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29)화 (29/168)

29.

몹시도 아름다운 남자였다.

루가 어둠 속에서 사람을 홀려버리는 황홀한 아름다움을 가졌다면, 눈앞의 남자는 밝디밝은 곳에서 더 찬란하게 빛나는 숭고한 아름다움을 가진 존재 같았다.

특히 백금빛 눈동자는 세상의 햇살을 모두 머금은 듯했고 어깨 부근까지 부드럽게 떨어지는 연보라색 머리카락은 더없이 신비로웠다.

얼핏 보면 청년으로 가늠되는 외모였으나 한 편으로는 소년의 분위기도 묻어나왔다.

남자가 무릎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괸 채 제인에게 물었다.

“예뻐?”

제인은 넋을 놓고 그를 보았던 게 무안했던지라 허둥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남자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석양 말이야. 계속 보고 있길래.”

“아…….”

“석양, 좋아해?”

제인이 뒤늦게 경계 어린 얼굴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남자는 거의 다 저물어가는 석양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내가 사랑했던 여자도 석양을 좋아했거든. 이 세상 모든 석양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러기엔 인간의 생은 너무나 짧지.”

그가 웃었다.

“반딧불이처럼.”

제인은 어쩐지 그가 불편했다.

손톱만큼 남은 석양이 빠르게 가라앉고 있었다. 제인이 사막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프시오가 준 회중시계를 꺼내 들었을 때였다.

“방금 이 성당에서 언약식 했던 연인 말이야.”

제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불행해질 거야.”

제인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는 계속 웃고 있었다.

“그들은 저주에 걸렸거든.”

“지금 무슨 말을…….”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불쑥 다가왔다.

짙은 박하 향이 제인을 덮치듯 코앞까지 와서 눈을 곱게 접었다.

“그래서 구경하러 왔는데, 세상에. 더 재미있는 걸 발견했지 뭐야?”

“…….”

“또 봐.”

남자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총총 걸으며 인파 속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던 제인은 그가 남긴 찝찝함에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석양이 완전히 저물었다.

이제는 정말로 집에 가자고 생각하며 프시오가 준 회중시계를 다시 열었다.

이어서 그녀가 한 말을 떠올렸다.

-에스렐 잡화점 옆 골목에서 우회전하면 막다른 골목길이 나옵니다. 그 벽에 회중시계를 비추세요. 문이 열릴 겁니다.

올 때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 되는 거라 다시 찾아가는 건 수월했다.

잡화점 옆 골목길에 들어서서 막 우회전하려는 찰나였다. 제인은 자신의 옷깃을 당기는 손길에 걸음을 멈추었다.

“이 원단, 페브리아에서만 판매하는 건데!”

주근깨가 톡톡 박힌 소년이 제인의 상의 옷감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명랑한 무례함에 제인은 미간을 좁히며 골목길 안으로 따라서 들어온 사내들을 훑어보았다.

“누나, 페브리아 사람이에요?”

오늘 뭐가 많이 꼬이네.

다소 피곤한 기색을 내비치던 제인은 얼른 대답해주고 소년을 보내려 했다.

“그럴걸.”

“페브리아에는 근사한 원단이 무척 많아요. 언젠가 꼭 가서 실제로 보고 싶어요. 아, 참! 저는 저기 건너편 건물에서 보조 재단사로 일하고 있어요.”

“퇴근했어?”

“아직요.”

“가서 일해. 이거 놓고.”

“하하, 그래야죠.”

제인은 등줄기가 서늘했다.

웃음기 가득한 소년의 대답 뒤에 딸려 온 건 그녀의 등허리에 맞닿은 칼날이었으므로.

약간만 움직여도 살갗을 파고들 듯했다.

소년은 제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사내들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자 그녀의 주변으로 성큼성큼 모여들었다.

“누나 찾는 데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해서요.”

소년이 명랑하게 말했다.

“얼른 다시 일하러 가봐야 한다고요. 그러니까 돌아서서 손 좀 내밀어 줄래요? 묶어야 하거든요.”

제인은 벼락같은 상황에 실소했다.

“묶이는 거 안 좋아하는데. 그런 취향인가 봐.”

“……농담을 좋아하나 봐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해맑던 소년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소년은 마른 체형에도 불구하고 날 선 살기를 띠었다.

칼날이 더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혀를 잘라서 쥐여줄까요?”

제인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부모가 누구인지 무엇하나 모르는 그녀의 인생에 생일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했다.

생일?

그런 건 바란 적도 없었다.

그런데 죽음마저 이런 길바닥에서 치러지는 건 너무 기구하지 않나?

적어도 이런 곳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죽었을 때 번듯한 무덤과 기일만이라도 있었으면 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더라도 그랬으면 했다.

그 정도 욕심은, 부려 볼 수 있지 않나?

제인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농담이 싫으면 살려달라고 빌게. 어때?”

절박함과는 거리가 먼 목소리였다.

소년은 이상한 사람이네, 라고 생각했다가 허리를 굽히고 전과 다름없이 낭랑하게 말했다.

“누나, 우리는 사람 안 죽여요.”

설마.

이어지는 소년의 말에 제인의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다.

“암매장에 노예로 팔 뿐이에요.”

노예는 죽음보다 더 소름 끼치는 말이었다.

뒤에 있던 사내 중 하나가 제인의 어깨를 발로 밟으며 벽으로 밀쳤다.

그녀는 손이 밧줄에 묶이는 동안 언제든 복부를 헤집을 칼날 때문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있었다.

