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바야흐로 페브리아의 시대였다.
교황 마드리안의 지휘 아래 시작된 종교 전쟁은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었으나 그 길이 언제나 핏빛은 아니었다.
페브리아의 군부대가 땅을 밟는 순간 환영하듯이 꽃을 던지며 투항하는 나라가 적지 않았으므로.
교황 마드리안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풍요가 자리했기에 페브리아의 침략은 가난과 불평등으로부터의 해방을 알리는 환희의 신호탄이 되기도 했다.
환영받는 침략이라니.
이전까지의 강대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강대국들은 하나같이 강경책으로 패전국을 억압했다.
정복한 나라의 기득권자들은 모조리 참수했고, 힘없는 시민들의 신분은 노예로 강등시켜서 종처럼 부리거나 무역선에 태워 팔아버리곤 했다.
관행이었다.
그토록 당연한 관행을 따르지 않은 나라가 페브리아였다.
마드리안은 정복한 나라마다 경제 상황을 가장 먼저 파악하고 실정에 맞게 세금을 조율했다.
피정복민들에게 페브리아의 조세정책은 혁명과도 같았다. 국력을 떠나서 어느 국가든 시민들의 피고름을 짜내기 바빴으므로.
합리적인 세율이 익숙하지 않은 피정복민들은 얼떨떨하기만 했다.
하지만 더 획기적인 정책은 따로 있었다.
피정복민들의 언어는 물론, 모든 문화를 수용하고 보존했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더 발전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었다.
특히 각 나라의 고유한 예술품은 해상 무역의 중심인 셀로느를 거점으로 머나먼 타국까지 수출하면서 피정복민들의 문화는 그야말로 꽃을 피웠다.
대제국 페브리아가 전에 없던 관용 정책으로 새로운 예술 시대의 장막을 연 것이었다.
그렇게 혁명과 다름없는 조세정책부터 토착민들의 문화와 예술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관용 정책을 펼치는 조건은 오로지 하나였다.
샤의 개종.
패전 이후, 전례 없던 풍족과 안락을 누리게 된 피정복민들은 기쁘게 외쳤다.
아낙시오니아의 은총을!
페브리아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자 급기야는 척박한 땅을 가지거나 유약한 소국들이 줄지어 투항해 오기도 했다.
페브리아는 그토록 찬란한 나라였다.
그리고 그런 페브리아를 만든 게 교황 마드리안이었다.
하지만 빛이 있는 자리에는 그늘이 있는 법.
페브리아와 마드리안을 재앙에 가깝게 증오하는 이들이 있었다.
앙디스인.
마드리안이 앙디스의 언어와 풍습, 문화, 예술을 존중하고 적국과 해적으로부터 보호하며 풍요로운 삶을 약속해주겠노라 해도 앙디스인들은 격렬하게 거부했다.
페브리아의 신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맹렬히 외쳤다.
우리의 땅을, 신념을, 정체성을 빼앗지 말라!
이미 속국이 되었음에도 마치 해적의 침입에 맞서 싸우는 듯이 목숨 걸고 끈질기게 대항했다.
페브리아인들은 앙디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의 눈에 앙디스인들은 교황님의 사려 깊은 아량과 자비를 무시하고 페브리아에 융화되지 못하는 미개한 종족이었다.
앙디스는 계속해서 대항했다.
그러나 끝내 자유롭게 날아오르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옴푸푸스 풍토병이 발병하면서 나라가 혼비백산이 된 탓이었다.
바로 그때, 앙디스의 참혹함을 밑바닥까지 본 사람이 제인이었다. 페브리아인인 제인은 앙디스인들의 증오심에 동의하는 편이었다.
원치도 않는 보호를 명목으로 땅을 빼앗고, 생소한 종교로 그들의 세상에 없던 신에게 복종을 강요하며, 앙디스의 이름을 부정하게 만든 날강도가 무슨 자비와 아량을 가진단 말인가.
페브리아인이냐고 물었던 앙디스 소년에게 그럴 걸, 이라고 대답했던 건 그들을 적대적으로 여기지 않았던 탓이었다.
사실 조금 귀찮기도 했고.
페브리아인이 아니라고 하면 이 원단을 어디서 어떻게 샀냐고 추궁할 것 같은 얼굴이었으니.
“어째서 내게 앙디스인들을 붙였는지는 따져 묻지 않을게.”
“…….”
제인은 굳어있는 밀리타에게 물었다.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봐. 노예로 교환한다는 건 무슨 뜻이야? 난 네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밀리타는 진심으로 어안이 벙벙했다.
제인은 자신이 그녀를 속였다는 걸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자칫하면 노예가 될 뻔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상대를 질책하고 원망하지 않나?
그때, 제인이 채근하듯 그녀를 불렀다.
“밀리타.”
“……당신이라면, 이미 짐작하고 있지 않나요?”
“근거가 없잖아. 페브리아에는 노예 제도가 없으니까. 그런데 대체 앙디스인들이 언제부터 노예로 전락했던 거지?”
근거.
제인은 자신의 짐작에 타당한 근거를 원하고 있었다.
밀리타는 이제 말을 돌리거나 숨겨야 할 의미가 없었다. 그녀는 낮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교황님께서 몇 해 전부터 암암리에 앙디스인들을 주변 연맹국에 파견을 보내고 계셨어요. 말이 좋아 파견이지, 사실상 노예였어요.”
제인은 그제야 앞뒤가 맞아떨어진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서 앙디스인들이 페브리아인들을 찾아서 노예가 된 자국민들과 교환하고 있던 거구나.”
