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30)화 (30/168)

30.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던 그녀는 제인을 유심히 보다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인. 당신은 저에게 너무나 많은 숙제였어요. 그중 리졸브는 가히 최악이었죠. 저는 그토록 어렵게 풀었는데, 당신은 쉽게 알려고 하면 안 되는 거죠.”

“말해. 나한테 원하는 게 있으면.”

밀리타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들어 줄 수는 있나요? 방금 노예로 팔려 갈 뻔했던 당신이 대체 무엇을, 어떻게요.”

제인이 말갛게 웃어 보였다.

“뭐든.”

“…….”

밀리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에 한해서는 뭐든 들어줄게. 보고 여부만 말해. 그 정신 나간 교황이 리졸브에 대해 안다면 어떻게 써먹을지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니까.”

둘 사이에 얼마간 침묵이 유지되었다.

밀리타는 제인 쪽으로 약간 더 상체를 낮추고는 그녀의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끔찍하지 않아요?”

제인이 되묻기도 전에 상냥한 목소리가 곧바로 따라왔다.

“전 당신처럼 나약한 인간으로 사는 거, 끔찍하던데.”

제인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사이 밀리타가 귓가에서 천천히 멀어졌다.

“말했죠. 당신은 제게 아주 많은 숙제였다고. 원하는 걸 물으시니 이번에는 제가 숙제를 내드릴게요. 마나든 무력이든 뭐든 좋으니까…….”

밀리타의 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의문투성이였다.

숙제라니.

내게 마나가 있다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있지?

의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밀리타가 말했다.

“제인. 힘을 갈고 닦으세요. 강해지세요. 그게 제 숙제예요.”

“…….”

“제가 당신을 계속 존경할 수 있도록.”

평생을 나약하게 살아온 제인이었다.

그녀 혼자서는 걸어 나올 수 없었던 진흙 같은 밤에서 그만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죽음의 안식을 줄 수도 없었다.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이제는 악몽을 꾸지 않는 밤을 보내고 싶었다.

데시안의 품에 들어가서라도. 하지만 그 역시도 도망이었다.

그렇게 늘 도망치고 있던 거였다.

그런 내가, 강해질 수 있나?

제인은 곧 지금껏 가져본 적 없는 생경한 물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해 볼 틈이 없었다.

밤마다 목을 조여오는 죄책감이 속삭였다.

행복해서도, 즐겁게 웃어서도 안 된다고, 함부로 죽지 말고 고통스럽게 살라고.

제인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입가에 조소를 띤 채.

“……강해질 수는 있고?”

밀리타는 제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당신의 기밀 연구서를 처음 봤을 때 말이죠.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싶었어요. 죽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처럼 보였었거든요. 그런데…….”

밀리타는 제인의 뺨에 튄 피가 굳어서 붙어있는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떼주었다.

“계속 보다 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이 사람은 자신에게 벌을 주기 위해서 사는구나. 지독한 의지가 이 사람을 죽지도 못하게 만드는구나.”

“…….”

“당신을 죽지도 못하게 하는 그 의지.”

“…….”

“강해지는 데 쓰세요.”

밀리타는 기어코 제인이 바라는 대답을 해주었다.

“그러면, 강해질 수 있어요.”

제인이 말없이 밀리타와 눈을 맞추었다.

강해진다면.

혹시라도 강해질 수 있다면 언젠가 페브리아로 돌아갔을 때 내 한 몸, 나아가서 하임까지 지켜줄 수 있지 않을까.

도망치지 않고.

그런 꿈같은 세상이 존재할까? 정말로?

그때 밀리타가 덧붙여 물었다.

“당신처럼 나약하고 타인에게 불친절한 인간이 무언갈 지켜야 할 때 어떤 모습을 하는지 알고 있나요?”

제인은 얼굴을 찡그렸다.

“알고 싶지 않아도 될까.”

“객기요.”

밀리타가 반복해서 말했다.

“객기란 말이죠, 객기.”

“알아들은 거 알면서 두 번 세 번 말하지 마.”

퉁명스러운 제인의 말에 밀리타가 소리 없이 웃었다.

제인의 몸통을 진동하던 떨림이 좀 전보다 잦아들었다. 그녀는 조금이나마 긴장이 풀린 얼굴로 벽에 등을 기대었다.

그녀와 마주 보고 있던 밀리타도 나란히 벽에 기대어 앉았다.

“나를 마드리안 교황에게 데려가기 위해 구해주었다고 생각했어.”

“그게 정석이죠.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을 데려가면 더 높은 지위와 많은 보상이 보장될 테니까요.”

“그런데?”

“정석대로 살아온 건 아니라서요.”

제인은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앞으로 둬봤자 눈에 들어오는 건 리졸브에 문드러져 가는 시체 세 구가 전부였다.

“노력해 볼게.”

제인이 잠시 나직하게 말을 덧대었다.

“적어도 객기는 되지 않도록.”

순간적으로 밀리타의 눈이 커졌다가 가늘게 휘어졌다. 더 아니꼬운 말을 하리라 생각했었기에 제인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그것도 마음에 드는 쪽으로.

“잊지 마세요. 안락하게 강해지는 법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래.”

밀리타는 기분 좋은 듯이 대화를 이어갔다.

“암호화된 것들은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어요.”

“정말?”

“네. 리졸브에 대해 아는 사람도 저 하나뿐이에요.”

