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제인이 어색하게 웃었다.
밀리타 못지않게 피투성이인 자신의 몰골을 봐버렸기에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꼴은 지옥에서 온 주례사 같지만, 언약식은 아름답게 잘 끝내고 왔어요.”
“아름답게……?”
프시오가 바사삭 사라질 것 같이 묻자 거울을 재차 보던 제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꼴이 된 건 로안나와 엔니오가 신혼여행을 떠난 후에 마주친…….”
그녀는 굳이 복잡한 앙디스인의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적당한 단어를 찾아냈다.
“불량배!”
“…….”
제인은 아차 싶었다.
둘러댈 게 생각나서 너무 기쁘게 말했나?
곧바로 표정을 갈무리했다.
“불량배들 때문이에요. 다행히 지나가던 행인이 저를 구해줬고요.”
사실 행인이라기보다는 악당에 더 가까웠지만.
“언약식은 무사히 마쳤어요. 끝나고 로안나 씨와 엔니오 씨가 손잡고 나가는 것까지 보고 왔어요.”
프시오는 그녀의 뒤집어쓴 듯한 핏자국, 그리고 루가 젖혔던 옷 틈으로 드러난 어깨의 푸른 멍까지 아무 말없이 보기만 했다.
제인이 다소 억울한 듯 재차 말했다.
“정말이에요.”
그때 프시오가 제인에게 키를 낮춰보라는 듯이 손짓했다.
제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무릎을 살짝 낮추자 가볍게 안아주었다.
“다행입니다.”
작은 아이의 몸을 한 어른이, 어른 몸을 한 어린아이 같은 제인을 보듬어 주었다.
“그들도, 당신도 무사해서요. 어깨는 루 말대로 타박상이 있는 듯하니 씻고 나오는 대로 처치를 하는 게 좋겠습니다.”
다정하고 따뜻한 그녀의 마음이 몸을 무르게 한다.
긴장이 풀어지고 안심하게 된다.
온기가 무엇인지 알아간다.
제인이 오른쪽 팔을 들어서 그녀를 안으려던 찰나, 뒤에 선 루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아무나.”
“……?”
“아무나 안으려 하는군. 아무에게나 안기고.”
“정말이지, 넌.”
제인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심심할 틈이 없겠어. 나한테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한둘이 아니라 가지가지라서.”
“제 눈에도 그렇게 보입니다.”
프시오가 포옹을 풀며 맞장구쳤다.
“가지가지 하는군요.”
* * *
욕조 안의 비누 거품이 가득 흘러넘치면서 습기가 안개처럼 차올랐다. 그 안에서 제인은 한 손으로 사방으로 물을 튀기며 얼굴에 끼얹었다.
“이제는 현실을 말해 줄 때가 된 것 같아.”
이어서 제 머리를 감겨주는 루를 향해 말했다.
“난 개가 아니야.”
“응.”
“혼자 씻을 수 있어.”
“응.”
“내 말 듣고 있어?”
“아니.”
제인은 이를 꽉 물고 웃었다.
“와. 안 듣고 있구나! 이것 참 흥미진진한데? 성질도 돋고.”
“성질까지 부린다면 네 말대로 심심할 틈이 없겠어.”
“재미있지?”
“꽤.”
제인은 퐁실퐁실한 거품 사이로 주먹을 쥐고 팡 소리 나게 내리쳤다.
다시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어디까지 씻길 참이야? 턱 밑으로는 내 손으로 씻고 싶거든? 안 그러면 민망해서 죽어버릴지도 몰라.”
제인이 도리질하며 재차 말했다.
“아니, 죽어.”
그녀는 그 끝에 따라오는 욕을 애써 삼켜냈다. 자기를 진짜 개로 보고 있는 이 빌어먹을 데시안을 건드려서 생각처럼 되었던 일이 있었던가.
그때 루가 말했다.
“내가 묻는 데 대답하는 거 봐서, 내킬 때까지.”
내킬 때까지.
제인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머리를 감겨주는 루를 보며 헤실헤실 웃었다.
“궁금한 게 뭘까? 얼른 물어봐 주지 않을래? 네 질문에 아주 성실해지고 싶어졌거든.”
금방이라도 질문을 쏟아 내리라는 예상과 달리 루는 아무 말이 없었다.
젖힌 그녀의 이마에 따뜻한 물을 살살 부어낼 뿐이었다. 거품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는 그녀의 눈과 귀에 들어가지 않게끔 조심하면서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다.
거품이 말끔히 사라진 후에는 젖은 머리를 양손으로 잡고 물기를 짜냈다. 그 바람에 그녀의 왼쪽 어깨의 멍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제야 루가 입술을 떼었다.
“피를 뒤집어쓰고 어깨를 다치는 동안 어째서 한 번도 나를 찾지 않았지?”
제인은 루가 던진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루가 말을 덧붙였다.
“데시안과 계약한 인간은 언제든 그 데시안을 부를 수 있어.”
“……그런 말, 한 적 없잖아.”
“했으면.”
루가 뒤에서 제인의 어깨에 팔을 포개며 끌어안았다.
“했으면 과연 네가 날 찾았을까.”
제인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자욱한 습기 때문인지 숨 쉬는 게 답답했다.
“날 부르는 방법은 간단해. 나를 떠올리면 돼. 간절하게.”
루가 제인을 조금 더 끌어안으며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네가 위험할 때 나를 부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제인의 가슴께가 느릿하게 부풀어 올랐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긴 한숨을 내뱉어도 가슴 한구석은 여전히 답답하기만 했다.