“네.”
의구심을 푼 듯, 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저녁이 내려앉은 주변은 골목길 바깥에 자리한 불빛들로 겨우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가야겠어. 여기 너무 오래 있었어.”
몸을 일으킨 제인이 오른쪽 골목길로 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제인의 옷이 당겨졌다.
밀리타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눈꺼풀을 내린 채 말했다.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접근했던 건 아니에요.”
“…….”
“목적지로 가는 길에 우연히 근처를 배회하는 당신을 보게 됐어요. 저는 당신이 더는 납치도, 위협도 받지 않길 바랐어요. 그러려면…….”
“알고 있어.”
밀리타의 말을 잘라낸 제인이 이어서 말했다.
“내가 얼마나 약해 빠졌는지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이렇게 개 같은 방법으로 알려주지 않아도 말이야.”
제인이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약속했잖아.”
“…….”
“아무튼 이만 갈게. 망보는 네 친구한테 여기 정리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제인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밀리타가 전해주기도 전에 이미 듣고 있을 터였다.
보란 듯이 말을 이었다.
“시간 되고 체력 되면 무덤도 만들어주고. 딱히 기대는 하지 않지만, 마음도 쓸 수 있다면 묵념까지도.”
땅거미에 붙어있던 밀리타의 시선이 서서히 위로 향했다.
제인의 얼굴에는 마땅히 경멸스러움이 있어야 했다.
지금까지 그녀를 납치하고, 속이고, 위협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일을 겪지 않길 바라는 모순적인 인간에 대한 일말의 경멸이.
“밀리타, 넌 그 옆에서…….”
제인이 밀리타에게만 들리도록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인간이 죽으면 살아있는 자가 해야 할 최소한의 것들이 무엇인지 봐.”
“…….”
“넌 그럴 필요가 있어.”
그러나 그녀는 밀리타를 경멸하는 대신, 죽은 자들에 대한 예를 갖추길 바랐다.
* * *
제인은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무엇이 그녀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의자 뒤에 숨어 있던 솜브가 바들바들 떠는 와중에도 용기를 내어 소리쳤다.
“루 님! 그러다 제인 죽겠어요!”
“내가 뭘 했다고.”
“마, 마, 마력요! 마력을 낮추세요!”
보다 못한 프시오가 다가와서 손으로 제인의 코와 입을 막아 주었다. 그러자 산뜻한 산소가 공급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
제인은 그제야 숨을 쉴 수가 있었다.
프시오의 손바닥 안에서 숨을 토해내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마나에 대한 걸 못 물어봤네.
제인이 밀리타에게 미처 묻지 못한 걸 생각하며 아쉬워하는 사이 프시오가 루에게 타박하듯 말했다.
“제인은 아직 당신의 살기 어린 마력에는 버티지 못합니다. 그래서 당신 집이 아니라 여기서 지내도록 두신 거잖습니까.”
프시오의 상태는 많이 호전되어 보였다.
다행히도 평소와 다름없어 보일 정도였다.
“그랬지. 여기 뒀는데, 없었지.”
제인이 오른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가 이어서 땅바닥을 가리켰다.
여기 왔잖아.
그 의미를 알아들은 루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녀를 보았다.
“……그래. 왔지. 피범벅이 된 꼴로. 왼쪽 어깨도 다친 것 같은데 누구 짓이지?”
제인은 답답했다. 프시오의 손을 풀자니 숨을 쉬기가 어려웠고 손안에서 웅얼거리자니 대화하기가 어려웠다. 눈을 도로록 굴리다가 공기를 최대한 많이 들이마셨다.
그녀는 곧장 루에게 망설임 없이 바짝 다가갔다.
고개를 들고 그와 눈을 맞추었다.
“숨 좀 쉬자, 응?”
그의 푸른 동공 속에 제인이 풍덩 들어왔다.
그것은 청명한 하늘 같기도 했고, 푸른 호수 같기도 했다.
아름다운 눈동자 속에 유일하게 담긴 자신을 보던 제인은 어느새 숨을 쉬기가 편안해진 것을 느꼈다.
“안녕, 루.”
커다랗고 차가운 손이 제인의 머리를 쓸어내리면서도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제인을 보았다.
“안녕이라는 말이 잘도…….”
“반가워하라며. 하지 마? 어쩌라는 거야?”
그녀의 불퉁한 물음에 루는 말문이 막혔다.
온 얼굴과 옷에 피를 뒤집어쓰고서는 반가워하지 말까? 라니.
낱개로 풀어낼 수 없는 감정들이 한꺼번에 물밀듯 밀려들어 왔다.
“기다려.”
루가 욕실로 들어갔다.
문을 열어두었는지 욕조 안에 물이 차오르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제인은 그대로 돌아서 프시오와 솜브를 향해 방긋 웃었다.
“주례는 잘 보고 왔어요.”
“주례를…… 그러니까, 언약식을…… 전쟁같이 했나 봅니다. 그분들, 살아 계시긴 합니까……?”
“그럼요. 신혼여행 갔어요.”
프시오가 아찔하다는 듯이 말했다.
“……부디 그곳이 천국은 아니길 바랍니다.”
“아니에요.”
“그렇다면 지옥……?”
“아니라고요. 내 꼴이 어떻길래 다들 이러는 거야?”
제인은 혼란스러운 시선들을 가로질러서 전신 거울 앞에 섰다.
“아…….”
여러모로 많은 의미가 담긴 탄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