 찾은 적이 없었다.

한 번도.

그러니 제인이 자신을 불러주기를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순간, 제인의 입에서 생각이 그대로 튀어나왔다.

“……애정 결핍도 아니고.”

제인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무례하기 짝이 없는, 침묵보다 못한 말이었다. 제인은 허둥거리는 몸짓으로 식어가는 찻잔을 들었다.

그때 루가 장난스레 되물었다.

“너처럼?”

제인은 어째서인지 웃음이 나왔다. 찻잔을 떼어낸 입술에 물기가 어렸다. 잔을 내려놓고 손등으로 물기를 훔쳐내며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나처럼.”

루는 제인의 웃음소리가 좋았다.

웃는 얼굴도.

그녀의 웃음을 가만히 바라보던 루가 하얗고 긴 손을 뻗었다. 이내 아직도 촉촉이 젖어있는 은색 머리카락 끝을 잡고 매만졌다.

고작 머리카락 끝이었다.

그런데도 제인은 모든 신경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멈춘 기분이 들었다.

목이 바짝 탔다.

갑작스러운 목마름에 찻잔을 쥐려던 찰나, 손이 미끄러지면서 바닥에 차를 엎었다. 제인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틀었다.

낮에 보았던 피가 후드득 떨어지는 장면이 눈앞에 그려진 탓이었다.

루는 쏟아진 차를 닦으려던 제인의 손을 잡았다.

떨림이 그대로 전해졌다.

“……제인?”

제인은 조용히 입꼬리를 비틀었다.

죽음이라는 건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마주하면 할수록 고역이었다.

허무한 상실감은 약제사 시절에 차고 넘치도록 보고 느꼈던 감정이었는데도 매번 바닥으로 치닫게 했다.

죽음을 생생하게 목도한 날이면 어김없이 악몽이 그녀를 찾아왔다.

목을 조르고, 숨통을 조였다.

예전의 제인이었다면 낮의 잔상을 잊기 위해서 습관적으로 독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데시안과 약속했다. 더는 자학하지 않기로.

제인이 이를 악물고 습관적인 충동을 억누를 때였다.

루가 물었다.

“안아줄까.”

잿빛 눈동자가 멍하게 깜빡거렸다. 무언가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려던 순간, 루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아니면 만져줄까.”

차가운 입술이 제인의 손가락 끝을 가볍게 문질렀다.

벌어진 입술 틈새에 손가락이 머무르자, 루는 잇자국이 남지 않게끔 간지럽게 깨물며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의 모습을 홀린 것처럼 보던 제인이 황급히 제 손을 빼버렸다.

의자에서 거칠게 일어난 제인이 창문을 활짝 열었다.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귓가에 찬 바람이 훅 끼쳤다.

“넌 도대체가…….”

“어쨌든 위로가 되었나 본데.”

제인은 눈을 가린 채 내가 미쳤지, 하고 중얼거렸다.

어느덧 그녀의 뒤에 선 루가 창문을 닫았다. 더 이상 찬 바람은 들어오지 않았으나 방 안의 온도는 이전보다 내려가 있었다.

그가 그녀의 뒤에서 안아주었다.

이제 그의 몸이 닿기만 해도 긴장이 되었다. 그가 또 어떻게 제멋대로 굴지 몰라 숨죽이고 있을 때였다.

“말해 봐.”

루가 제인의 손을 느슨하게 잡았다.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나만 이러는 거 아니야.”

떨림은 목소리에도 묻어 나왔다.

“사람들은 보통 다 이래. 사람이 죽는 걸 눈앞에서 보면…….”

죽음의 목도가 주는 충격과 감각은 오히려 그 장소에서 완벽하게 동떨어졌을 때 서서히 선연해진다.

“……냄새.”

제인이 돌연 작게 웃으며 웅얼거렸다.

“나한테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제인.”

루가 제인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네 몸에는 숲 냄새가 배어있어.”

“…….”

“난 너의 냄새를 좋아하지.”

달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겨울에 앙상한 나뭇가지를 오래도록 바라보는 것도, 수풀 사이 거미줄에 걸린 나비나 벌레를 한참을 보다가 구해주는 모습도, 나에게로 걸어오는 발걸음 하나까지 모두 좋아하는 것들이지.”

“……너를 즐겁게 하는 내 모습이겠지.”

루는 키득거리며 제인을 안아 들고 침대에 눕혔다.

“긴장 풀도록 해.”

곁에 함께 누운 루가 그녀의 뒷머리를 감싸고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

“네가 원하는 대로 안아줄 테니.”

