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홀로 작업실 구석에서 세공 중이던 라트올은 마석을 내려놓고 안경을 벗었다. 이어서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그는 자신이 어떤 죽음을 맞이할지 알고 있었다.
과로사.
그것 말고는 없으리라.
나쁘지 않았다.
일 중독인 그에게 그것보다 잘 어울리는 죽음은 없을 터였다.
잠깐 벗어 두었던 안경을 다시 쓰고는 달력을 보았다.
녹니스 납품일이 코앞이었다. 몇 번을 다시 봐도 날짜는 변함이 없었다.
그의 미간이 와락 구겨질 때였다.
익숙한 구두 굽 소리에 라트올이 뒤도 안 돌아보고 말했다.
“업무 보고 좀 드리고 싶은데요.”
제인을 재우고 온 루는 오자마자 냅다 일 얘기부터 꺼내는 조수를 약간 질린다는 듯이 보다가 자리에 앉았다.
“해.”
“곧 있으면 녹니스 납품일이에요. 명계 쪽에는 마석 입고하러 갈 때 바로 납품할 예정이고요.”
라트올이 손톱을 잘근 물었다.
“그런데 연옥은…….”
구겨진 그의 미간은 좀처럼 펴질 줄을 몰랐고 다리까지 달달 떨었다. 그는 이내 허리를 옹송그리며 괴로운 듯 말했다.
“루. 거기는 그냥 명계를 통해서 물량 가져가게 하면 안 돼요?”
라트올은 연옥에 가는 게 과로사하는 것보다 더 싫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거기 연옥 담당관이요, 이름이 뭐더라…….”
“솔레리안.”
허리를 휙 일으켜 세웠다.
“맞아요. 당신도 아시죠? 그 담당관 융통성도 더럽게 없고 갑갑한 거요. 갈 때마다 녹니스의 문제점에 대해서 한 시간 가까이 설교한다고요. 진짜 돌아버릴 것 같아요.”
루가 키득거렸다.
“그 기분 잘 알지.”
눈이 번쩍 뜨인 라트올이 기대하는 얼굴로 루를 보았다.
하지만 루는 그의 기대를 바닥으로 처박아버리듯이 웃었다.
“나도 그렇거든. 네가 한 번씩 잔소리할 때마다.”
라트올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거랑 이거랑 어떻게 같아요? 게다가 요즘엔 잔소리하지도 않는데!
와다다 말을 쏟아내고 싶었으나 결국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잔소리하지 않아도 될 만큼 루는 요즘 들어서 성실하게 일하고 있었다. 그런 주인님에게 구태여 입을 대서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가 없었다.
“설교 정도는 들어주고 와.”
루가 말했다.
“비록 몸은 연옥에 있지만 솔레리안은 르젤이야. 네 머리카락 한 올 못 건드리는 르젤.”
라트올은 자기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싶었다.
앞으로도 계속 솔레리안의 설교를 들어야 한다니.
그때였다.
“그런데, 라트올.”
지금까지 나른했던 루의 목소리가 음산해졌다.
“네가 직접 연옥에 가서 납품해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지 않나.”
순식간에 주변 공기의 온도가 낮아졌다.
잠시 서늘함에 몸을 떨던 라트올은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알겠어요.”
“다음.”
라트올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업무 보고를 마저 이어갔다.
“여기, 입고해야 할 마석의 목록이에요. 나머지는 명계 출처라서 제가 입고하면 돼요.”
목록을 살펴보던 루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벽면에는 수백이 넘는 종류의 마석들로 가득한 수납함이 천장까지 세워져 있었다.
“라라테는 지금도 충분한 것 같은데. 아니면 호엘리반이 또 깐깐하게 굴었나?”
“그 녀석이 깐깐하게 굴지 않는 일 같은 건 종말이 와도 없을걸요. 그래도 이번 납품 건은 딱히 별말없이 넘어갔어요.”
표정이 뭣 같았을 뿐이죠.
라트올의 뒷말에 루가 웃었다.
“그럼?”
“곧 있으면 드호아망에 가을 축제가 열리잖아요.”
