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28)화 (28/168)

28.

다음 날.

제인은 식탁에 턱을 괴고 집 안 풍경을 멀뚱히 관망했다.

창백하리만치 핏기가 없는 프시오는 쓰러지기 직전의 모습으로 외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솜브는 그녀의 뒤를 파닥파닥 쫓아다니면서 안절부절못했다.

솜브는 제인을 보며 입을 뻥긋거렸다.

‘좀 말려봐요!’

제인은 어깨를 으쓱거렸으나 계속 무시하기엔 솜브의 눈 흘김이 따가웠던 터라 하는 수 없이 입술을 떼었다.

“가관이네요.”

솜브가 아연실색했다.

곧바로 소리 없는 뻥긋거림이 이어졌다.

‘그게 아니잖아요!’

제인은 방긋 웃으며 똑같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네가 말리던가.’

제인과 솜브가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아웅다웅하는 사이, 프시오는 그들의 곁을 지나 서재로 들어갔다. 이윽고 무언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인과 솜브가 달려가자 엎어진 사다리와 책더미 속에 파묻힌 프시오가 어지러운 듯 머리를 가로젓고 있었다.

솜브가 울먹거리며 소리쳤다.

“프시오 님!”

제인도 이마를 짚으며 쪼그려 앉았다.

“그 꼴로 어딜 가려고 하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은 내가 아니라 당신 옆에 있는 껌딱지가 하고 있는데.”

프시오의 시선이 솜브에게 향했다. 풀이 죽은 솜브를 몇 번 쓰다듬어 주던 프시오는 다시금 책더미 속을 뒤적거렸다.

제인이 물었다.

“하루 정도 쉴 수 없어요? 대체 얼마짜리 의뢰길래 이래요.”

“백 온트입니다.”

제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녀는 수중에 백 온트보다 훨씬 더 많은 금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 많은 금화의 출처는 루였다.

-이게 뭐야?

-금화.

-……실망하지 말고 들어. 나는 네 생각보다 머저리가 아니야. 주머니에 든 게 금화라는 건 나도 알고 있어. 이걸 나한테 왜 주냐고.

-보상이지.

-보상?

-나와 계약할 때 네가 가지고 있던 금화, 전부 바다에 빠졌잖아.

루의 말은 사실이었으나 금화 몇 닢에 비해서 지나친 보상이었다.

제인이 과하다고 말했으나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가버렸다. 사치스럽기 그지없는 무시였다.

그렇게 덩그러니 남겨진 금화 주머니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프시오가 제인에게 의식주를 제공해주고 있는 데다가 사막에서 돈을 쓸 일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 드디어 금화 주머니를 열 일이 생긴 것이다.

제인이 활짝 웃었다.

“그 돈이라면 제가!”

“아뇨.”

뭐가 아닌데요.

아직 말도 다 안 끝났는데.

제인이 심드렁해진 사이 프시오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제인. 모든 의뢰비에는 비용 이외에 신뢰를 포함합니다. 어떤 일이든 해결해 주리라 믿고 돈을 지불한다는 신뢰 말입니다.”

제인은 깨달았다.

솜브가 어째서 안절부절만 하고 말릴 생각을 못 했는지.

이 여자를 말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녀의 안위에 대한 걱정 따위로는, 조금도.

“저는 그렇게 신뢰를 포함한 비용만을 받습니다.”

“…….”

“당신은 저를 신뢰합니까.”

솜브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프시오가 외출하고 나면 연분홍색 드래곤이 얼마나 앙앙거리면서 울어댈지 안 봐도 뻔했다.

그 울음에는 등 토닥임 수법 같은 건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아연함은 이제 제인의 몫이 되었다.

프시오는 다시 책더미를 뒤지기 시작했다.

“……루에게는 받았잖아요. 데시안에게 믿음이 있을 리가 없을 텐데요.”

“데시안은 계약에 철저합니다. 신뢰를 대체할 수 있습니다.”

“그거나 이거나 똑같은 거 아니에요?”

“신뢰와 신용은 다릅니다. 이 기회에 똑똑히 알아 두세요. 세상은 그런 걸 경제적 수치로서 신용이라고 부릅니다.”

미치겠네.

제인이 머리를 북북 긁었다.

프시오는 퀭한 눈으로 책더미를 계속 뒤적였다.

“게다가 제가 받는 마법 의뢰비는 모두 선불입니다. 환불도 없어요. 배짱 장사죠. 그런데 엄살까지 피우면 되겠습니까.”

벌써 괴성에 가까운 울음이 들리는 듯했다. 제인이 암담한 낯빛으로 물었다.

“날짜를 미룰 수는 없는 거예요?”

“언약식을 주례자 때문에 미루는 게 말이 되나요.”

“……주례요?”

제인은 프시오가 책더미에서 겨우 찾아낸 주례 서적을 가리켰다.

“그거, 꼭 마법이 필요한 거 아니죠.”

몇 분 후.

프시오는 제인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안 됩니다. 대리 주례라뇨.”

제인은 그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프시오의 마법 의뢰 목록서를 가져와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설득했다.

열과 성을 다해.

제 귓속에 아직은 잘 붙어있는 고막과 드래곤이 울지 않는 조용한 밤을 위해.

“당신의 마법 의뢰는 비슷한 유형일 경우 묶음으로 구성이 되어 있어요. 하지만 환상의 프로포즈에 언약식은 포함되어 있지 않아요.”

제인이 확신에 차서 말했다.

