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프시오가 아는 한, 루가 가장 가깝게 지내는 인간은 호엘리반이었다.
프시오는 그런 루를 싫어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소중한 사람 곁에 있는 악마를 어느 누가 좋아할까.
달가울 리 없었다.
거슬렸다.
하지만 짐작과는 다르게 루는 호엘리반을 현혹하지도, 타락시키지도, 그렇다고 계약 관계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루와 호엘리반을 지켜봐 온 세월이 무려 십여 년이었다. 그 세월은 신뢰까지는 아니더라도 쥐똥만 한 신용이 자리 잡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적어도 호엘리반을 무턱대고 해치진 않겠구나, 하는.
하지만 제인은 달랐다.
프시오는 루가 제인을 데려왔을 때 그에게서 제인이라는 존재가 호엘리반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
“그는 당신에게 상처를 줄 겁니다.”
“……상처요.”
제인이 작은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덫에 걸린 검은 새 한 마리를 떠올렸다.
제인도 알고 있었다.
낡은 덫에서 풀어주는 순간, 오히려 덫에 걸린 건 자신이라는 것을.
빌어먹을 검은 새는 사계절 내내 숲의 새들을 보내어 제게 오도록 했다.
막상 가면 의미 없는 대화가 전부였다. 심지어 그마저도 없이 그저 조용히 있다가 헤어졌던 날도 수두룩했다.
부르고, 가고.
그렇게 함께 보냈던 시간.
그게 전부였다.
고작 그 시간이 제인을 조금씩 달라지게 했다.
이를테면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게 되었다든지 하는, 아주 사소한 습관 같은 것 말이다.
약제사 시동 시절부터 시작해서 정식 약제사를 거쳐 연구원이 되기까지 제인의 고개가 위로 향한 날은 손에 꼽았다.
도서관이든 약제실이든 책에 파묻혀 지내거나 흙에 묻힌 식물을 뒤지는 나날들이 이어졌었다.
그런 그녀에게 루는 하늘의 색과 구름의 모양이 그토록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수없이 날아왔던 숲의 새들.
단 하루도 같은 색이었던 적 없던 노을 진 하늘.
지금에야 그의 마법이 풀어져서 전처럼 검의 새의 모습으로 돌아갈 일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하늘을 보는 습관은 여전했다.
이제는 관성이 된 것이다.
“프시오. 상처는요.”
상체를 일으킨 제인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느릿하게 말했다.
“사람도 주지 않아요?”
“…….”
“어쩌면 더 많이요.”
* * *
“안녕, 제인.”
저녁 식사 후, 씻고 온 제인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루는 활짝 열린 창문에 앉아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
방 안 가득히 들어찬 박하 향에 막 씻고 나온 제인의 비누 향이 소리 없이 섞여갔다.
계단을 올라올 때까지만 해도 프시오가 루가 왔다는 언질을 주지 않았으니, 문으로 들어온 게 아닐 터였다.
“……부탁이니까.”
제인이 말했다.
“사람 새끼가 아니더라도, 오가는 건 제발 문을 이용해 줄래?”
“인사가 야박하군.”
창문을 닫은 루가 침대에 누워 느슨한 몸짓으로 이불을 톡톡 두드렸다.
“이리 와.”
루가 다정하게 제인의 이름을 불렀다.
밤의 악몽을 거둬주기 위해서.
제인은 말없이 루의 곁에 누워서 새우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이불 속이 따뜻했다.
생각해 보니 바다 한가운데 떠 있던 배 안에서 그가 건네주었던 도포도 이상하리만치 온기가 더해져 있었다.
루가 이불을 더 끌어와 제인의 목까지 덮어주었다.
“몸은?”
“나쁘지 않아.”
“아닐걸.”
루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 상태는 항상 나빴어. 숲의 새들을 보낼 때마다 죽지 않고 내게 오는 모습을 보는 게 낙이었을 정도로.”
제인은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즐거웠겠어.”
“매우.”
어련하실까.
그는 질색하는 얼굴로 고개를 젓는 제인을 보고 짧게 웃었다.
“하지만 마나를 가진 인간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아마 넌 치유계열 마력을 가졌을 거야. 프시오도 그렇게 짐작하더군.”
치유…….
곧장 흥미가 떨어졌다.
제인은 사실, 그 분야와 자신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페브리아에서 연구원으로 고민 없이 전향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루가 제인의 젖은 머리를 넘겨주었다.
“드호아망에 가면 리톨이라고 불리는 책이 있어.”
“리톨이라면…….”
“그 책에 대해 알고 있나?”
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기심에 읽었던 마법 월간지의 내용이 떠올랐다. 마법 도시인 드호아망의 도서관에는 마나의 계열을 알려주는 백지로 된 책이 있다고.
그 책이 바로 리톨이었다.
“프시오에게 시간이 비는 날 같이 다녀오라고 일러두었으니 네 마나의 계열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와. 내가 같이 가고 싶지만.”
루가 눈썹을 뭉그러트렸다.
“진절머리가 나도록 까탈스러운 고객이 있어서.”
제인은 루가 보석과 마석을 다루는 일을 한다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곤 했다.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인이 말했다.
“의외네.”
“무엇이?”
“성실한가 봐.”
루가 웃었다.
“그럴 리가. 나는 나태하고 권태롭게 태어난 데시안인걸. 단지 고객이 까탈스러운데 부지런하고 깐깐한 조수를 둔 탓이지.”