제인은 기분 좋은 박하 향에 경계심이 풀어졌다. 이윽고 조용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에 서서히 안정감을 느꼈다.

아무리 씻어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던 피 냄새도, 죽어가던 얼굴과 검게 변질하던 상처의 잔상도 이젠 더 이상 제인을 따라다니며 괴롭히지 않았다.

눈이 가물가물하게 감겨 왔다.

“내가 잠들면 가?”

그가 가지 않았으면 했다. 유독 오늘 밤은 눈을 뜨면 혼자일까 싶어서 잠들기가 싫었다.

그가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가지 말라고 해.”

제인은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를 내었다.

“……지 마.”

“제대로.”

“……가지 마.”

눈을 감고 있음에도 그가 얼마나 저를 우스워할지 빤히 보였다. 그러나 예상했던 비소와는 달리 그는 제인의 이마에 다정하게 입을 맞추었다.

“잘했어.”

제인은 데시안에게 완전히 홀린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제멋대로 저를 홀린 데시안의 행태에 거북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거북하기는커녕 가슴 한구석이 간지러웠다.

루가 물었다.

“내일 같이 드호아망에 갈까.”

“그건 프시오랑 같…….”

“나랑 가.”

“까탈스러운 고객이 있…….”

“리톨을 보고 나면 식사를 하러 가지.”

”…….”

이미 둘은 몸이 빈틈없이 맞닿아 있었다.

그럼에도 루는 손바닥에 힘을 주고 한 번 더 제인을 끌어안았다. 마치 품 안으로 삼켜내려는 듯한 몸짓이었다.

“숨 막혀…….”

루는 아주 조금 틈을 내주었다.

정말 아주 조금.

그래도 이전보다는 확실히 편해져서 제인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네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지만 나름대로 단골 식당이 있어. 오늘 입었던 옷이 엉망이니 옷도 몇 벌 사러 가는 게 좋겠군.”

“프시오가 사다 준 것도 있어. 이 옷도 프시…….”

“사러 가는 게 좋겠군.”

제인이 가물거리는 눈을 들고 루를 보았다.

“……뭐지?”

“뭐가.”

“아까부터 다정하게 무시당하는 기분인데.”

루는 그녀의 이마에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기분 탓이야.”

제인은 졸음이 쏟아졌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잠들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깨어 있으면 했다.

그때 루가 제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 곁에 있을게. 그러니 편히 자.”

* * *

라트올은 살이 쪽쪽 빠지는 기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납품하러 온 그에게 연옥의 담당관 솔레리안이 녹니스의 문제점에 대해서 앵무새처럼 말했다.

“연옥은 죽은 인간의 영들을 깨끗이 정화해서 천계로 올려보내는 곳이지, 지옥에 떨어뜨릴 영들을 골라내는 곳이 아닙니다.”

네. 그랬었죠.

“그런데 녹니스는 천계로 갈 수 있는 영들까지 모조리 지옥에 빠트리고 있습니다.”

네. 그렇겠죠.

제 주인님이 그러려고 만든 거니까요.

“그렇게 되면 백 년, 이백 년 후에 데시안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될 거고, 인간 세상은 끔찍한 죄악으로 물들어서…….”

지옥과 다름없어질 겁니다.

“지옥과 다름없어질 겁니다.”

라트올은 이제 속으로 솔레리안의 다음 말까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따라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한두 해도 아니고 올해로 정확히 십 년째 듣는 설교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솔레리안의 지루한 설교가 이어졌다.

“알고 계시겠지만 녹니스는…….”

녹니스란 죽은 인간의 영을 현혹하여 지옥에 빠트리는 약이었다.

그리고 그 약을 만든 이가 루였다.

현혹의 힘을 가진 루는 역대 마왕들의 사랑을 독차지할 만큼 강했으나, 그보다 더 유명한 건 그의 나태하고 태만한 성정이었다.

항간에는 게을러 빠진 루가 인간을 매번 타락시키는 게 번거롭고 귀찮아서 녹니스를 만들었다는 소문이 정설처럼 떠돌아다녔다.

하지만 진실은 오직 루와 라트올만이 알고 있었다.

라트올이 퀭해진 눈 밑을 손바닥으로 누르고 있을 때였다.

솔레리안이 물었다.

“듣고 있습니까.”

“안타깝게도요. 저한테 귀라는 게 붙어있는 바람에.”

“……다들 귀만 붙어있군요.”

그녀가 시선을 아래로 기울였다.

그러자 허리까지 오는 구불구불한 황금색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스르륵 흘러내렸다.

“당신도, 연옥도, 천계까지 전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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