라트올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라라테 추가 주문이 들어올 거예요.”
그렇군.
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고용주 자리를 넘겨줄 때가 됐나 보군.”
“후회하실 텐데요.”
“어째서.”
“제가 고용주가 되면 당신부터 해고할 거거든요.”
업무용 탁자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턱을 괸 루가 능글맞게 말했다.
“아쉬운 건 너일 텐데. 이 일을 계속하는 이상, 마석이든 보석이든 네 눈에 차는 원석을 가져올 놈들은 흔치 않아.”
“왜요?”
돌연, 라트올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피식거렸다.
“당신한테 받은 눈이라서요?”
일순, 둘 사이에 침묵이 파고들었다.
루는 웃음을 닦아내고 안경 너머의 라트올의 눈을 지그시 보았다.
라트올은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넘어가요.”
루는 라트올이 농담으로 한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라트올의 이면에 자리 잡은 부채감을 눈치챘을 뿐.
“싫은데.”
“…….”
루가 이전보다 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트올, 나는 네게 안목까지 주진 않았어.”
여전히 웃지 않는 얼굴로.
“네가 가져야 할 것이 부채감인지 자부심인지 아직도 헷갈린다면 알려주지. 앞으로는 후자를 가지도록 해. 그것도 아주 오만하게.”
“…….”
“네 안목은 네가 쌓아 올렸다는 걸 명심해.”
오만함을 가르치며 스스로 자긍심을 가지도록 한다.
이보다 만족스러운 명령이 있을까.
머리를 쓸어 넘기던 라트올이 얕은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가 아주 많이 기쁠 때 짓는 표정이었다.
루가 물었다.
“보고는 이걸로 끝인가?”
“네.”
무척 깔끔한 대답이었다.
루는 나른하게 웃다가 탁자 옆에 둘둘 말아서 세워져 있던 종이를 펼쳐서 라트올에게 보여주었다.
“……도안이잖아요?”
목걸이와 팔찌가 그려진 도안은 그 자체로도 예술품처럼 아름다웠다. 특히 초크 형태로 치밀하게 계산한 목걸이는 정교함이 이루 말할 데가 없었다.
하루 이틀 만에 만들어질 만한 도안이 아니었다.
루는 어지간하면 도안 의뢰는 받지 않는데.
라트올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직업병처럼 질문부터 했다.
“언제까지 완성하면 돼요?”
“천천히.”
라트올은 루의 말을 단박에 알아들었다.
정성을 들이라는 의미였다.
* * *
제인의 평화로운 일상은 계속되었다.
그 일상에 익숙해져 갈 때쯤, 불청객이 찾아왔다.
그것도 꽤 요란하게.
우르르 쾅!
“끼이에에에에에!”
“…….”
불청객의 정체는 마른하늘의 천둥이요, 번개였다.
기괴하게 우글거리는 하늘과 번쩍거리는 불빛의 향연 속에서 천둥의 굉음이 찢어지게 들려왔다.
그러나 제인이 듣기 괴로운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인내심을 가지고 읊조렸다.
“제발…….”
콰광!
“끼이에에에에에에에!”
“……제발, 입 좀 다물어.”
제인의 품에 안겨있던 솜브가 앙칼진 눈을 하고서 톡 쏘아붙였다.
“무섭단 말이에요!”
“그렇게 괴성 지르면 지나가던 유령도 안녕? 하고 들어오겠어.”
솜브가 울며 겨자 먹기로 제인의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몰라요, 몰라!”
제인은 소파에 앉은 채, 자기 품에서 앙앙 울어대는 솜브를 보다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프시오가 친 결계는 사막의 더위는 막았으나 번개의 음산한 빛과 찢어질 듯한 천둥소리까지는 막지 못했다.
게다가 정오에 외출한 그녀는 아직 귀가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겁많은 연분홍색 드래곤이 들러붙을 데라고는 불행히도 제인 말고는 없었다.