희고 차가운 손가락이 은빛 머리카락을 천천히 빗질했다.
“네가 잠들면 다시 가봐야 해.”
“그래.”
무심한 대답을 끝으로 정적이 딸려왔다.
시계 초침 소리가 저토록 컸던가.
제인이 고요하게 내려앉는 푸른 시선과 가볍지 않은 침묵을 감내하고 있을 때였다.
여유롭게 머리카락을 빗질하던 차가운 손가락이 그녀의 목덜미를 살짝 거머쥐었다. 커다란 손바닥 안에 아물어 가는 자상이 가려지면서 힘이 지그시 들어갔다.
제인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거야?”
“만나면 반가워하고, 헤어질 땐 아쉬워했으면 하는데.”
“넌 내가 아니라…….”
그녀는 제 목덜미를 조르는 손을 겹쳐 잡았다.
“진짜 개를 데려왔어야 했어.”
“어째서?”
그가 장난스레 웃으며 그녀의 흰 목덜미에 난 흉터에 입을 맞췄다.
언제나처럼, 무척 즐거운 얼굴로.
“이토록 귀여운 강아지가 내 품 안에 있는데.”
* * *
같은 시각.
“제가 순진했군요.”
밀리타는 인적이 드문 좁은 골목길에 주저앉아서 제 목을 겨눈 칼끝을 내려다보았다.
“친절한 빵 가게 아저씨인 줄 알았는데 말이죠.”
칼을 쥔 장정이 바닥에 널브러진 빵을 옆으로 걷어찼다. 그러고는 밀리타 앞에 쪼그려 앉아서 눈높이를 맞추었다.
“추악한 페브리아인에게 베풀 친절은 지옥에나 있으니, 친히 그곳으로 데려다주마.”
그의 말에 밀리타가 조그맣게 웃었다.
“……웃어?”
“푸흐, 미안해요. 하지만 웃음이 나오는걸요. 며칠 내내 사경을 헤맬 정도로 앓다가 겨우 밖으로 나왔는데…….”
미소를 머금은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
“또다시 죽을 고비를 맞이했으니까요.”
페브리아의 결계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던 밀리타는 진즉에 각오하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면 몸에 통증이 수반되리라.
예상대로 몇 날 며칠을 앓다가 오늘 아침에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던 것이었다.
그때였다.
장정이 밀리타의 뺨을 투박하게 툭툭 건드렸다.
“걱정하지 마라. 죽이지는 않을 거다.”
장정이 곁에 있던 호리호리한 사내들을 향해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러자 한 사내가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머리를 위로 들어 올렸다.
장정이 낄낄거렸다.
“다행히 네가 갈 지옥은 그리 멀지 않아. 이 근방의 암시장에서 노예로 팔려 온 앙디스인을 너와 맞교환할 예정이거든.”
“앙디스…….”
“원망하려거든 그곳에서 해.”
“원망이라뇨. 제게 순진한 구석이 남아 있다는 걸 알려주셨는데 감사한걸요. ”
밀리타는 여전히 미소를 물고 있었다.
“그러니 보답으로.”
“!”
“지옥에 먼저 보내 드릴게요.”
“……컥.”
장정의 복부에 화려하게 장식한 밀리타의 단검이 깊숙이 박혔다가 거칠게 빠져나왔다. 온 사방에 장정의 붉은 피가 흩뿌려지면서 덥수룩한 머리통이 퍽 소리 나도록 땅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나중에 제가 가거든, 꼭 마중 나오셔요.”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곁에 있던 두 사내가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페브리아에서는 지옥에 떨어지는 순간까지도 이렇게 인사하도록 가르치죠.”
“…….”
“아낙시오니아의 은총을.”
밀리타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사내가 놀라서 본능적으로 손을 놓으려던 순간이었다.
그의 가슴팍에 화려한 단검이 순식간에 꽂혔다.
“크헉!”
단검을 잡은 여리여리한 손에 힘이 가해졌다. 피가 터져 나오면서 사방으로 튀었다. 그대로 무릎을 꿇은 사내의 상체가 비스듬하게 꺾이더니 철퍼덕 고꾸라졌다.
밀리타는 여전히 미소를 물고 있었다.
눈가에 튄 피를 손등으로 닦으며.
“……오, 오, 오지 마!”
남아 있던 사내가 장정이 놓친 칼을 주워 들고 덜덜 떨면서 뒷걸음질 쳤다.
밀리타는 그에게는 관심 없다는 듯 피 묻은 손의 손톱 사이를 톡톡 긁어냈다.
“사실, 빵집 안에서 만났을 때부터 세 분의 그림자가 모두 하나같이 부서져 있었어요. 그것도 완전히.”
밀리타가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요.”
사내가 그녀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몸을 돌리려는 찰나.
등 뒤에서 날 선 검이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사내의 허리가 활처럼 휘더니 박혀 있던 검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동시에 땅바닥으로 풀썩 꺼져버렸다.
이어서 뒤에 있던 무심한 표정의 카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피를 한 방울도 묻히지 않은 채 멀끔한 모습으로 검집에 검을 집어넣었다.
그에 반해 밀리타는 진득한 피를 뒤집어썼다.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두 손을 뒤로하고서 몸을 빙글 돌렸다. 이윽고 마지막 숨을 껄떡거리며 피를 왈칵 쏟아내는 사내에게 타박타박 걸어갔다.
죽어가는 이의 귓가에 나긋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곧 죽는다는 뜻이에요. 이렇게요.”