“마법이 필요하지 않은 의뢰라는 뜻이죠.”

“…….”

“추가금 백 온트만 받고 별도로 진행하는 거, 맞죠?”

“…….”

프시오가 반박하지 못하자 제인이 기세를 몰아서 이어 말했다.

“솜브, 거울 가져와.”

“네!”

“지금 당신 몰골이 어떤지 아세요? 그 얼굴로 가면 언약식이 아니라 추모식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허풍 같아요? 솜브, 거울 줘 봐.”

“네!”

“자, 봐요. 관짝에서 나온 것 같은 얼굴로 주례하러 가면 신부가 너무 좋아하겠다, 그렇죠? 와아! 정말이지 잊지 못할 언약식이 되겠는데요!”

프시오가 말없이 거울에 손을 가져가더니 곧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제인은 흔들리는 그녀의 눈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프시오. 그들이 당신을 신뢰한다면.”

이어서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당신이 보낸 저 또한 신뢰하지 않을까요.”

* * *

바스락.

제인은 성당 앞에 서서 프시오에게 받은 주례사 봉투를 열었다. 내용을 한 번 더 소리 없이 회독하려던 그때였다.

다정하게 팔짱을 낀 금발의 남녀가 성당 쪽으로 지나갔다.

그들이 짓는 미소는 티 없이 맑은 날 강물에 반사되는 햇살처럼 반짝거린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빛이 났다.

제인이 살면서 한 번도 지어본 적 없는 종류의 웃음이,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 같은 행복과 기쁨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제인은 멍하니 서서 그들이 성당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눈치챘다.

오늘 이 언약식의 주인공이 두 사람이라는 사실을.

더불어 그림자마저 다정한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스스로가 오만했음을 깨달았다.

……대리 주례는 무슨.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그러나 돌이키기에는 성당 시계가 언약식이 가까워졌음을 알리고 있었다.

주례사 봉투를 품에 넣은 그녀는 발목에 모래주머니라도 달린 듯, 느릿하게 계단을 밟고 올라가다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만일 저토록 빛나는 게 사랑이라면…….

이윽고 소매 안에 숨겨져 있던 각인이 잿빛 눈동자에 담겼다.

루.

너는 나의 절망을, 결코 가져갈 수 없을 텐데.

한숨과 함께 발걸음이 다시금 무겁게 떨어지려 할 때였다.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지는 기분에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뭐지? 착각이었나.

예상과 달리 돌아본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제인이 다시 발걸음을 돌려 성당에 들어갔을 때였다.

기둥 뒤에 숨어 있던 누군가가 샐쭉하니 웃었다.

백금빛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접혔다.

“재미있는 거 발견.”

* * *

“프시오 님은, 많이 아프신가요?”

새 신부가 될 로안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엔니오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아주었다.

“과로예요.”

제인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 무리하게 일하셨거든요. 쉬면 나아지시겠지만, 오늘은 도저히 오실 수가 없으셔서 저를 대리로 보내셨어요.”

“그렇군요, 천만다행이에요!”

로안나는 정말 안심한 듯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구불구불한 금발, 오렌지색 눈동자, 도톰하고 보드라워 보이는 입술. 모든 게 사랑스러웠지만, 그중에서도 사람을 사로잡는 건 그녀의 유리알 같은 목소리였다.

제인은 로안나의 사랑스러움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외투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다시 인사드릴게요. 언약식에서 대리 주례를 맡게 된 제인이에요. 주례사 내용은 프시오 씨가 직접 작성하셨으니 그분의 진심이 두 분께 닿길 바라요. 다만 한 가지…….”

그녀답지 않게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이 자리에서 고백하건대 저는…… 사랑이라는 게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해요. 그런 제가, 두 분의 언약식에 누가 되지 않는다면 주례를 허락해주세요.”

짧은 침묵을 끊어낸 것은 로안나의 맑은 웃음소리였다.

“제인이라고 했나요? 재미있는 사람이군요!”

로안나가 제인의 손을 잡았다.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사랑이 있어요.”

따뜻한 손이었다.

제인은 그녀의 손이 싫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랑을 모두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살아가는 동안 하나씩 천천히 배워가는 거죠. 제가 엔니오와 함께하면서 알아가는 것처럼요.”

로안나의 말을 곱씹었다.

무수히 많은 사랑.

살아가는 동안 하나씩, 천천히 배워간다.

함께.

그때 엔니오도 로안나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이고 말했다.

“당신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마주할 수많은 사랑 중, 그 처음이 저희의 언약식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큰 영광입니다.”

제인의 눈이 살짝 접혔다.

이내 두 사람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언약식 시작할까요.”

* * *

노을이 지고 있었다.

제인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오가는 성당 계단에 앉아 건물 사이를 붉게 메우는 석양을 지그시 보았다.

루를 떠올리게 하는 시간이었다.

늘 이 시간이면 검은 새에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갔으니.

언약식은 그리 길지 않았다.

프시오가 작성한 주례사는 담백하고 아름다웠다. 로안나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게 조금은 이해될 정도였다.

식을 끝낸 두 사람은 제인에게 인사한 후 손을 잡고 성당을 나섰다.

그들의 그림자가 작은 점이 되어 반짝거리는 순간, 제인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

이어서 다소 놀란 표정으로 옆에 앉은 남자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박하 향.

너무나 익숙한 향기에 저도 모르게 돌아본 것이었다.

하지만 옆에는 루가 아닌 낯선 남자가 자신을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제인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천사가 존재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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