제인의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계속되자 밀리타가 어깨를 으쓱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의 그 끔찍한 연구서는 건드리는 순간 자살 행위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아서 저 말고는 건드린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자살 행위라고 소문난걸…….”

제인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입가에 묘한 미소를 달고서.

“넌 왜 건드렸는데.”

밀리타가 멈칫거렸다.

잠깐의 침묵에 제인이 조그맣게 웃었다.

“번지수가 틀려도 한참 틀렸어. 거기엔 편안하게 죽는 방법 따윈 없거든.”

“…….”

“그런데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읽어 봤다가 ‘이렇게 너절하게 자학하며 인간도 사는데 나도 한번 살아보자.’ 하는 희망을 얻었다면 다행이고.”

“…….”

“존경은 계속해도 좋아. 약학으로는 꽤 알아주니까.”

밀리타의 입가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제인이 물었다.

“그래서, 내 연구서는 어디 있는데?”

“아마 창고에서 먼지만 쌓여가고 있을 거예요. 암호화된 것들만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보고를 마친 서류라 손댈 게 남아 있지도 않고요.”

“그런데 어째서 보고하지 않았어? 너에게 득 될 게 없잖아.”

“아니꼽잖아요.”

밀리타가 제인의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어렵게 얻은 결과물을 다른 이들이 쉽게 알아버리는 거 싫어요, 전.”

“와…….”

그녀의 말에 제인은 손뼉을 쳤다.

“마음에 쏙 드는 심보야! 그 못된 심보, 아주 응원해. 앞으로도 그렇게 너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으로 살아.”

밀리타가 고개를 숙이고 키득거릴 때였다.

“다행이네.”

제인의 목소리가 한층 또렷해졌다.

“지금까지 네 이야기를 종합해 봤을 때, 당장 교황청에서 너만큼 약학에 뛰어난 암살자는 없는 모양이니까.”

웃음소리가 탁 끊겼다.

암살자.

밀리타는 이날 이때껏 자신의 진짜 신분을 들킨 적이 없었다. 그녀는 흰자위가 넓게 드러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창백한 얼굴이었다.

제인은 짓궂은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그녀와 눈을 맞췄다. 이윽고 그녀의 손이 밀리타의 턱을 살짝 쥐었다.

“당혹감을 느낄 때 이런 얼굴을 하는구나, 넌?”

어느새 무력하게 떨었던 여자는 사라지고 능청스러운 표정의 제인이 그 자리에 있었다.

밀리타가 중얼거렸다.

“그걸 어떻게……. 아니, 언제부터…….”

“언제였을 것 같아?”

제인은 연구원 직위를 달기 이전에는 명색이 유능한 약제사였다.

시동 때부터 암살자들의 훈련까지 쫓아다니면서 악착같이 일을 배웠던 터라 그들의 몸짓이나 기운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니 밀리타의 단검에 기척이나 살기 하나 띠고 있지 않은 것을 본 순간 바로 알아챘다.

암살자의 검기임을.

“내가 멍청했어.”

제인이 제 이마를 치며 답답해했다.

“암살자들은 납치든 살인이든 자신이 직접 제조한 독약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게 일반적인데, 네 겉모습만 보고 생각도 못 했거든. 날 납치했던 것도 너였지?”

밀리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걸로 이미 충분한 대답이 되었기에 제인은 시체를 가리키며 말을 돌렸다.

“저 시체들은 어쩔 셈이야.”

“신경 쓰지 말아요.”

“바깥에 망보는 친구가 치워 줄 건가 보네.”

밀리타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제인이 이어서 말했다.

“시체가 리졸브로 문드러지는 동안 개미 새끼 하나 지나가지 않는 게 더 이상하잖아? 너 같은 고급 인력이 페브리아 밖으로 나가는데 교황이 혈혈단신으로 보낼 리도 없고.”

밀리타는 이제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 여자가 단순한 건지 치밀한 건지, 아니면 둘 다 맞는 건지, 혹은 둘 다 아닌 건지 좀처럼 명확하게 가려내기가 힘들었다.

밀리타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눈을 굴릴 때였다.

“그런데 말이야.”

제인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물었다.

“앙디스인들이 말한 노예는 무슨 얘기야?”

밀리타가 잠시 숨을 멈췄다.

그들은 제인에게 앙디스인이라고 밝히기도 전에 죽었다.

언제 눈치챘지?

“당신…… 아무것도 못 하고 벌벌 떨고만 있는 줄 알았는데 말이죠.”

“응. 그랬는데.”

제인이 덤덤하게 말했다.

“앙디스로 출장을 간 적이 있어서 억양 정도는 알아.”

밀리타는 더욱 기가 막혔다.

제인을 붙잡았던 소년이 처음부터 앙디스인이란 걸 알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밀리타의 목소리가 저절로 높아졌다.

“말도 안 돼요! 처음부터 저들이 앙디스인이란 걸 알았으면서도 페브리아인이라고 순순히 대답했다는 건가요?”

제인은 밀리타를 조용히 보았다.

묘한 침묵 속에서 밀리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그제야 깨닫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지. 너는 처음부터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

“…….”

“과연 지켜보기만 했을까.”

잿빛 눈동자가 완만하게 접혔다.

그녀가 속삭이듯 물었다.

“나에게 앙디스인들을 붙인 게, 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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