그런 솜브를 굳이 밀어내지는 않았으나 고막을 울리는 소리는 도무지 참고 들어주기가 힘들었다. 솜브를 냅다 던져버릴까, 몇 번이나 고민하던 그녀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보육원에서 아이들이 울 때 다이애나는 어떻게 했었더라…….
그때 솜브가 찬찬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는 눈물 콧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제인이 물었다.
“별로야? 이렇게 하면 울음을 그치던데.”
“덜 무서워요.”
“그러면 돼지 도살장에서나 들을 만한 소리는 그만 내줄래? 골 아프거든.”
솜브가 갸릉갸릉거리며 제인의 품에 다시 파고들었다. 등을 토닥여주던 제인의 손이 갑자기 멈칫했다.
“야, 너 방금 콧물…… 흘리지 않았어?”
“알게 뭐예요.”
“…….”
솜브는 계속해서 등을 토닥이라는 듯이 통통한 연분홍색 몸을 꼬물거렸다.
제인은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얼마 후.
천둥 번개가 그치면서 솜브도 깊은 잠에 빠졌다.
드래곤의 골골대는 소리만이 집 안을 울렸다.
괜히 몸을 빼냈다가 겨우 잠든 솜브가 깰세라 제인은 프시오가 오기 전까지는 이렇게 있을 참이었다.
인기척도 없이 열린 문 사이로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프시오!”
* * *
부스스한 모습으로 눈을 뜬 프시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신의 방이었다. 침대 한쪽에는 솜브가 몸을 동그랗게 말고서 잠들어 있었다.
“깼어요? 아직 새벽인데.”
뒤돌아보았던 제인이 주전자에서 마저 물을 따랐다.
프시오는 천근 같은 몸을 겨우 일으켜 앉고서야 속옷까지 갈아입은 상태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옷이…….”
“대체 뭘 하고 왔길래 쫄딱 젖어서 왔어요?”
프시오는 뽀송한 옷을 만지작거렸다.
“마물 퇴치 의뢰를 받고 간 숲에 폭우가 내렸습니다. 점성술 카드로 하루 전이나 다음 날 운세를 보고 외출을 하는 편인데…… 비가 온다는 징조가 없었거든요.”
프시오가 작게 덧붙여 말했다.
앞으로는 카드로 점을 치는 일은 없겠다고.
제인은 프시오에게 유리잔을 건네주고서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해열제예요. 다섯 시간 전에 마셨으니까 한 번 더 복용하면 열이 좀 내려갈 거예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프시오는 갈아입혀진 옷자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자 제인이 고개를 저었다.
“도무지 그대로 눕힐 수가 있어야죠. 코 묻은 제 옷이랑 같이 세탁 바구니에 담아 뒀어요.”
“……코?”
“솜브한테 단단히 일러두세요. 남의 품에서 질질 짤 땐 더럽게 코를 묻히는 게 아니라 다른 데 닦는 거라고요. 아니면 들이키든지.”
아리송한 얼굴이었던 프시오가 문득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사막에도 천둥 번개가 쳤었군요.”
“고막 나갈 뻔했어요.”
제인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솜브를 가리키며 말하자, 프시오는 천둥이 칠 때마다 얼마나 꺅꺅거렸을지 눈에 훤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더 자요. 열은 떨어지겠지만 일어나면 몸살을 심하게 앓을 거예요.”
“고맙습니다.”
“……저도요.”
방문을 나서려던 제인이 프시오를 힐끗거렸다.
“생각해 보니까 여태 고맙다는 말을 못 해서.”
제인이 머쓱한 듯 목덜미를 만지며 시선을 옆으로 흘렸다.
이윽고 무척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잠 못 이루던 밤의 따뜻한 우유도, 쓴 맛 나는 초콜릿도. 그런 사소한 것들이 내게는…….
이어지는 말들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어서 속으로만 곱씹을 때였다.
눈송이 같은 작은 웃음소리에 제인이 고개를 들었다.
어린아이의 얼굴로 무감한 표정만 짓던 프시오가 웃고 있었다.
“잘 자요, 제인.”
제인은 조금 놀랐다.
저 사람도 웃을 줄 아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쩐지 이상한 놀라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