제인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석양이 저문 자리에 보라색과 자주색의 구름이 잔인할 만큼 아름답게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끝없이 차오르는 무력감이 제인의 몸과 마음을 덮쳤다.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웃었다.

무수히 많은 사랑.

살아가는 동안 하나씩, 천천히 배워간다.

함께.

그런 게 가당치 않은 삶인 거다.

처음부터 버려졌고, 자신을 학대했고, 그러다 거기서 도망쳐 온 삶에서 더 바닥으로 떨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컥.”

칼을 쥐고 있던 소년이 짧은 신음과 함께 제인에게로 풀썩 쓰러졌다.

그의 등 뒤에는 화려한 장식의 단검이 꽂혀 있었다.

다른 사내가 욕설을 내뱉으며 날아든 단검을 곧장 뽑으려는 순간.

그 사내의 등 뒤에 또 다른 단검이 박혔다.

“크헉!”

“남의 물건, 탐내지 말아요.”

등에서부터 가슴팍까지 튀어나온 짧은 칼날은 아래로 향하며 긁어지듯이 빠져나갔다. 그 때문에 제인의 얼굴을 비롯해 주변으로 핏자국이 번졌다.

몸을 휘청이던 사내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곧이어 밀리타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때 유일하게 남은 사내가 이를 으드득거리며 밀리타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넌 아까!”

밀리타는 소년의 등에 꽂혀 있던 단검을 우지끈 소리가 나도록 빼내었다. 그리고 두 손에 단검을 쥔 그녀가 빙그르르 돌아서 사내를 보았다.

제인과 밀리타를 번갈아 보던 사내가 이를 빠드득 갈며 중얼거렸다.

“제기랄, 함정이었나…….”

사내가 허리춤에서 칼을 꺼내더니 밀리타를 향해 달려들었다.

밀리타는 가볍게 살짝 비켜나면서 그의 목 언저리를 내리꽂듯이 찔렀다. 그리고 한 번 더 갈고리처럼 휘어지는 모양새로 단검을 뽑아 들었다.

붉은 피가 바닥에 버려지는 포도주처럼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벽으로 던져진 사내의 몸이 뒤늦게 미끄러졌다.

숨통이 끊어진 채로.

순식간에 사내 셋이 넝마가 된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들 모두 밀리타가 찔렀던 부위가 멍이 든 것처럼 검푸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석고처럼 굳어버린 제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피투성이가 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밀리타는 두 개의 단검을 모두 검집에 넣고 그녀에게 다가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리고 상의 안에서 작은 나이프 하나를 꺼내 들고는 제인의 손을 묶었던 밧줄 사이에 집어넣었다.

“당신, 구차하게 비는 건 여전히 못 하네요.”

투둑, 툭.

손목을 압박했던 밧줄이 힘없이 끊어지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긴 소매 위로 구겨진 자국이 여실히 드러났다.

“이렇게나 약해 빠졌으면서.”

제인의 손목을 풀어주며 밀리타는 가늠할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기분이 좋다거나 나쁘다는 것으로 표현하는 단순한 감정으로는 읽을 수 없었다.

제인은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상상했었다고 했지. 나를.”

밀리타가 작게 웃었다.

“매일요.”

제인은 그 말을 흘려듣지 말았어야 했다.

생각했어야 했다.

무엇을 보고, 무엇 때문에 저를 상상했다고 했을지.

제인의 시선이 피를 따라갔다.

이윽고 쓰러진 남자들을 눈에 담았다. 죽은 자들의 상처는 속도를 내어 더 검게 짙어져 갔다. 제인은 상처들의 부패 과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아직도 떨림이 멈추지 않는 제 손을 부여잡으며 중얼거렸다.

“……리졸브.”

“맞아요.”

제인은 시선을 밀리타에게로 옮겼다.

그녀가 무겁게 입술을 뗐다.

“리졸브만큼은.”

마취제로 제조했던 알토도, 화려한 단검에 묻은 리졸브도, 모두 마드리안 교황이 훔쳐 갔던 자신의 기밀 연구서에 들어있던 내용이었다.

그 자학의 산물에는 악용하기 쉬운 결과들이 있었다.

혹시 몰라서 그런 것들은 해석이 불가능에 가깝도록 암호로 기록해두었었다. 그중 하나가 리졸브였다.

“분명 쉽게 해석할 수 없도록 기록했었는데……?”

리졸브는 봄에 나는 캉고라는 식물의 기름과 가을에 만발하는 치크 꽃가루를 섞었을 때의 독성이 폭발하는 상태를 일컬었다.

제인이 그 독성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던 건 단순히 높은 치사율 때문이라 하기는 어려웠다. 그것보다 위험한 맹독 현상은 무수히 많았으니까.

이유는 단 하나였다.

두 식물은 계절의 간극이 있으나 일상생활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바로 그 계절의 틈새로 인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접점이 없었기에 독성 상태가 밝혀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만일 이처럼 단순한 재료의 조합 방법이 외부로 새어 나가게 되었다가는 악용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였다.

“……리졸브에 대한 해석도 교황청에 보고한 거야?”

“글쎄요.”

그녀의 미소 어린 대답에 제인은 오한이 든 듯 몸이 떨려왔다. 손을 부여잡아도 몸통을 흔드는 불안은 고스란히 표출되었다.

그때였다.

밀리타의 손이 제인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무력감을 느낄 때, 당신은 이런 얼굴을 하는군요.”

호의적이지도, 적대적이지도 않은 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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