“내가 널 찾지 않았던 건…….”
그녀가 뒤를 돌았다.
푸른 눈동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담아내었다.
“관성이야.”
제인에게는 위험한 순간을 직면했을 때 누구에게나 해일처럼 닥치는 본능적인 의존성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악몽이 시작되었던 어느 절벽에서 모조리 잃어버렸기에.
“그런데 내게 새로운 관성이 생겼어.”
제인이 이내 욕조에 잠겨 있던 젖은 두 손을 들어서 그의 얼굴을 감쌌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 맺혀있던 물방울이 차가운 루의 살결 위에서 빠르게 온기를 잃어갔다.
“하늘은 자주 봐.”
왜일까.
하늘을 자주 본다는 그 말에 루의 가슴이 울렁거렸다.
조금도 특별한 말이 아닌데.
“그리고 석양을 좋아하게 됐어.”
또 한 번 가슴이 요동쳤다.
이상했다.
그녀가 내뱉은 말이 뭐라고 이토록 가슴이 뛴다는 말인가.
“특히 사막에서는 눈으로 담을 수 있는 세상의 모든 색상이 끝도 없이 덧칠되거든. ”
그가 저도 모르게 제인에게 손을 뻗었다.
“나는 그때마다 너를 떠올려.”
천천히.
느릿하게 제인에게 닿기 직전.
“루, 네가 원하는 간절한 부름이 아니더라도 나는 그렇게 널 생각하고 있어.”
제인이 먼저 그의 손을 잡았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을까? 만약 마음에 들었다면.”
그리고 방긋거렸다.
잡고 있던 손을 내려놓고 욕실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욕실에서 당장 나가.”
* * *
홀로 평온하게 샤워를 마친 제인이 젖은 머리에 대충 수건을 두르고 나왔다.
부엌에서 쓴 초콜릿을 그릇에 담는 그녀에게 프시오가 물었다.
“정말 그거면 됩니까?”
“네.”
프시오가 늦은 저녁 식사를 챙겨주려 했으나 제인은 완강히 사양했다.
앙디스인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했기에 입맛이 없었다. 초콜릿 몇 개면 충분했다.
프시오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뭐가요?”
프시오는 작은 발판을 밟고 찬장에서 찻잎이 들어있는 유리병을 꺼내어 뚜껑을 열었다. 부엌 벽에 걸려있던 차망을 내려놓고 안에 찻잎을 담았다.
“엔니오 씨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조각가이자 예술가입니다. 그래서 두 분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찻잎의 향이 은은하게 퍼져갔다.
조각가였구나.
문득, 스치듯 보았던 그의 거친 손이 기억났다.
“당신 덕분에 주례사로 마음을 전할 수 있었어요. 한편으로는 당신이 저 때문에 다친 것 같아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제인은 남은 초콜릿이 든 빳빳한 종이봉투 끝을 말아서 찬장에 넣었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이어지는 제인의 말에 뚜껑을 닫고 있던 프시오의 손동작이 우뚝 멈췄다.
“덕분에 사랑이 무엇인지 봤어요.”
“……어떤 의미죠?”
제인은 초콜릿 한 알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단단하기만 하던 것이 어금니 사이에서 툭툭 쪼개어지다가 진득하니 녹아서 사라졌다.
“사람이 사람을 보는데 눈동자가 꼭 별처럼…… 반짝반짝 빛났어요. 그런 게 사랑이라는 걸 두 사람을 보고 알았어요.”
일찌감치 궁정에서 자란 제인은 정말로 그렇게 웃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랬군요.”
“로안나 씨가 말했어요.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을 모두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요. 살아가면서 배워가는 거래요. 하나씩, 천천히.”
물이 끓었다.
프시오는 주전자에 찻잎이 든 망을 넣고 끓는 물을 부었다. 주변의 습도와 온도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로안나 씨는 사랑스러운 사람이죠.”
“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말을 믿고 싶었어요. 살다 보면, 살아가다 보면, 어쩌면 나도…….”
제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꼭 헛된 꿈을 횡설수설하는 얼뜨기가 된 기분이었다.
얼마간의 정적 끝에 프시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안나 씨의 말이 맞습니다. 이 세상에 사랑이 가지는 또 다른 이름은 무수히 많으니까요.”
그녀는 나무로 만든 쟁반을 꺼내어 주전자와 찻잔을 올렸다. 이어서 제인이 쓴 초콜릿을 담아 두었던 그릇까지 옮겨 담았다.
“그중 하나가 이 초콜릿입니다.”
제인은 말없이 프시오를 응시했다.
“당신을 생각하면서 골랐고, 맛있게 먹어줬을 때 기뻤기 때문이죠. 더 맛있게 먹으라고 이렇게 차까지 끓여서 우려내 줄 만큼.”
이어서 깨닫고 말았다.
“저는 그걸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무표정한 어린아이의 얼굴에 깃든 진심 어린 따뜻함을.
“애정이라고도 하고, 혹은 관심이라고도 하죠.”
제인은 진정으로 프시오가 돈만 밝히는 사람이길 바랐다.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 이상 더 좋은 사람이길 원치 않았다.
적어도 제인에게 소중한 사람이 생긴다는 건 소중한 사람을 잃을 고통까지도 함께 가진다는 뜻이었기에.
제인은 나무 쟁반을 들고 돌아서는 프시오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이내 열린 문 사이로 루가 낯짝 두껍게 말했다.
“내가 원했던 그림이 아닌데.”
“다행이군요. 피차 원하는 그림이 아니니 이걸 받으시던가, 비키시던가 둘 중 하나는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